“다녀오면 우리를 외면했던 자들에게 기쁨을 주러 가자
아주아주 멋진 기쁨을”
겹겹이 쌓인 시간의 틈새를 비추는 내일의 햇빛
슬픔 곁에 함께 머무는 사람이 남긴 아름다운 진심
201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최현우의 두번째 시집 『우리 없이 빛난 아침』이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평단의 호평과 더불어 수많은 독자의 사랑을 얻은 첫 시집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문학동네 2020)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신작이다. 조곤조곤한 서정과 마음을 움직이는 비유가 여전한 가운데 세상을 보는 눈은 한층 깊어졌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불완전한 세상의 장벽에 부딪히고 깨지며 스러져간 삶의 단면들을 감각적인 언어로 그리며, “살 만하지 않은 삶을 살아내는 현대인의 비극적인 억척스러움과 무감함”(성현아, 해설)을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시인은 고통을 드러내면서도 절규하기보다는 침착하게 마음의 균열을 어루만진다. 우리가 외면해온 시대의 비극과 위태로운 삶의 풍경을 묵직하게 되짚는 “참회의 고백”(「마지막 빙하」)과 같은 시편들은 상처와 침묵으로 얼룩진 순간들을 되새기고 사람과 사람이 주고받는 위로의 본질을 성찰한다. 세상 곳곳에 자리한 통점을 날카롭게 감각하고 뜨거운 한 시절을 살아내며 한층 성숙해진 시적 자아는 이제 더 넓은 곳을 향해 나아간다.
“매일 살고 다시 슬픈 우리는
모두가 주인공이었던 것입니다”
“고통과 상처를 감지하는 예리한 촉수”(안미옥, 추천사)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곳까지 들여다보며 “통증 없이도 이토록 멍들 수 있는”(「충돌 지점」) 불완전한 세계의 아픔을 직시한다. 그러나 고통받는 이들의 “통곡은 몸에서 멀고”(「나의 실패」), 타자의 고통을 지각할 수 있다고 해서 그들의 상처를 온전히 위로하고 치유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히 안다. “사랑할 수 있는 일들만 사랑하고/용서할 수 있는 일들만 용서”(「숲과 숨」)하는 것에 익숙해진 영혼은 “부드러운 증오”(「외면하는 기쁨」)만을 드러내며 비참한 삶의 비애를 견디어낼 뿐이다.
깊은 미로 속을 헤매는 듯, 전망도 구원도 없는 세상은 참으로 비정하다. “매연으로 부풀어”(「나의 실패」)오르는 거리에 “하루에도 몇번씩/떠밀려와 눕지도 못한 채로 썩는 자들”이 널려 있어도 “모두가 신이 난 것처럼”(「가느다란 순간」) 병든 세계는 건재하다. “현생과 전생까지 순식간에 끌려 들어와/박살이 나는 찰나”(「충돌 지점」)에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세상은 순서도 도리도 없이”(「다식」) 무심히 흘러간다. 비극을 목격하고도 섣불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과 무력감 앞에서 시인은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고통을 기록하고, 이를 외면하며 살아온 날들을 치열하게 뉘우친다. 결국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큰 슬픔이 남긴 것은 “울음이 묻을까 피해 다닌 날들”(「벚꽃잎 흩날리면」)에 대한 반성이다. 타인의 아픔에 가벼운 위로의 말을 건네며 적당히 공감하는 것에 익숙한 세상에서, “그냥, 네가 울면 나도 울게”(「너의 날개」) 된다는 시인의 고백은 우리가 주고받았던 애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계절의 속력을 스스럼없이 좋아하던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영원이 될 찬란한 마음들에게
시인은 ‘혼자’라는 말의 쓸쓸함과 두려움을 알기에 “멍든 것처럼/어깨를 두드리면 자꾸만 우는 사람들”(「12월 30일」)을 외면하지 않고, “서럽고 저린 것들”(「너의 날개」)을 “혼자로 두지 않으려”(「충돌 지점」) 한다. 그들에게 다가가 가만히 곁에 있어주고, 고단한 삶의 그늘 속에서 반짝이며 “자꾸만 대신하여 맨 위에 포개지는”(「영원한 햇빛」) 영원의 빛을 발견한다. 그리고 “미래의 아름다움”(「나의 실패」)을 믿으며 어쩌면 들리지 않고 사라져버릴지 모르는 노래를 계속하는 법을 배워나간다. “슬픔이 외골격인 사람”(「유년」)이 되지 않으려고, “매일 살고 다시 슬픈 우리”(「주인공」)의 삶을 “오래 사랑하려고”(「손과 구름」). 시인은 더 나은 위로를 완성하기 위해 단어를 고르고 또 고르며 영원한 “햇빛의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거기, “너를 위해 만든 세상”에 “사람이 살게 하려고/사람을 두었다”(「디어 마이 프렌드」)는 진실한 고백이 빛나는 아침을 준비해두고 우리를 기다린다.
들꽃을 주워 화병에 담아 기른 적 있다.
밟혀서 짓무른 줄기가 곧잘 살아나기도 했는데
너는 왜 없는 것들만 적어두냐고 묻는다.
그래도 오늘 아침,
한번만 더 물을 주면 안 될까요?
다시 피고
좀더 살지 모르잖아요.
빈 병을 품에 안고 차례를 기다린다.
멀리 누군가 햇볕을 끼얹으며 까르르 놀다가
말없이 옆에 와서 같이 늙어준다.
2025년 봄
최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