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쩍 말이 많아진 너의 이야기가
가득 차올라
빛과 함께”
자유와 상상의 날개로 힘차게 비상하는 시
‘없음’의 아름다움을 있게 하는 신선한 감각과 맹렬한 인식
공감을 자아내는 페미니즘적 시선과 일상적 시어의 비일상적 연쇄가 주는 신선한 목소리로 주목받아온 윤유나 시인이 두번째 시집 『삶의 어떤 기술』을 창비시선 514번으로 펴냈다. 시인은 한층 선명해진 주제의식과 활달한 상상력으로 시공을 넘나들며 “감각과 이미지의 직관적 연상을 따라 자유롭게 흘러”(최다영, 해설)가는 매혹적인 시세계를 펼쳐 보인다. 시집 곳곳에서 “슬픔을 말하다 중단하고, 갑작스럽게 희망이 끼어”들기도 하는 “종잡을 수 없는 목소리”(양안다, 추천사)가 우리 모두의 삶을 대변하듯 요동치는 한편, 솔직하고 유연한 시인의 사고방식이 외롭고 지친 마음을 다정다감하게 어루만진다.
“내가 너무 사랑했다, 가짜인 줄 알면서도”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언어의 세계
윤유나의 시에서는 꿈속을 거닐 듯 몽환적인 풍경이 다채롭게 펼쳐지고 그 산발적인 이미지들 속에 애타게 그리운 마음이 일렁인다. 이는 단순히 보고 싶은 사물이나 기억을 소환하기 때문이 아니라, 드넓은 상상력을 통해 실체가 없는 대상을 실재하는 것처럼 여기는 시인만의 “없음의 있음”(해설) 양상을 통해 환기되는 정서다. 예컨대 시인은 “형체 없는 마음에 모양을 주”(「결혼 없이 하지」)는가 하면, “가져본 적 없”(「약자」)는 아기의 안부를 물으며 무형의 대상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 “이제껏 본 적 없는 인물이 탄생”(「즐겁다」)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이처럼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시적 상황들은 읽는 이의 상상을 끊임없이 자극함과 동시에 그리움의 정서를 아스라이 퍼뜨린다.
지나간 시절에 대한 애달픈 마음 또한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시인은 이제는 없어진 것들은 아주 잊어버리려 하지만 “너무 잊고 싶은 마음”(「말이 안 되는 마음」)이 오히려 기억을 또렷이 되살려내는 역설을 마주한다. 이 과정에는 “있음-없음-사라짐”(해설)으로 이어지는 독특한 인식의 단계가 존재하는데, 예컨대 “완전히 없는 것/없지”(「우유를 마셨어」)라는 문장은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는 ‘없음’ 상태에서 여전히 ‘있음’으로 존재한다는 깨달음을 드러낸다. “지나간 것들은 모두 목소리를 지녔”(「피를 뒤집어쓰다」)고 “사라진 상태로 나타날 수 있”(「말이 안 되는 마음」)다고 믿기에 시인은 ‘없음’의 상태를 어느 정도 실체를 지닌 것, 말하자면 “기억을 붙잡아두는 일종의 장소”(해설)로서 인식한다. 이렇듯 상실의 자리까지 돌보는 시인의 담담한 어조는 다양한 종류의 상실을 매 순간 겪으며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위로와 용기를 건네는 듯 다정하다.
한편 시인이 거니는 꿈속이 마냥 ‘꿈결’ 같지만은 않다. 포식자가 피식자를 한입에 집어삼키는 야만의 현실이 수시로 틈입한다. 이때 시인은 제 안의 잠재된 공격성을 솔직하게 내보인다. “너를 혐오할 것이고/긴 밤에 이르러 너를 저주할 것이고/너를 망하게 할 것”(「돼지 없는 동물원」)이라는 분노가 들끓다가도 “내가 전부 잘못했다고 이를 악물고”(「쑥 찜질」) 참아내는 것이다. 때때로 “너를 사랑해//죽여버릴 거야”(「걔가 말을 옮겼어」)와 같은 상반된 감정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는 “마음이 하는 거짓말”(「추측」)이라기보다 악몽 같은 현실 속에서 “내가 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던 시간들”(「결혼 없이 하지」)에 가깝다. 분노와 인내, 혐오와 사랑이 진동하듯 펼쳐지는데 이는 ‘직진하는’ 언어에서 한 걸음 도약해낸 시적 결실이자 누구에게나 공감으로 가닿을 마음속 폭풍이다. 누구나 “나한테 거짓말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은 나”(「약자」)이기에.
시인은 이처럼 세계의 폭력 앞에서 그 누구보다 예민하고 솔직하다. “사람한테 달려들 때마다 내가 짐승 같고”(「결혼 없이 하지」), “어떤 날은 내가 너무 더럽게 느껴진다”(시인의 말)고 속마음을 토로한다. “나를 사랑하는 일과 사랑하지 않는 일이 동시에 벌어”(「결혼 없이 하지」)지는 일상 속에서 무력감과 슬픔을 느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람과 관계할 수 있을까”(「즐겁다」) 묻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은 “언어를 뛰어넘는 아름다운 언어/언어 없는 언어”(「고유감각」)로써 산재하는 폭력과 지저분한 내면을 “정화하는 일”(시인의 말)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숱하게 사라지는 세상마저 끝끝내 살아지는 시인의 따뜻하고도 강인한 마음이 “인간을 도저히 미워할 수 없”(「삶의 어떤 기술」)기 때문이다. “아무도 아프지 않게 하는 것”(「추측」), 다시 말해 “그냥 마냥 좋아하는 마음”(「그냥 바다」)으로 씩씩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시인이 마침내 터득한 ‘삶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내가 너무 더럽게 느껴진다
그럼 시를 읽어야지
사는 동안 정화하는 일을 멈추지 못하겠지
그랬으면
2025년 2월
윤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