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505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

권선희  시집
출간일: 2024.06.28.
정가: 10,000원
분야: 문학,

“고비마다 절창의 음절 타고 넘었다.

죽자고 살아낸 평생이 한마리 고래였다.”

 

목숨과 목숨을 이으며 힘차게 헤엄치는 시의 몸짓

살아 숨 쉬는 물의 언어로 그려낸 속 깊은 사연들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20여년간 줄곧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생동감 넘치는 언어로 곡절하게 노래해온 권선희 시인의 시집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이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구룡포로 간다』(애지 2007), 『꽃마차는 울며 간다』(애지 2017)에 이은 세 번째 ‘구룡포’ 연작 시집이라 해도 좋을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말”(장은영, 해설)을 꼼꼼히 받아 적으며,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바다, 그리고 그 안에서의 신산한 생활을 질박하고 구성진 경상도 사투리에 해학을 곁들여 들려준다. 아득한 “인생 저편의 말들”을 갯비린내 물씬한 날것의 언어로 되살려 “우리가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이해와 우애와 연대와 사랑의 공동체가 어떤 것인지까지 일깨워주는 주술 같은 시들”(송경동, 추천사)이 뭉클한 공감을 자아낸다.

 

“둘러앉아 훌훌 불며 서로 눈빛을 떠먹습니다”

한편의 시가 된 삶, 사람, 마을

 

시집을 펼치면 바닷가 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목욕탕 구석 장판 깔린 간이침대가 일터”인 “날 때부터 굽은 등 숙여” 밥벌이하는 ‘화자씨’(「첫눈」), 살인 누명을 쓰고 “소년원부터 12년을 살다” 나온 뒤 “개명하고 항구 옮기며” 사는 ‘관수씨’(「누명」), “세상에 오는 일도 숩지는 않고 죽자고 살아내는 일도 만만찮지만 돌아가는 거는 참말로 디요” 한탄하면서도 병든 영감의 마지막 삶을 “우짜든동 내 손으로 치와드려야 도리지 싶아가 침 맞으러” 왔다는 할머니(「말년」), 이제 좀 “살 만한 시절”이 오는가 싶었는데 “부모 대신 업어 키운 동생 칼”에 맥없이 세상을 떠난 ‘만석씨’(「웃는 사람」), “죄라고는 오징어 잡아 살겠다꼬 배 탄 것뿐인데” 납북됐다가 돌아온 뒤 간첩으로 몰려 온갖 고초를 겪는 바람에 “씨뻘건 부아”가 일어 “이후로 내는 오징어 절대 안 먹니더”라는 어부(「오징어가 꼴도 보기 싫은 이유」)까지. 범속하고 다채로운 삶의 풍경이 눈앞에 또렷하게 펼쳐지며 구룡포의 매 순간이, 온갖 희로애락이 시의 형태로 보존된다.

이때 시인은 삶과 죽음, 이쪽과 저쪽을 오가며 두 세계를 매개하는 샤먼의 역할을 맡는다. 희미하고 낮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삶이 위태로운 존재들의 이야기를 시에 담아 “물고 뜯고 눈물 찍던 사연”(「서로」)의 “참 깊고 어두운 속내”(「간독」)를 풀어놓는 것이다. 개중에는 “가라앉는 삶을 떠받치며”(「물의 말」) 죽은 목숨 살려내는 말도 있고, 밥을 담보로 “죽어라 일만” 시키는 “거침없이 혹독한 말”(「평화라는 시장에서」)도 있다. “긴 사랑을 물고”서 “발긋하게 피는 말”(「해봉사 목백일홍」)에는 사랑의 온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시인은 “돌담 긋고 허물며 살아온 세월”(「문상」) 속에서 굴곡진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의 애환을 굿판을 벌이듯 하나하나 풀어놓다가 “무당보다 더한 팔자가 가엾어”(「징」) 눈물을 적시기도 한다.

