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소설선

기술자들

김려령  소설집
출간일: 2024.07.26.
정가: 15,000원
분야: 문학, 소설

누구에게나 잡스럽지만 든든한 비장의 무기가 있다!

소박한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김려령식 이야기의 힘찬 도약

우리 모두의 인생에 부치는 각별한 격려와 응원

 

메가 히트작 『완득이』로 전국민의 사랑을 받은 데 이어 『우아한 거짓말』 『트렁크』 등 문학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춘 작품을 잇달아 펴내며 전세대를 아우르는 독자층을 보유하고 있는 작가 김려령의 신작 『기술자들』이 출간되었다. 청소년 소설의 외피를 지닌 『샹들리에』(창비 2016)를 제외하면 처음 선보이는 본격 소설집으로, 8년간 모아온 작품들을 엮어 더욱 큰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평범한 개인과 가족의 모습을 통해 우리 시대 다채로운 삶의 풍경을 소담하게 담아낸 이번 책에서도 경쾌한 묘사와 매력적인 인물, 상투를 거부하는 서사로 사랑받는 김려령의 ‘이야기꾼’ 면모는 확연하다. 또한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상식이나 제도에 질문을 던지며 물밑의 갈등을 거침없이 드러내온 전작들처럼, 이번 소설집의 도식적이지 않은 가족서사들은 삶과 관계에 대한 굵직한 고민의 궤적을 남긴다. 유사 가족이 된 두 중년 기술자의 동행, 부모가 자식 등골 빼먹는 ‘불량 가족’, 다 자라고도 ‘어른 아기’처럼 부모에게 기생하는 자식 등 파격적인 한편 너무도 그럴 법한 이야기들은 가족이라는 타인을, 또 낯선 나 자신을 새로운 관점에서 돌아보게 만드는 한편 모두가 각자의 앞에 놓인 삶을 충실히 살아내도록 다독인다.

 

너무 늦었다고,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할 때

바닥에서 시작되는 조금씩 채워가는 이야기

표제작 「기술자들」은 “당장의 일이 곧 본업”인 떠돌이 노상 기술자들의 이야기다. 베테랑 배관공 ‘최’는 팍팍한 현실에 집도, 가게도 정리하고 유일한 자산인 승합차에 모든 살림을 챙기고 유랑을 준비한다. 마지막 의뢰를 시공하러 가는 길에 만난 떠돌이 ‘조’도 최의 방랑길에 얼렁뚱땅 합류한다. 정처 없이 다니며 노지에서 차박하는 고단한 삶이지만 손발이 척척 맞는 최와 조는 자잘한 의뢰를 받아가며 생활한다. 일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가끔은 좋은 일도 생긴다. “오늘만 같아라”라고 중얼거리는 날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이보다 더 진정성 있게 그릴 수 있을까. 성실하게 일상을 일구는 두 콤비의 투박한 우정이 촉촉하게 마음을 적신다. 배관이며 실리콘, 줄눈, 타일처럼 “작지만 정확한 세상의 노동”을 통해 “작은 균열을 둘러싼 세목에 충실하려”(해설, 정홍수) 하는 김려령의 따스한 시선에서 우리는 일상 속에 숨겨진 많은 삶의 ‘이유’들을 발견하게 된다.

지나간 상처를 딛고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묵묵한 감동은 「오해의 숲」에서 좀더 극적인 반전과 함께 그려진다. 직장에서 퇴사하는 날, 손절한 동창이 같은 회사에 입사해서 마주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도,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도 자신이 모난 성격 탓에 ‘폭탄’ 취급받는다 생각한 재영의 상처는 악연으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우연으로 마주한 증언자 하윤에 의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재영은 대체 무슨 억측과 망상을 하며 살아온 걸까? 한순간의 오해를 이용해 갈등의 심화와 해결을 동시에 꿰뚫는 플롯은 과감하고, 그 과정에서도 해소되지 않은 상처의 그늘까지 놓치지 않는 감각이 미덥다. 모두 각자 오해의 숲을 헤매며 사는 동안 내리는 판단의 무게를, 그럼에도 새로운 생의 서막을 마주하는 벅찬 설렘과 용기를 작품 속에서 느낄 수 있다.

