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 11페이지

김륭  동시집  ,  송미경  그림
출간일: 2023.08.11.
정가: 12,000원
분야: 어린이, 문학

“쉿! 어른들은 모를 거야.”

고루한 언어에 맞서는 발칙한 상상력

동시와 시, 평론을 넘나들며 작품 세계를 확장해 온 김륭 시인의 동시집 『햇볕 11페이지』가 출간되었다. 오래도록 개성 있고 도전적인 시를 선보였던 시인의 시선은 부지런히 동심을 받아 적는 사이 더욱 웅숭깊어졌다.

 

길에서 태어난 길고양이 씨는 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집에서 태어난 집고양이 씨는 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길고양이 씨와 집고양이 씨는 공원 벤치에 앉아/햇볕을 쬐기 시작했다. 둘은 저마다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집과/마음 편히 다닐 수 있는 길이 급하다고 생각했지만/이내 가르릉 가르릉 졸기 시작했다.//산책 나온 개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꿈속으로 이사하고 있었다.//이건 학원 가기 싫은 내가/샛길로 빠져 슬그머니 펼쳐 보는/햇볕 11페이지._「햇볕 11페이지」 전문

 

『햇볕 11페이지』엔 골똘히 생각에 잠긴 아이들이 등장한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 몰래 딴생각에 열중하기도 하고(「아기 펭귄들이 책을 읽다가」), 학원 가는 길에 슬그머니 샛길로 빠져 몽글몽글한 상상에 푹 빠지기도 한다(「햇볕 11페이지」). 무슨 꿍꿍이인 걸까?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또 뭘 하냐고”(「내가 나에게 미안한 저녁」), 딴짓하지 말고 집중하라고 한 소리 하는 어른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은 시집에 사는 아이들의 몽상을 사려 깊게 받아 적는다. 정해진 답을 찾는 대신 미지의 땅에 발을 내딛는 어린이를 응원하며,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벽이라도 “어딘가에 문이 숨겨져 있을지/모른다”고 귀띔한다(「마법이 필요하면 봐 봐」). “어른들은 믿지 않거나 우습게 넘길 (…) 이야기들도 현실처럼 누리는”(송미경, 해설 「천사에게 빌린 시집」) 동시의 세계 안에서, 독자들은 자유로운 상상의 날개를 얻게 될 것이다.

 

 

비처럼 다정하게, 햇볕처럼 장난스럽게

내가 나를 안아 주는 법

시인은 “신나게 노는 한 무리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저 혼자 멀리 떨어져 앉은 아이”의 마음에도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낸다(「시인의 말」). 그리고 그의 마음에 골몰한다. 이때 마음이란 결코 보이지 않거나 만질 수 없는 게 아니다. 외로운 아이는 자신의 품을 파고드는 따뜻한 ‘댕댕이’ 모양으로 마음을 빚고(「댕댕이를 만드는 중이에요」), “입 속에 들어 따뜻해진 숟가락처럼” 포근한 달이 된 마음을 하늘에 띄워 올리기도 한다(「낮달」). 귀여운 옆집 강아지에게 “도둑맞은 마음이야/다시 만들면 되니까” 괜찮다고 자신만만해하기도 한다(「귀여운 도둑」).

 

가끔씩 마음이라는 녀석과 단둘이/있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그러나 놀아 주는 방법을 몰라서/맹숭맹숭합니다.//(…)//그래서 오늘은 이 녀석과 동맹을 맺을/방법을 찾는 중이에요./나는 녀석에게 목줄을 채우는 대신 가만히/이불을 당겨 덮어 줍니다.//(…)//아직도 잘 모르겠어요?/오늘의 내 마음이 천사에게 빌린/개라는 말이에요._「마음 동화—우리도 쓸쓸할 때가 있다는 말이에요」 부분

 

하지만 마음과 “단둘이” 있는 일이 늘 쉬운 것은 아니다. 어린이 역시 마음과 “놀아 주는 방법을 몰라” 당황하고는 한다. 시인은 그러한 방황을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나 ‘어른이 되는 과정’으로 요약하는 대신, 어린이가 미움과 슬픔, 분노와 쓸쓸함처럼 마음의 “그림자가 하는 말”은 “아슬아슬”한 채로 내버려 두고(「그림자 일기」), “가만히 이불을 당겨 덮어” 주도록 한다.

 

내가 미워지지만 미워하지 않아요.//미운 사람이 될 필요는 없으니까요._「금요일 소녀」 부분

 

자신의 마음을 소중히 가꾸는 사이, 어린이는 “무럭무럭 자라는 중”이다(「화가 잔뜩 나 집을 뛰쳐나온 어느 날」). 어린이의 마음에 드리우는 그늘까지 모두 끌어안으려는 시인의 관점이 든든하고 미덥다.

 

 

타인을 향한 진심을 배우며

더 단단하고 동그랗게 자라는 시간

『햇볕 11페이지』의 어린이들은 거울처럼 마주한 어른의 모습에서 그들의 감정을 투명하게 읽어 낸다.

 

슬플 때면 청소를 한다. 엄마는/대충하는 게 아니라 대청소를 한다./그것도 모자라 씻어 놓은 그릇을 다시 꺼내/뽀득뽀득 설거지를 한다./입을 꾹 다문 엄마의 얼굴은 단단하고/뭔가 복잡하고 나를 비춰 보기엔/너무 깊다.//그런 엄마를 나는 눈치껏 살핀다._「엄마의 춤」 부분

 

시집 속엔 자신보다 “더 외로워 보이는 아빠”를 위해 내색 않고 가만히 그의 외로움에 공명하는 아이가 있고(「가만히 외롭고」), 생전에 할머니가 좋아하던 음식들을 마트 한편에서 마주친 엄마를 지켜보며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귀신은/꼭 있어야겠다고” 속 깊은 다짐을 하는 아이가 있다(「귀신 빅 세일」). 어린이는 자라는 동안 ‘나’와 주변의 다채로운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햇볕 11페이지』를 읽으며, 어린이 독자가 그 빛나는 시간을 기쁘게 기록할 수 있기를 바란다.

 

원은 부분을 떼어 내는 순간 그 형태의 본질이 사라진다. 완전해 보이는 형태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조심스럽고 까다로운 마음을 닮았다. 시인의 시들을 통해 우리는 기쁨만큼 슬픔도, 웃음만큼 눈물도 굴리고 품는 어린이를 만난다. 매일 그 동그라미들은 더 단단하고 동그래질 것이다._해설 「천사에게 빌린 시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