 

시를 쓰는 일이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말”을 듣고 응답하는 일이라는 듯 시인은 바다를 배경으로 “물것으로 사는” 존재들의 말을 귀담아듣고 “위태롭게 살아온 날들”(「용왕밥」)을 생생하게 복원해낸다. 그리고 “목숨으로 목숨을 연명하는 것들이 목숨에 대한 예의를 저버린 채 산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 끔찍한 것”(「살자고 하는 짓이」)이라고 선언한다. 생명 경시 풍조와 인간중심주의가 만연한 오늘날의 세태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존재의 죽음에 합당한 애도와 배웅의 태도를 보여야 함을, 그것이 마땅한 도리임을 말하는 것이다.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언제나 세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인은 오늘도 어김없이 바닷바람에 실려 오는 말을 경청하며 어디선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기웃기웃 거닐며 “살아래이/살 거래이”라고 삶을 북돋는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물의 말」)을 받아 적으면서 마을 골목골목에 걸려 있는 “고만고만한 살림”과 “고만고만한 사연들”(「문상」)을 소담한 시로 기록해나갈 것이다. ‘바닷가 부족이 달아준 입으로 노래’(시인의 말)하는 그의 시가 우리의 마음속에 오래오래 남아 자맥질하는 이유다.

목차

제1부

못 할 짓

첫눈

흥 횟집

죽변 효자

꽃도둑질

김종구씨 가족 김종팔입니다

서로

자개농

누명

협화음

삼식이는 함부로 꺼지지 않는다

깔때기국수

문상

위험 구간

 

제2부

어떤 환갑

기다렸다는 듯

배웅의 자세

해수탕 승천

말년

당굿 무렵

건들바람

보고 자파 죽겄소

크리스마스이브들

박봉순 집사의 명약

택배

빈정거리는 자본

살자고 하는 짓이

평화라는 시장에서

밑줄

 

제3부

뜨끔

개 아들 면회 가기

정남씨 연대기

단호한 경고

점령의 수법

매미

플라타너스

웃는 사람

똘마니들

러브버그

만두

나의 첫 해녀, 박옥기

청춘 수장고

사과나무에게

 

제4부

겹벚꽃

샤먼을 기다리는 시간

오래된 신방

개 같은 아저씨

물의 말

간독

오징어가 꼴도 보기 싫은 이유

해봉사 목백일홍

고래잡이는 고래로 돌아가고

용왕밥

무당의 붉은 입술

저 비가 몰고 오는 것들

2월

구룡포, 내 영혼의 마킹 로드

 

해설|장은영

시인의 말

 

한국시의 너른 마당 하나가 여기 활짝 열려 있다. 신경림의 「파장」도 보이고, 김종삼의 「장편(掌篇)」도 보인다. 백석의 「여우난골족」도 보이고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도 보인다. 큰댁도 작은댁도 등 굽은 화자도 모두 모여 서로의 눈빛을 떠먹고 꽃모종을 나누며 제각각 대체할 길 없는 생의 말을 앞다투어 펼쳐놓는 진기한 마당. 낮아서 한없이 귀한 이들이 온몸으로 써 내려간 “씨가 된 말”, “발긋하게 피는 말”, “붉은 염불”을 외는 ‘고요’까지가 꽉 들어찬 시의 성찬. “텃밭에 피어나는 실파의 맑은 얼굴”과 “뒤란 조릿대 소복한 아우성”과 “눈이 녹는 들판”에 피는 한 무리 ‘까마귀 꽃’을 듣고 볼 수 있는 그가 전해주는 인생 저편의 말들이 아득하다. 우리가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이해와 우애와 연대와 사랑의 공동체가 어떤 것인지까지 일깨워주는 주술 같은 시들. 다가가기 힘든 깊은 생의 내면까지 이르러 진정한 의미의 샤먼이 되어버린 그의 시에서 빠져나오기가 정말 ‘숩지 않다’.
송경동 시인

저자의 말

 

바닷가 부족이 입을 달아주었다.

그 입으로 노래했다.

 

나이거나 너였던 풍파를 타며 살다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것에서 저것으로 건너가는 순정한 음절들

어쩔 수 없다.

 

사랑하고 말았다고

쓴다. 이제야.

 

2024년 6월

그래島에서

권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