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깨어났다, 아이들아
환희를 뿜으렴”
슬픔이 지나가고 새롭게 생명이 움트는 자리를 응시하는 사랑
땅의 시인 정우영이 전하는 살아 있음의 가치
올해로 등단 35년을 맞은 정우영 시인의 신작 시집 『순한 먼지들의 책방』이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전편이 죽음의 의미를 묻는 독특한 시집”(강형철)으로 주목받았던 『활에 기대다』(반걸음 2018) 이후 6년 만에 펴내는 다섯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삶과 죽음, 필연과 우연, 있음과 없음, 세계 안과 세계 밖 같은 궁극의 문제들”(소종민, 해설)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사색의 세계를 펼친다. 삶의 정경을 바라보는 선한 마음과 애틋한 눈길, 뭇 존재에 대한 깊은 연민이 서린 맑고 투명한 시편들이 아름다운 잔상을 남긴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사회의 빠른 속도에 역행하는 듯 느리고 편안한 자신만의 언어로 “저마다 서로 다른 인생의 굴곡과 사연들”(해설)을 펼쳐내는 솜씨와 그 서정적 깊이가 놀라움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시는 삶’이라는 믿음을 견지하며 시와 삶과 세상을 받드는 시인의 겸손한 마음과 성실한 태도가 신뢰를 준다.
“그 자체로 사랑이면서
사랑을 베풀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가쁜 숨결들”
그리운 마음으로 불러보는 아름다웠던 영혼들의 이름
정우영의 시는 시인의 성정만큼이나 차분하고 평온하다. 눈과 귀가 순해지는 듯하고, “누군가 목덜미를 가만가만 쓰다듬어주는”(「누군가 목덜미를 쓰다듬어주는 것처럼」) 듯한 따듯한 위무의 손길이 느껴진다. “몸에 밴 그리움”(「소라국시」)의 정서가 물씬 풍기면서 ‘바작, 장꽝, 독바우, 판소묏등, 살구낭구, 당산골, 정짓간, 부석짝, 허청, 시암터, 똥간, 하나씨’ 등 삶의 내력이 깃든 질박한 언어는 아늑한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굴곡진 삶의 애잔한 풍경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과 귀는 언제나 낮고 작은 것들에게 열려 있고, 몸과 마음은 작고 여린 것들에게로 기울어 있다. 시집을 펼쳐 들고 “후미지고 할퀴인 곳 어디든” 불을 지피면 “여린 종족들”이 몰려와 “세상 나른한 표정”(「유성으로 떠서」)으로 불을 쬐는 진경이 펼쳐진다. 그의 시는 생명의 거처이자 영혼의 안식처이다. 시인은 아득한 기억을 더듬어가며 삶의 본향인 자연으로의 회귀를 꿈꾼다.
그렇다 하여 “연신 온몸을 달달부들 떨어대며 불편한 내 몸의 안위나 빌고”(「서산 마애삼존불」), “살구꽃 그늘 고이는 토방 마루에 앉아 꽃 타령이나”(「징후들」) 하려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국가 폭력에 무참히 희생된 채 “무관심에 밟히고 바스러져 밀려나는 백골들”(「노랑나비 한마리」)과 “총보다 무섭다는 빨갱이라는 손가락질, 그 철벽” 같은 이념 갈등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맥없이 스러져간 안타까운 영혼들의 넋을 기리며 왜곡된 역사의 진실과 아픔을 되새겨본다. 나아가 자본의 탐욕으로 인한 기후위기와 사막에 폭설이 쏟아지는 전 지구적 재앙, “소와 돼지 수백만마리가 산 채로 땅속에 묻”히고 “닭과 오리 수천만마리도 땅 밑으로 끌려 들어”(「너머의 세계」)가는 생명 파괴의 참혹한 현장을 직시하며 살아 있는 것들의 목숨이 위태로운 비극적 현실을 잊지 않는다.
