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길을 잃기도, 또 다른 길을 찾기도 하는 우리
소설가 구병모가 펼쳐 보이는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장르를 넘나드는 상상력으로 다양한 가능성의 세계를 펼쳐 온 소설가 구병모가 이번에는 ‘이야기의 세계’를 다시 쓴다. ‘소설의 첫 만남’ 시리즈 스물여덟 번째 권으로 출간된 『이야기 따위 없어져 버려라』는 모든 책의 이야기가 ‘콘텐츠 데이터’가 되어 디지털화된 세상을 그린다. 데이터에서 도망쳐 나온 ‘잉게’와 그를 포획하기 위해 파견된 ‘사서 Q’의 만남이 뜻밖의 결말로 향하며 이야기란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로 이끈다. 모노톤의 황폐화된 도시와 그 안을 헤매는 채색된 인물들의 모습을 대비시킨 일러스트레이터 ZQ의 그림은 이야기를 둘러싼 서로 다른 두 세계의 마주침에 대한 다층적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책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 이야기의 의미와 미래가 궁금한 이들에게 함께 고민해 나가길 요청하며 자신 있게 권하는 특별한 소설이다.
이야기가 사라진 세계
방황하는 인물들과 그들을 찾아 나선 사서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은 지 오래된 어느 미래. 두꺼운 장정과 부피를 가진 책은 사라지고 이야기들은 다음에 생산될 콘텐츠를 위하여 전산화되어 보관된다. 하지만 어느 날 해커의 공격으로 데이터가 훼손되고,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이 실제로 도시를 배회하게 된다. 책이 모두 사라진 ‘새로운 시대의 도서관’에서 사서의 일은 그런 이들을 잡으러 다니는 것이다. 사서 Q에게 새로운 포획 대상자로 ‘잉게’가 배정되고, Q는 잉게를 ‘수거’하러 떠난다.
한편 모처럼 주인아주머니에게 휴가를 받아 집으로 향하던 잉게는 숲속에서 길을 잃고 자신이 낯선 회색빛 땅을 헤매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 도시는 자신이 살던 세상과는 너무도 다르다. 잉게는 며칠 동안 아무도 만나지 못하다가 갑자기 사람을 마주치고 놀라서 정신을 잃고 마는데…….
“그건 내가 아니에요.”
누군가가 정해 준 삶이 아닌,
진짜 나의 삶을 위해
Q는 정신을 차린 잉게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잉게는 동화 「빵을 밟은 소녀」의 주인공이며, 자신의 임무는 잉게를 회수하여 데이터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이라고, 그 동화 속에서 잉게는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로 지옥에 떨어지게 될 운명이라고. 하지만 잉게는 억울하기만 하다. Q가 잉게가 지은 죄라며 들려준 일들은 하나같이 사실과 다르거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저씨 말을 듣고 얌전히 책 속으로 돌아가 책의 일부가 되어서, 내가 원한 적도 없는 그런 일들을 저지르고, 지옥에 가야 해요?”(본문 64면)
옆에 있던 사서 D 역시 잉게의 사연과 이야기의 내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길이 명확히 정해진 이야기, “그리로만 가라고 아이들의 등을 떠미는 것 같은 이야기”(65면)가 요즘 세상에도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싶은 것이다. 잉게의 말을 듣고 고심하던 Q는 사서로서 해서는 안 되는 결정을 내리기로 한다. Q의 선택은 무엇이고 잉게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넘쳐나는 데이터 속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믿어야 할까
영화, 드라마, 웹툰 등 다양한 콘텐츠를 접하기 쉬워진 시대에 ‘이야기’란 무엇이고, 앞으로 어떤 모습을 하게 될까? “모호함 없이 이야기가 분명하게 전달되게 하기. 목적지까지 고속 도로를 뚫어 놓은 것처럼. 그리하여 빠른 속도로 수익을 내기.”(28면) 이러한 효용이 더욱 중요해지면서 점차 책을 찾는 이는 줄어들고 정성을 들인 꾸밈과 외피도 사라져 간다. 『이야기 따위 없어져 버려라』에 등장한 새로운 시대의 도서관은 이러한 경향을 극대화하여 책이 없어지고 정보로 치환될 수 있는 이야기들만 남은 세계를 그린다.
한편 달라진 시대적 가치로 인해 옛이야기가 전하는 교훈은 새로운 해석 앞에 놓인다. 소설가 구병모는 안데르센 동화 「빵을 밟은 소녀」의 다시 쓰기이기도 한 이 작품을 통해 주인공 잉게를 주체적으로 재해석할 뿐 아니라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로서 다면적인 감상으로 이끈다. 이야기란 무엇인지 다채로운 상상력과 질문에 깊이 빠져 볼 시간이다.
이건 이야기란다. 네가 믿지 못할 이야기.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있느냐고, 너라면 웃고 넘어갈 이야기. 그래서 애초에 없었던 것이 되고 마는 이야기. (본문 7면)
이야기 따위 없어져 버려라
작가의 말
기연미연 속에서 언제까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