 

“한번 틀어진 가족은 절대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요동치는 가족 현실과 흔들리지 않는 중심

이번 책에서는 개성적인 가족 이야기들이 특히 흥미롭다. 삶에 대한 일면적이지 않은 이해에서 발원해 이야기의 ‘패턴’을 파훼하는 작가의 면모가 빛을 발하는 대목들인데, 이런 다종다양한 가족들의 모습은 낯선 전개와 파격적인 결말로 몰아치며 독자의 마음에 강렬한 파장을 남긴다. 한편의 ‘매운맛’ 흙수저 잔혹사 「세입자」의 주인공 ‘나’의 부모는 과거에는 중학생이던 ‘나’의 알바비로 생계를 꾸렸고 지금은 수술비를 명목으로 호시탐탐 ‘나’의 월급을 노린다. 장녀의 등골을 빼먹으려 작정한 전형적인 ‘불량 가족’으로부터 탈출하듯 집을 나와 반지하방을 전전하던 ‘나’에게 어느 날 서울의 아파트에서 저렴한 월세로 살 기회가 찾아온다. 해외근무로 집을 비운 집주인이 싼값에 월세를 내놓은 것. 집 일부만 사용할 수 있는 셋방살이지만 주인 없는 멀쩡한 아파트에서 살며 처음엔 그저 행복했다. 하지만 악착같이 자신을 찾아오는 가족의 마수를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다. 셋방살이도 생각보다 설움이 지독하다. 베일이 덮인 명품 가구들, 세입자는 이용할 수 없는 편의시설들은 비참한 처지를 매순간 일깨운다. 심지어 멀쩡한 듯하던 집주인에게서도 알고 보니 불량 가족의 사정이 자리해 있다. 온통 함정과 기만이 도사리는 이 집에서, 지긋지긋한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자식을 미워하는 어머니의 지극히 합당한 사정도 있다. 「황금 꽃다발」의 팔순 앞둔 노모는 부모에게 얻을 것 다 얻어내며 자라 성공한 삶을 살면서도 이른바 ‘흙수저 마케팅’으로 돈과 명예를 좇는 큰아들에게 더이상 줄 사랑이 없다. 대신 손대는 일마다 시원치 않지만 묵묵히 형 뒷바라지하며 소박한 행복을 가꾸는 막내에게 그녀의 사랑이 향한다. 집 안 청소를 하며 ‘희생자’로서 살아온 과거와의 이별을 선언하는 「청소」의 주인공은 비슷한 듯 다른 길을 걷는다. 홀로 일하며 자식 둘을 헌신적으로 키워온 ‘그녀’는 자신을 하인 부리듯 하찮게 사용하며 존중이라곤 할 줄 모르는 자식들을 미워하진 않는다. 다만 일주일간의 대청소를 통해 “다 닦고 다 버리고 남길 것은 남”긴 채 미련 없이 자식들을 떠난다. 부모를 욕보이며 없는 가난을 지어내는 아들의 무도한 행태도, 당당하게 편애를 선언하는 솔직한 모성도, 홀가분하게 자식을 떠나 뒤돌아보지 않는 결단도 가족 이야기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소재다. 하지만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당당한 선택을 내리는 인물들 앞에서 옳고 그르고의 판단은 힘을 잃게 된다. 각자의 삶을 일구어가는 이들을 응원하고 싶어질 뿐이다.

 

우리 시대 삶의 모습을 오롯이 담은

‘투명한 가벼움’의 예사롭지 않은 경지

“작가의 현미경에 포착된 우리 삶이란 게 그 얼마나 많은 실핏줄 같은 이야기의 줄기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인지, 새삼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추천사, 공선옥)는 표현처럼, 이번 작품집에서 일상적인 소재에서 시작된 이야기들이 내밀한 삶의 중핵으로 천연덕스럽게 돌입해가는 치밀함과 돌파력은 압권이다. 보잘것없던 일상의 디테일도 김려령의 렌즈를 거치면 달라진다. 삶의 중대사라 믿어온 것들이 한순간에 조각나고, 잊고 있던 잡동사니가 반짝이며 변화를 몰고 온다. 「뼛조각」의 주인공 수원은 우연히 자신의 무릎 옆에 작은 뼛조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상생활에 별 지장은 없지만, 지금 수원에게 이 뼛조각은 심각한 문제(여야만 한)다. 인턴기간이 끝나가도록 정직원으로 전환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차마 아버지에게 말할 수 없던 차에 때마침 무릎에 염증이 생긴 것. 수원은 수술을 핑계로 당당히 사직서를 내고 안 해도 될 뼛조각 제거 수술을 강행하는데, 그런 엄살을 응징하듯 입원 기간 내내 숱한 위기가 닥친다. 아버지는 간병인으로 묵묵히 수원을 돌본다. 왜 수원의 청춘은 뼛조각처럼 성가신 취급만 받는가. 늘 핑계만 대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왜 아무 말이 없는 걸까. 철없이 서러운 청춘과 그런 아들을 보듬는 아버지의 모습이 애달프게 우리 가슴을 흔든다.

