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을 견디는 오늘의 우리에게
표명희가 전하는 다정하고도 힘찬 위로
권정생문학상·오영수문학상 수상 작가, 『어느 날 난민』 표명희 신작
『어느 날 난민』 『버샤』 등을 통해 난민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며 묵직한 울림을 주었던 표명희 작가의 첫 번째 청소년소설집 『당근이세요?』가 창비청소년문학 133번으로 출간되었다. 이전에 발표했던 단편소설 세 편과 신작 중편소설을 담은 이 소설집은 지극히 평범해 보이지만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청소년들의 일상에 주목한다. 중고 거래를 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반려동물을 돌보며 책임감을 배워 나가는 소설 속 청소년들은 꼭 동네 어딘가에서 마주친 우리의 이웃과 닮았다. 역사적 사건이 남긴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 소위 말하는 ‘정상 가족’과 다른 모습의 가족에 속한 청소년들의 마음을 살피면서도 함부로 연민하지 않는, 표명희 작가 특유의 담백하고도 섬세한 태도가 빛을 발한다.
“길 잃은 미운 오리 새끼를 우연히 만나면 이런 느낌일까.
안쓰럽고 도와주고 싶지만
부리에 쪼일 것 같아 선뜻 손을 내밀기도 어려운…….”
표제작인 중편소설 「이상한 나라의 하루: 당근이세요?」는 경기도 어느 신도시에 사는 중학생 ‘나라’의 소소하고도 수상한 하루를 그렸다. 대기표를 받고도 한참을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인기인 ‘추 선생 공부방’은 엄마의 일터이자 나라의 집이다. ‘인 서울’을 욕망하는 공부방 학부모들과 달리 모녀는 ‘탈 서울’을 감행해 2년 전 이곳에 정착했다. 공부방 학생들의 성적에만 관심을 둘 뿐, 나라의 성적표는 “전단지 보듯”(42면) 하는 데다 “잔소리형 관심”(37면)을 줄 새도 없이 바쁜 엄마이지만 나라는 알고 있다. 새로운 도시에 정착하는 일이 홀로 생계를 책임져 온 엄마에게 “솜뭉치 같은 구름 위에 발을 올려놓는”(53면) 일과 다름없었다는 것을. 소설은 아파트 단지에서 광역버스 정거장으로, 작은 신도시에서 서울 한복판으로 공간을 이동하며 각양각색의 인물들을 응시한다. 이주 배경을 지닌 이웃들이 자연스레 함께하는 도시의 풍경을 포착하고, “가족 구성에 구멍이 숭숭 나 있다는 공통점”(62면)을 지닌 나라와 친구들의 사연을 전한다. 더 이상 다양한 삶의 모습이 낯설지 않은, 우리의 오늘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지극히 평범한 청소년의 일상을 통해
생생하게 그려 낸 한국 사회의 면면
그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어른들은 아직도 2002년 이야기만 하면 흥분하는 걸까. 소설집을 여는 「딸꾹질」은 월드컵이 한창인 2002년 대한민국을 ‘지완’의 시선으로 관찰한다. ‘386 세대’인 엄마 아빠는 분명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정치 문화적으로 업그레이드가 안 될 것 같으니 스포츠로 승부하려는 모양이지”(13면)라며 비판적으로 굴었지만, 이제는 자정이 넘도록 같은 경기를 반복해서 보며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못한다. 소설은 축구 경기장뿐 아니라 가족과 이웃의 일상에까지 찾아든 ‘월드컵의 이변’을 유쾌하고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반전의 쾌감에 20세기 초입의 대한민국이 왜 열광했는지 알게 한다.
「오월의 생일 케이크」에서 ‘민서’는 큰아빠의 생일을 맞아 할머니 댁을 찾는다. 1980년 5월, 군인이었던 큰아빠는 광주에 투입되었다. “요샛말로 엄친아, 둘도 없는 모범생”(93면)이었던 큰아빠는 군에서 조기 제대한 이후 대학에 돌아가지 못했고, 그때의 트라우마는 여전히 그의 삶에 크게 남아 있다. 국가가 자행한 폭력이 가족에게 남긴 상처를 청소년의 시선에서 세심하게 들여다보며 우리의 아픈 현대사를 되짚는다.
「개를 보내다」는 돌봄의 책임을 배우고 성장하는 ‘진서’의 이야기를 담았다.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상처받은 후, 게임의 세계에 몰두하게 된 진서는 생일 선물로 유기견 ‘진주’를 만나게 된다. 충분한 준비 없이 이루어진 입양 탓에 시작은 삐걱거렸지만, 진서는 마음의 문을 열고 진주를 돌본다. 하지만 사람 나이로 이미 노년에 접어든 진주는 점점 기력을 잃기 시작한다. 개와 함께하며, 또 ‘개를 보내고’ 난 뒤에 남는 마음을 애틋하면서도 담담하게 살핀다.
시대와 얽힌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를 향한 이야기
『당근이세요?』는 1980년과 2002년,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가 거쳐 간 시대의 빛과 그림자를 생생하게 담고 있다. 전 세계로 뻗어 나가는 한국 문화를 목격하며 자부심 넘치는 선진국이 된 오늘을 살아가는 청소년들이지만, 이 소설집이 전하는 감각들이 낯설지만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지켜내야 할 민주주의가 있고, 사회적 참사에 함께 슬퍼하고 애도한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표명희의 소설들은 우리 사회의 일은 곧 나의 가족과 이웃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한편, 작가가 생생하게 그려 낸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내가 쓰지 않는 물건을 필요한 이웃에게 ‘나눔’ 하는 작은 선의 또한 우리 주변에 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가족, 이웃이 모여 사는 한국 사회가 어쩌면 그리 삭막하지만은 않다는 기대를 품게 하는 책으로, 다양한 세대의 가족 구성원이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눌 만한 특별한 작품이다.
딸꾹질
이상한 나라의 하루: 당근이세요?
오월의 생일 케이크
개를 보내다
작가의 말
수록 작품 발표 지면
저마다 색깔이 다른 작품들을 한 배에 싣고 시간적 배경을 따져 보니 애써 청한 구보 씨의 시대에서부터 우리 현대사의 아픔인 5·18과 온 나라가 환희로 들끓었던 2002 월드컵, 그리고 오늘날 우리 사회의 풍속도인 반려견과 이주자 가족 이야기까지 작품마다 시대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 있다. 다른 점이라면 그 일들을 주인공인 청소년의 시선에서 바라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