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그토록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어했을까.”
반짝이는 순간을 세심히 포착하는 작가 이주란이 그리는 ‘해피 엔드’
마음이 슬픔으로 끝나지 않도록 상처의 시간을 안아주는 따스한 소설
사소한 하루하루가 모여 흘러가는 삶의 순간을 포착하여 특유의 귀엽고 능청스러운 입담으로 풀어낸 작품들로 김준성문학상, 젊은작가상 등을 잇달아 수상하며 독자와 평단의 사랑을 두루 받고 있는 작가 이주란의 신작 소설 『해피 엔드』가 출간되었다. 창비의 젊은 경장편 시리즈 소설Q의 열여덟번째 작품이다.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친한 친구와 다투고 끝내 멀어지게 된 주인공이 다시 그 친구를 찾아나서는 데서 시작하는 이 작품은, 누구나 한번쯤 마주했을 상실에 대해 세밀하게 그려나가며 그 상실 속에서 조금 허물어지기도 했을 마음을 다정하게 보듬는다.
“이미 실패했거나 앞으로도 완전히 실패하게 될지도 모를 관계를 마주하러 가는 첫발”을 따라가며 소설을 읽다보면 삶에서 무수히 맞닥뜨렸던 이별과 그럼에도 어느 순간 괜찮아졌던 마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타인에게서 받은 위로까지도 떠올릴 수 있다. 삶의 고비마다의 엔딩이 어떤 것일지 끝내 저 자신만큼은 알 수 없을지라도, “마음이 슬픔으로 끝나지 않도록 서로의 슬픔에 서로를 끼워 넣으며”(우다영 추천사) 오늘도 계속해서 만들어가는 ‘해피 엔드’는 따스하고 단단한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상처의 순간들을 담담히 돌아보며
‘해피 엔드’를 찾아 떠나는 여행
‘기주’는 한때 각별했지만 지금은 멀어진 친구 ‘원경’에게서 문득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느냐는 연락을 받게 된다. 원경과의 다툼이 있고 2년 6개월 만에 온 연락이었다. 과거 원경은 결핍이나 부족해서 감추고 싶은 마음까지도 공유할 수 있는 친구였고, 그런 원경이 삶에서 빠져나갔다는 것이 기주에게는 오랜 시간 괴로운 일이었다. 원경과의 만남부터 시작해 다투던 순간 그리고 그 다툼의 현장에서 자신을 지켜보던 사람들까지도 곰곰 떠올려보던 기주는 원경을 만나러 갈 결심을 하게 된다.
원경은 기주가 사는 곳으로부터 꽤 먼 곳에서 까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애인인 ‘상우’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없는 기주의 여행에 동행하는 이는 뜻밖에도 회사 동료인 ‘장과장’이다. 회사에서도 곤란할 때면 침묵하는 습관이 있는 기주에게 장과장은, 말수가 적은 기주와 말이 통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기주가 늘 궁금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이다. 여름옷을 모두 빨아 푹푹 찌는 날씨에도 기모바지를 입고 출근하기도 하지만 회사 공장에서 머무는 강아지 ‘가니’를 누구보다 성실히 돌보기도 하는 장과장에게, 기주는 “가는 길은 두렵고 돌아오는 길은 외로울 것 같아서” 동행을 부탁하게 된다. 중소기업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장과장은 기주와의 여행 역시 브이로그에 담아도 되겠느냐고 묻고, 이를 기주가 승낙하면서 둘의 짧은 여행이 시작된다. 둘은 장과장의 조부모 집에 들르기도 하고 음식점에서 우연히 장과장의 채널 구독자들을 만나기도 하며 원경의 까페에 다다른다. 막상 도착한 그곳에서 가장 처음 마주한 사람은 원경이 아닌 원경의 어머니였고, 기주는 그녀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된다.
“인생이란 그렇던데.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가 없던데.”
가장 가까웠지만 가장 큰 상처를 준 원경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끝내는 원경을 찾아 나선 기주이지만, 사실 『해피 엔드』에는 기주와 가까운 곳에 머물며 기주에게 크고 작은 위로를 건넨 사람들이 다수 등장한다. 그들은 과거와 현재 곳곳에 서서 조금쯤 차가워진 기주의 마음을 미지근한 온도로 돌려놓곤 한다. 어깨를 기댈 수 있는 연인 상우, 품삯으로 못생긴 과일이나 달라고 하는 기주 어머니에게 기주는 예쁜 것을 먹어야 한다며 좋은 과일을 내놓는 황선아 아주머니, 여름휴가 기간에도 동네에 머무는 기주를 보고 휴가는 가지 않느냐고 묻는 편의점 사장님, 시끄러운 단체 손님들에게 떠밀려 가게를 나서게 된 기주에게 사이다를 서비스로 주며 미안해하던 전집 직원, 기주에게 향한 아버지의 폭력에 분노를 표하던 옆집 남자, 네 삶을 살라며 자신을 책임지지 말라고 해주었던 어머니 그리고 여행을 마치며 자기가 같이 오길 잘했느냐고 묻는 장과장까지.
기주의 일상을 따라가다보면 문득 기주가 삶에서 마주하는 장면들이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가까운 이웃들이 나눠주는 소소한 마음, 전혀 모르는 이로부터 받은 친절 그리고 드물게 받곤 하는 타인으로부터의 아주 큰 위로가 우리의 삶에도 분명 존재한다. 이주란은 이렇듯 스쳐 지나가기 쉬운 삶의 장면들을 붙잡아두고 그 위에 조심스레 돋보기를 올려 세밀하게 관찰한다. 새들의 마음까지도 걱정하는 시선으로, 이웃에게 얻어먹은 수프 그릇을 잘 씻어둔 장면을 따스하게 그려내는 마음으로. 그렇기에 이주란 소설 속 인물들이 건네는, 그들 스스로는 아주 작은 것이라고 생각한 마음들이 기주를 거쳐 우리에게 닿을 때는 그 온도가 몇배는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미지근하게 기주의 마음을 덥혔던 그 마음들이 따스함으로 번져, 이 소설의 결말을 마주할 무렵에는 자연스레 지금 이 이야기를 손에 쥔 우리가 마주한 것이 곧 ‘해피 엔드’라고 떠올릴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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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대화는 나에게 사건이 된 것 같아.
그날로부터 난 언제쯤 자유로워질까.
그날 밤 그 사람이 내게 말했다.
빼앗기는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러나 스스로 잃어버렸다는 걸 어제 알게 되었어.
자유 뒤의 책임이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것도.
나는 그 사람이 언제 자유로워질지 알 수 없는 채로
그러나 자유로워질 거라고 믿고 있다.
2023년 가을
이주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