시린 세상 구석구석을 은은하게 데우는 선한 마음의 온기
시인은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 실감 속에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겸허하게 짚어본다. “환영(歡迎)과 환영(幻影) 사이 갈림길”(「이순의 저녁」)에서 고뇌하는 시인의 “눈은 서걱거리고 귀는 쎄하게 앓는다”. 시인은 이것이 단지 나이가 들고 몸이 늙어서가 아니라 “못 들은 체 외면한 사정들”을 “잊지 않”고 “받아 적”(「징후들」)으라는 뜻이었음을 깨닫는다. 나아가 죽음은 생명의 소멸이 아니라 생이 또다른 국면에 접어드는 것이고 “우주도 본래 먼지로부터 팽창하고 있다”(「순한 먼지들의 책방」)는 이치에 도달하며 위기의 세계에서 함께 살아온 이들의 생애를 따스하게 보듬는다. 그렇게 “슬픔이 밀어 올린/새잎들로 부산스러운 아침”(「연두」)을 맞이하며 자연의 섭리와 생명의 질서에 순응하는 삶을 그려낸다.
1989년 『민중시』를 통해 문단에 나온 이후 “바람결조차 불안하던 팔십년대”(「찬 공기 세워두고」)와 격동과 혼돈의 ‘구십년대’를 건너오는 동안 문예운동의 중심에 서서 성심을 다하여 헌신해온 시인은 민중문학과 노동문학 계열의 시인으로 불린다. 그러나 일찍이 도종환 시인이 “대지의 생명력으로 일어서는 식물성의 시인”(『집이 떠나갔다』, 창비 2005, 추천사)이라 명명했듯이 시인은 민중이나 노동에 앞서 자연의 숭고함과 생명의 환희를 노래하는 천생의 서정 시인이다. 이러한 칭호가 적격임을 입증하듯 이번 시집은 마침내 그의 시가 어느새 하나의 전환점을 지나 “태초의 품속”(「누군가 목덜미를 쓰다듬어주는 것처럼」) 같은 자연의 집, 생명의 집에 깃들어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자연의 찬란한 햅쌀들”로 “맛나고 다디단” ‘햇살밥’ 한솥 푸지게 지어놓고는 혼자 먹기 아까워 토방 마루에 두레밥상 차려놓고 “냥이야 제비야 집 나간 모란아”(「햇살밥」) 부르는 소리가 정겹고 생기롭다. 저 밥 식기 전에 서둘러 ‘순한 먼지들의 책방’에 들러보시길. 거기서 “어떤 견고한 고통도 먼지가 될 때까지 돌보겠다는 맹세/그 영원하고 순한 사랑을 믿는”(진은영, 추천사) 시인이 당신을 반겨 맞이할 것이다.
제1부
햇살밥
입동
이순의 저녁
하굣길
유성으로 떠서
하얀 저고리
늙은 감나무의 새끼발가락
뻐꾸기시계
순한 먼지들의 책방
꽃잎 풍장
징후들
누군가 목덜미를 쓰다듬어주는 것처럼
귀성객
망초꽃만 환해요
제2부
너머의 세계
동백이 쿵,
바람의 계단
고요야 까마귀야
훨훨
개운죽 제금나다
바람이 궁뎅일 쳐들고
기억 한짝이 사라졌어
불안을 입에 물고
무탈한 하루
불쌍한 파동들
마른멸치가 사나워질 때
천하무적
정릉천
제3부
큰평전
서산 마애삼존불
산죽 다비식
연두
추석빔
일몰
소라국시
당산골
여기가 온통 네 집이다
찬 공기 세워두고
작은고모
하나씨
노랑나비 한마리
동지
제4부
물의 정령
돌배나무
자울자울
우리는 날마다
흐르는 별들이 내리는 곳
끝집
자귀나무 꽃그늘
지구의 한때가 충분히 사랑스러웠다
오래 묵은 그냥
어린 기일(忌日)
기침도 없이
나뭇잎 보자기들
흉내쟁이 인간들
저기에 내 사람이 있다
자정을 독파하다
해설|소종민
시인의 말
내가 나를 채워야 했을 때
선선히 자신을 비우고 덜어
내게 내어주신 분들.
종철이라는 이름의 선생님들.
김종철 선생님과 박종철 선생님의
도타움 속에서
이만큼이나마 영글었다.
나는 누구와 나눌까.
이 위태로운 지구에서.
2024년 2월
정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