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507

남겨두고 싶은 순간들

박성우  시집
출간일: 2024.07.26.
정가: 11,000원
분야: 문학,

“그대에게 빈틈이 없었다면

나는 그대와 먼 길 함께 가지 않았을 것이네”

 

누구에게나 오래도록 남겨두고 싶은 순간이 있다 

일상의 소중함을 깨우치는 아름다운 마음들

 

백석문학상, 신동엽문학상, 윤동주젊은작가상 등을 수상하며 한국 서정시의 거장 반열에 오른 박성우의 신작 시집 『남겨두고 싶은 순간들』이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자연과 어우러지는 사람살이 본연의 리듬을 창출해내고 이제는 희귀해져버린 토박이의 삶과 언어를 새롭게 발견”했다는 평을 받은 백석문학상 수상작 『웃는 연습』(창비 2017) 이후 7년 만에 펴내는 다섯번째 시집이다. 백석의 향토성과 서정성을 계승하면서도 세심한 감수성을 동원해 다양한 공동체적 양식을 살피는 시인의 눈길은 한층 넓고 깊어졌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오래 간직하고 싶은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시인의 말)을 되살려 도시살이와 시골살이를 오가는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이 덕분에 전통적 서정의 아름다움이라는 미덕을 지니면서도 무한경쟁의 쳇바퀴를 살아가는 지금 시대를 날카롭게 묘파해냄으로써 전 세대를 아울러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들이 풍성하게 채워질 수 있었다. 영화감독 이창동은 추천사에서 “말을 넘어 마음과 마음으로 전하는” 이 시집은 “시는 쓰거나 읽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라는 깨달음 준다”고 적었다. 사소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만은 아닌 순간들”(시인의 말)이 나에게도 꽤 많이 있음을 문득 알게 될 때 얻는 위로가 오래도록 따뜻하다.

 

시인이 채집한 마음들

아직 이 세상이 살 만하다는 증거

 

박성우의 시는 언제나 쉽고 편안하다. 시를 처음 접하는 이들도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기 마련이다. 사람살이의 온기가 흐르고 언젠가 살아본 것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특히 시인이 펼쳐놓는 선한 마음들에 마음을 빼앗긴다. 문득 그런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러한 마음이 과거 사회에 대한 향수나 지금은 사라진 따뜻한 정(情)에 대한 동경이 아닌지. 그러나 시인이 이끄는 손길을 따라가다보면 그러한 의심은 불식된다. 가령 이러한 장면들을 살펴보자. 이 시집 안에는 “혹시라도 내릴지 모를 비”를 걱정하여 “택배 상자를 방수지에 꼼꼼하게도 싸서 처마 밑에 모셔두고”(「정읍 칠보우체국 우체부 셋」) 가는 세심한 마음이 있다. 십여년 동안 일하다 그만두게 된 아파트 경비 어르신을 “한번 안아봐도 돼요?”(「방문」) 묻고 안아드리는 시인의 마음도 있다. 이는 시인이 직접 경험한 다음 시로 옮겨놓은 마음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시집 곳곳에 펼쳐진 아름다운 마음은 시인이 여기저기서 채집한 것이자, 아직 이 세상이 살 만하다는 증거들이다.

이러한 마음은 관계로 이어진다. 이 시집 안에 등장하는 다양한 관계를 살펴보는 일은 그 자체로 흐뭇하다. “잠깐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어느새 “유치원생”에서 “중학생”이 되어버린 “딸애”(「잠깐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와의 일화들을 살펴보는 일은 잔잔하게 가슴을 데운다. 늦은 밤 노모가 책 읽는 소리를 듣는 장면(「드키는 소리」)이나, “얼떨결에” 받은 연극 “초대권 두장”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바쁜 시간을 쪼개 아내와 뜻밖의 데이트를 나서는 장면(「연극」) 등을 보다보면 독자들도 어느새 나의 가족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관계는 가족 안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웃, 길 가다 스친 사람, 심지어 “먹을 걸 내놓으라” 조르는 고양이(「오후 세시」)까지 시인은 정성을 다해 마음을 나눈다. 이러한 관계가 박성우 시 특유의 자연스러운 입말과 어우러져 시 한편 한편은 마치 드라마처럼 독자들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펼쳐진다.

