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487

휴일에 하는 용서

여세실  시집
출간일: 2023.03.20.
정가: 11,000원
분야: 문학,
전자책: 있음

“슬픔 밖의 끝장. 가뿐합니다.

여기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쫀득하고 고소한 미래를 향한 가뿐한 첫걸음

청량함과 뜨거움이 공존하는 사랑과 용기의 시

 

“신뢰를 주는 시” “오랜 훈련을 거친 사람의 내공이 단연 돋보인다”는 찬사와 함께 등단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여세실 시인의 첫 시집 『휴일에 하는 용서』가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꾸준히 시적 기량을 다져온 시인은 미래의 시단을 빛낼 기대주로서 남다른 주목을 받아왔으며, 최근에는 선배 문인이 후배 문인을 추천하는 ‘내가 기대하는 작가’에 호명되며 그 입지를 단단히 했다(『현대문학』 2023년 1월호, 안희연 시인 추천). 여세실은 예리한 언어와 독특한 발성으로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피어나는 용기와 사랑을 그려내며 ‘살아 있음’ 그 자체의 찬란함을 빚어낸다. 삶의 순간마다 목도할 수밖에 없는 뜨거운 감정들을 여러 결로 변주해내며 누구나 깊이 공감할 수 있지만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하고 아름다운 시 세계를 펼친다.

 

물결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가는

잘 길러진 슬픔

 

여세실의 시는 ‘젊은 시’의 새로운 흐름과 미래를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다. 또래 시인과는 차별화된 감각, 자유로운 여백, 행과 연의 거침없는 도약, 독백과 대화를 넘나드는 화법 등 독창적인 작법에서 빚어지는 그만의 형식이 매혹적이다. 특히 유려한 호흡으로 문장을 끌고 나가는 힘과 시적 사유의 깊이가 도드라지는 문장들이 곳곳에서 선명한 빛을 발한다. “체벌과 사랑은 같은 보호색을 띠고 있었다”(「사이와 사실」), “분갈이를 할 때는/사랑할 때와 마찬가지로 힘을 빼야 한다”(「이제와 미래」), “눈은 내리고 오래지 않아 더러워 보였다 나는 거기까지를 눈이라고 불렀다”(「후숙」) 같은 문장에서는 삶의 이면과 사물의 내면을 바라보는 시인의 섬세하고 예민한 시선에 감탄을 자아내게 된다. 나아가 여세실은 ‘나’와 ‘너’가 “하나가 울면 다른 하나가 따라”(「공통감각」) 울고 그렇기에 ‘우리’로 존재할 수 있는 ‘지금-여기’의 감각에 집중하며, “저것 위에서 이것을 가지고 그것을 만들어”(「꼬리 중심」)낼 때에야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는 삶의 진리를 아름답게 풀어낸다.

 

살아 있기에 마주할 수밖에 없는, 하여 한때는 가눌 수 없이 크게 다가올 고통과 슬픔의 나날 앞에 시인은 담담히 사랑과 영원의 시를 써내려가며 삶을 위로한다. “어떤 거룩한 신도 내 심장을 빠갤 수 없”(「당도」)다고 단호히 말하면서 “내가 알고 싶은 미래” 그러나 “내가 알 수 없는 미래”(「묘미」)를 기약하기 위해 진실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그것이 비록 “사랑이 나를 때리듯 내가 나를 때리는 나날들”을 끌어안는 “일그러진 최선”(「생시와 날일」)이라 할지라도. 그리하여 시인은 “어제 먹은 밥을 오늘도 지어 먹”는 생활 속에서 “배불리 슬퍼하고 게을리 원망”(「완주」)하는 일을 계속해나간다. “혼자 벌을 내리고 혼자 벌을 받는”(「개별」) 용서의 시간과 “혼자 울고 혼자 그치는”(「물색」) 슬픔의 날들을 참고 견디다보면 “나는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태어난 것 같”(「공통감각」)다는 생각에 이르기도 한다. “시든 가지에도 물을 주면 잎새가 돋”(「이제와 미래」)는다는 희망을 품고서 “말하지 않는 것들을 보살피며/무성한 기쁨을 키워”내며 지금 “이후의 일을 밀고 나갈 것”(「다음의 일」)이라 다짐하는 시인의 언어는 단단한 용기가 되어 다가온다.