가족 문제를 둘러싼 의견 차이로 이별하는 연인 이야기를 다루는 「상자」는 갈등 자체보다도 갈등으로 촉발된 성찰과 성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주인공 ‘나’는 오랜 연인 ‘상우’로부터 어처구니없는 이별 통보를 받았다. 엄마가 33년간 보관한 상자 속 ‘나’의 어릴 적 유아용품들을 보더니, 이걸 여태 간직한 엄마와 ‘나’의 관계가 소름끼쳐서 더는 못 만나겠다는 것. 이 정 떨어지는 이별 사유에 마음은 미련 없이 정리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상우의 반응은 지나치다. 남의 끈끈한 가족애를 그렇게 폄훼하다니. 더 분한 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정말 우리 가족이 유난인 것일지도, ‘나’는 이 나이 먹도록 어리광만 피워온 어른 아기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상자를 정리하며 상우와의 관계도,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온 의존적인 삶도 버리겠노라 마음먹는다.

경쾌한 보법으로 불필요한 갈등이나 감정 소모를 뛰어넘으며 인물 내면의 성찰에 집중하는 이야기들을 읽으며 우리는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들을 떠올려보게 된다. 감춰져 있던 속마음들을, 엉망진창으로 꼬여버린 관계의 해법을,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잊고 있던 소중한 무언가를 끝내 발견하고야 만다. 힘주지 않아도 유려하고 숨 쉬듯 자연스럽게 문학 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작가, 김려령이 다다른 더 넓고 밝은 지평이 이번 책에서 약연하다. “개개 인물의 목소리와 그들의 ‘잡다한’ 시간에 충실하면서”(해설) 앞을 향해 힘차게 걸어가는 이야기들에 발걸음을 맞춰보자. 김려령만이 보여줄 수 있는 소박하게 사랑스러운 감동이 찾아와 당신과 동행할 것이다.

 

목차

기술자들

상자

황금 꽃다발

뼛조각

세입자

오해의 숲

청소

 

해설 | 정홍수

작가의 말

김려령의 소설을 보면 작가가 항시 미세 현미경을 들고 다니는 것 같다. 작가의 현미경에 포착된 우리 삶이란 게 그 얼마나 많은 실핏줄 같은 이야기의 줄기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인지, 새삼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기실, 우리 삶은 이야기 빼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을까?
김려령은 정교한 집도칼로 그 실핏줄 속을 헤집으며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자세로 숨어 있던 이야기들을 들어 올려 우리에게 조곤조곤 보여준다. 상처 난 곳을 헤집어 화근을 보여주며, 봐요 진상이 이런 겁니다, 하고 말하는 김려령은 그러니 외과의사형 작가인 것도 같다.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화근의 연원과 과정과 결말을 보도록 만들어 끝내는 우리 인생에서 놓쳐서는 안 될 무언가를 ‘득템’하게 만드는 힘이 김려령 소설에 분명히 있음을 이 소설집에서 확인하게 된다.
우리에게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를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먼저 김려령 소설을 읽어야 하겠다. 공선옥 소설가

저자의 말

대개의 글은 공개를 염두에 두고 씁니다. 마침내 지면을 얻어 글이 실리면 힘든 고비를 넘긴 듯 안도합니다. 동시에 그 순간부터는 온전한 내 것이 아니게 된 듯 헛헛함도 생깁니다. 세상에 내보낸 글은 어떻게 해석되든 이제 독자의 몫이니까요. 그러다보니 오로지 저를 위해 꼭 쥐고 있을 비공개 작품이 필요했습니다. 내게 불쑥 들어온 이야기, 안 쓰면 안 될 것 같아서 쓴 이야기 등 작품마다의 사연은 있지만, 어떤 글들은 안 보여주겠다는 치기로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대단한 작품이어서가 아닙니다. 저만의 애착 작품이 필요해서 그랬습니다. 공허한 헛헛함을 그렇게 달랬습니다. 이 책에 실린 두편은 이미 공개됐지만, 나머지 다섯편은 저러한 이유로 품고 있던 이야기들입니다. 문득 너무 오래 안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 책으로 엮을 기회가 생겼습니다. 어쩌면 이제 세상으로 나가려고 그동안 폭 안겨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성껏 손봐서 내보냅니다. 제 마음이, 이야기 속 인물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닿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주 따뜻하게.

2024년 6월

김려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