 

우리가 이 시집에서 마주하는 것은 “지금 이곳에 깃들어 있지만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삶의 방식, 드물지만 엄연히 실재하는 다른 삶의 가능성”(해설, 오연경)이다. 외로움, 억울함, 분노가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곁에 누군가 있다는 생각을 하기 힘들다. 『남겨두고 싶은 순간들』은 그런 아픈 등을 도닥이며 특별하지 않아도 된다고,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과 기쁨”(시인의 말)이 된다고, 그러니 주위를 둘러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박성우의 시는 시종일관 공동체를 지향한다. 그 따뜻함이 “더 나은 삶의 씨앗”(해설)이 된다.

목차

제1부

빈틈

도시락 소풍

남겨두고 싶은 순간

백련 백년

청보라

어떤 대답

안부

피아노

오후 세시

녹색어머니회

방문

어떤 예의

목소리 예술

구절초 피는 마을

관계

정읍 칠보우체국 우체부 셋

 

제2부

어떤 아침

잠깐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주말

연극

깨우고 가

살 만한가

보리나방

부안 계화도 쌀

쌀나방

여름휴가

굉장한 광장

걸어서 집으로

지갑

박콩

리본 고양이 필통

감자

은행나무 길목

 

제3부

아침의 일

아라미용실

가을, 상리천 노전암에 다녀오다

메밀꽃밭

장생포 맛집

산호자나물

산양유

초겨울 초저녁 참

말하지 않고도 많은 말을

배내골과 석남고개와 광대수염

풍선 아트

합장바우

힘을 보태 힘을

연밭 경전

질그릇 조각

 

제4부

매우 중요한 참견

입동

유년의 거울

두 김정자씨

폭설

머위

겨울밤에 오신 손님

물까치떼

바쁜 여름

단짝

백중, 소나기맹키로

행복한 답장 걱정

드키는 소리

돌미나리

 

해설|오연경

시인의 말

『남겨두고 싶은 순간들』에 담긴 박성우의 시들은 더 쉽고 편안하고 낮아졌다. 그 흔한 상징도 비유도 찾기 어렵다. 애써 새로움과 낯섦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사코 그런 것들을 피한다. 어떤 점에서 우리가 알고 있던 시에 대한 모든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한 순간을 시로 만든다. 그것은 시적인 순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시인 순간이다. 말이 아니라 마음이고, 말을 넘어 마음과 마음으로 전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로서의 시다.
그의 시를 읽으면 절로 마음이 환해지고 미소가 떠오른다. 읽다보면 누군들 시를 못 쓰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시는 쓰거나 읽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준다. 『도덕경』의 첫머리에 있는 문장을 흉내 내어 말하면, “시가시(詩可詩) 비상시(非常詩)”이다. 시라고 하는 순간 이미 시가 아니니, 내 마음이 곧 시인 것이다.
이창동 영화감독

저자의 말

사는 일 알 수 없다.

그간 나는 생각지 않던 길을 걸었다.

 

다섯시 이십분에 일어나 출근하는 생활을 했고

지방으로 가서는 이십분을 더 잘 수 있었다.

 

나를 중심에 두고 살지 않았기에 역설적으로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며 깊어져갔다.

이상하리만큼 시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커졌고

적요한 밤이 오길 기다렸다가 시를 만나곤 했다.

 

오래 간직하고 싶은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과 기쁨이 되어주었던가.

아무것도 아닌 것만은 아닌 순간들이 다시금

영화 속 빗줄기처럼 빛줄기처럼 선명하게 지나간다.

 

부디 어둠에서 빛으로 전해지기를

부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기를

 

2024년 여름

박성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