 

“내가 나를 때리는”(「휴일에 하는 용서」) 비참과 절망 뒤에 오는 슬픔과 아픔을 기꺼이 감당하면서 조용하고 차분하게 ‘이후의 삶’을 이어가려 하는 시인의 태도에서 이 시집의 아름다움이 한층 배가된다. “하루에 한가지씩 선행을 하기로”(「묘미」) 마음먹고서 “꽃이 지는 모양으로/사랑이 오기를”(「덤」) 기다리며 “여자인 채로 여자를 넓히고 여자를 부수고 여자를 밀고 나가 그 이후의 이후에도”(「빗댈 수 없는 마음」) 끊임없이 삶의 갈피마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정결한 마음의 언어를 가다듬어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를 써나갈 시인의 앞날이 자못 기대된다. “이전에 없던 실패와 계속되어왔던 물음을 이어가”며 시인은 말한다. “실패를 저미고”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빗댈 수 없는 마음」). “현실의 덮개 아래 놓인 삶의 비밀 혹은 진실까지 들여다볼 줄 아는 능력이 있다”(안희연)는 기대에 부응하듯 ‘후숙(後熟)’의 시간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시 세계의 지평을 넓혀나갈 이 시인이 “이제 당신에게로 건너”(김행숙, 추천사)간다.

목차

제1부 • 제자리의 제자리를 흔들면서

온통

이제와 미래

후숙

서식

패각

가속

당도

출항

물색

생활

다음의 일

면역

작당

 

제2부 • 미래는 쫀득해 미래는 고소해

바통 터치

묘미

사근진

별미

갓파의 물그릇에 물이 마르면

채집

여름이 좋은 게 아니라

끝났다고 생각할 때 시작되는

오늘은 다른 길로 가보자

줄다리기

외야

꿈에 그리던

부정할 수 없는 여름

 

제3부 • 모르며 사랑하기

붉은 거인

틀린 그림 찾기

정글짐

꼬리 중심

기립

요주의

사이와 사실

개별

빗댈 수 없는 마음

 

제4부 • 배불리 슬퍼하고 게을리 원망하기를

빗댈 수 없는 마음

사탕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날에도

휴일에 하는 용서

먹이

반려동공조각

초록 벌

녹취

spoonring

실패 놀이

폭설

경유

일조량

공통감각

완주

 

제5부 • 크게 울고 크게 웃게 해주세요

생시와 날일

 

해설|홍성희

시인의 말

두개의 손이 있다. 내 마음 저 깊은 심연을 “거꾸로 뒤집어 흔드는 손”(「서식」). 그리고 밤의 심장에 자장가의 리듬을 얹었다 떼고 얹었다 떼기를 하염없이 반복하는 손. 서로 다른 영혼에서 나온 것 같은 이 두개의 손이 협력하여 파도처럼 쓰고, 쓰고, 쓰는 글이 여기 있다. 이 두개의 손으로 내가 나를 밀어내고 내가 나를 끌어안는 존재의 해변에서 눈송이처럼 써내려가는 글. 이 두개의 손으로 “여자를 넓히고 여자를 부수고 여자를 밀고 나가 그 이후의 이후에”(「빗댈 수 없는 마음」) 쓰는 글.
이제 우리는 ‘그 이후에서 이후까지’를 ‘후숙(後熟)’의 시간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후숙의 시간을 시의 시간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어느 날 한 여자아이가 신의 과수원에서 떨어진 열매 하나를 줍게 된다. 그 아이는 과실을 바로 먹지 않고 책상 위에 물음표처럼 올려놓고 그 이후의 시간을 두개의 손으로 살피고 돌보았다. 그렇게 시인이 되었다. 그가 “여기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빗댈 수 없는 마음」) 선언하였으니, 이제 당신에게로 건너가려 하는 것이다.
김행숙 시인

저자의 말

가뿐하게

영원이라는 말을 지울 수 있었다

 

무탈하고 평온하여서

힘껏

절망할 수 있기를

 

현명하고 어진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치지 않고 솟아나는

슬픔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2023년 3월

여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