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진심을 들키고 싶었다”
슬픔의 그릇에 잠긴 사람, 눈물처럼 차오르는 사랑
삶을 사색하며 아픔을 위로하는 사려 깊은 시편들
“이 시를 통해 내일 우리의 삶은 분명 사랑과 희망을 얻을 수 있을 것”(2017 조선일보 신춘문예 심사평)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데뷔한 이후 단정한 언어로 감각적인 시세계를 축조해온 유수연의 첫 시집 『기분은 노크하지 않는다』가 출간되었다. 섬세하고 정련된 시어로 삶의 고통과 슬픔을 보듬으며, 깊이 있는 사유와 성찰로 부조리한 세상의 진실을 추구하는 시인의 면모가 가득 담겼다. 세계의 폭력과 감정의 이면을 인식하는 너른 시야를 통해 시인의 묵직한 통찰이 생동감 넘치게 다가오며, “사람으로서 자유로이 살아가고자 하는 필사적인 마음의 움직임”(조대한, 해설)이 오롯이 담긴 시편들이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시대적 삶의 투시력”(심사평)이 돋보인다는 호평을 받았던 등단작 「애인」을 포함하여 48편의 시를 각 부에 12편씩 4부로 나누어 실었다.
유수연의 시에는 “일상의 틀 안에 슬픔을 가둔 채” 살아가는 “사람의 슬픔”(해설)과 사랑의 아픔에 대한 고뇌의 흔적이 역력하다. “꽁꽁 싸매고 가슴 깊이 숨겨둔”(「화풀이로」) 마음의 상처들과 “내 삶이 실례라는 걸 안다”(「에티켓」)라는 참담한 자괴감, “생각으로 지은 죄는/모두 용서받고 싶었다”(「그림자」)라고 고백하는 문장들이 아프게 다가온다. 시인은 이런 아픔을 숙명처럼 담담하게 수용한다. “사람이기에 사람의 일을 하는 것을 슬픔이라고”(「도리어」) 부를 뿐이다. 슬픔은 단순한 감정에서 한발 더 나아가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도 아닌데” 신은 우리를 “왜 이렇게 슬프게 창조하셨을까”(「조가만가」)라는 의문으로 번지기도 한다.
여기서 마치 슬픔의 그릇인 듯했던 ‘사람’은 ‘사랑’과 만난다. 슬픔이 채워지고 넘쳐흐르길 반복하다 마침내 슬픔이 일상이 되고 습관적인 고통에 무감각해질 때, 그 빈자리에 사랑이라는 가능성이 스며든다. 하지만 차마 “버리지 못할 슬픔을 사람의 꼬리”(「도리어」)라고 부르며 몸에 가둔 채 살아가는 시인에게는 사랑의 감정 또한 슬픔으로 얼룩져 있다. 시인에게 사랑이란 “우리의 꿈이 다르다는 것”(「애인」)과 “아무리 안아도 남의 꿈엔 갈 수 없”(「유지」)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과 다름없다. “나는 나를 견디고 너는 너를 견”(「애인」)딜 뿐, 서로의 깊은 속을 나누지 못하는 관계는 “차갑고 외로운 악수”처럼 느껴지고, “사람은 왜 죽는 거야”라는 ‘너’의 질문은 “사랑은 왜 죽는 거야”(「새로운 일상」)로 서글프게 겹쳐 들려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시인은 그저 “너를 바라보는 게 좋았다”(「새로운 일상」)라고 되뇌면서 “다정이 가장 아픈 일”(「도리어」)이 되도록 사랑을 담아낸다. 고통과 상처가 더욱 깊어지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해 사랑해요 말해도 떠나갈 걸 알면서”(「윙컷」)도 ‘너’에게 다가간다.
“나는 너를 안으려 조금 기울었다”
슬픔을 담담하게 품고 다시금 사랑을 말하는 시
어제나 오늘이나 별다를 것 없는 무감한 일상 속에서 시인은 삶의 진실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되묻는다. “슬픔의 테두리를 도려내”(「미래라는 생각의 곰팡이」)어 평범하면서 평화로운 일상을 꿈꾼다. 물론 삶도 사랑도 뜻대로 되지만은 않는다.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했는데/그대로 한 일”(「유니폼」)들을 자책하기도 하고, “구청에 가야 하는데 시청에 가는 오늘”(「조가만가」)처럼 길을 잘못 들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은 골똘한 생각 끝에 ‘나’를 일으켜 세우는 깨달음을 발견한다. 끝없이 지속되는 삶의 절망감 속에서도 “슬픔이 꼭 슬픔으로 되돌아오진 않는다”(「신도시」)는 기대와 “내일도 살 거라는 믿음”(「조가만가」)을 간직하며 “사람이라면 사람의 일을 잊지 말아야겠다”(「도리어」)는 다짐으로 진실한 삶을 꾸려간다.
시인은 등단 직후 본격적인 창작활동 외에도 문학 레이블 ‘공전’을 창립하고 패션 화보와 문학을 접목한 비주얼 문예지 『모티프』를 발간하는 등 문학과 세상을 잇는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시단의 주목을 받아왔다. 슬픔으로 가득 찬 이 지구 위에서, 문학이라는 궤도를 따라 수많은 사람 곁을 ‘공전’하는 시인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정해진 궤도처럼 반복되는 슬픔을 사는 ‘사람의 일’이란 대체 무엇일까.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슬픔을 가두는 건 사람의 일이었고/사람을 겹겹이 쌓는 건 사랑의 일이었다”(시인의 말). 사람과 사랑이 겹쳐질 수 있다고 믿는 “그런 억지가 희망이 되는 곳”(「무력의 함」)에서 시인은 다시금 사랑을 시작하고 삶을 사랑할 것이다. 공전하는 별이 되어 깊은 슬픔으로 침잠해가는 세계를 보듬어 안을 것이다. 반복되는 삶의 궤도를 즐거운 마음으로 이탈해보고 싶은 이들, 슬픔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이 시집이 반가운 노크 소리로 다가가길 기대한다.
제1부 계신다 생각하면 계신다
직성
믿음 조이기
생각 담그기
생각 만지기
생각 밝히기
생각 연습
보호자
공양
유정
천사의 양식
감자 있는 부엌
생각 나가기
제2부 사람을 하는 중이다
유니폼
개평
문화광
조가만가
에티켓
분신
무력의 함
신도시
밤손님
주파와 시속
무능의 호
도리어
제3부 그 생각이 대신 가고 있다
명절
미래라는 생각의 곰팡이
분수대
화풀이로
자율
교대
그림자
문안
생각 믿기
기쁨 형제
기록
안부
제4부 사랑에 개연성이 있겠습니까
유지
서가를 지키는 이
기분은 노크하지 않는다
어둠은 미안해
기계 차이
고백
고드름
타르통에 빠졌다고 했다
애인
수련이 피기까지
윙컷
새로운 일상
해설|조대한
시인의 말
어떤 그릇은 그릇의 용도로 쓰이지 않는다
어떤 용도는 제 용도를 가둬주기도 한다
사람이 꼭 사랑할 필요가 없듯이
사랑이 꼭 사람의 이유일 필요도 없다
슬픔을 가두는 건 사람의 일이었고
사람을 겹겹이 쌓는 건 사랑의 일이었다
2023년 겨울
유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