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속 낯선 나라에서 혼자가 된 사람
의문의 살인과 사라진 기억, 그리고 엄습하는 위협
절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숨 막히는 전개!
치밀하고 탄탄한 이야기의 작가 편혜영의 첫 장편소설
세련된 문장으로 다시 완성된 빈틈없는 명작
*창비는 출간된 지 10년이 지난 소설 중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는 작품들을 엄선해 새로이 단장한 ‘리마스터판’을 출간하고 있습니다. 한국문학의 새로운 고전으로 자리잡은 작품들이 오늘의 젊은 독자들에게 한층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내면과 일상의 폭력을 강렬한 이미지로 형상하면서도 빈틈없이 치밀한 서사를 직조해내는 작가 편혜영의 기념비적인 첫 장편소설 『재와 빨강』이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으로 출간되었다. 작가는 이번 리마스터판 출간을 위해 거의 모든 문장을 새롭게 고쳐 써서 펴냈는데 이로 인해 작품의 시의성과 현재성이 한층 살아난 것은 물론, 새로운 독자와 이 책의 기존 팬들 모두를 만족시키는 새로움과 완성도를 지니게 되었다.
2010년에 처음 쓰인 『재와 빨강』은 지금 읽어보면 ‘코로나19’를 예언하는 듯한 내용이라 충격과 감탄을 자아낸다. 발열과 기침으로 서서히 퍼져나가는 원인 모를 팬데믹, 격리와 거리 두기를 거치며 사람들 사이에 팽배해지는 불신 등 소설 속 상황은 2020년 이후 전세계에 만연한 현실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편혜영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에 밀도 높은 문장으로 극단적인 상황에서의 인간성 상실, 소통의 부재로 빚어진 절대고독 등의 상황을 한층 더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재와 빨강』은 묵시록적이고 기괴한 요소들이 다분하면서도 현실적인 공감이라는 주제의식을 긴장감 있고 집요하게 추구했다는 점에서 빼어나게 빚어진 장편의 세계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누가 그의 아내를 죽였을까, 그는 어떻게 살아남을까
치밀하게 잘 짜인 스릴러이자 인간성에 대한 처절한 질문
제약회사에서 약품개발원으로 근무하는 주인공은 파견근무를 발령받고 C국의 본사로 떠난다. 마침 C국은 감기와 유사한 전염병이 창궐하여 위생 검열이 강화되었고, 전염병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마비 상태이고 길에는 쓰레기가 넘쳐난다. 배정받은 Y시 제4구의 숙소에서 출근 개시와 명령을 기다려보지만 본사 담당자 ‘몰’은 연락이 없다. 문득 본국의 집에 가둬놓고 온 개가 생각나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전처와 재혼했다가 다시 이혼한 동창생 유진에게 연락이 닿아 개를 풀어놔달라고 부탁한다. 다음 날 유진은 주인공의 집에 가보니 난자당한 개와 칼에 찔려죽은 전처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연락을 해온다. 언제 생겼는지 모를 손바닥의 멍,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출국 전날밤의 기억, 유진과의 술자리 등 혼란스러운 생각에 휩싸여 인터넷으로 뉴스를 검색해보니 집 근처 쓰레기장에서 자신의 지문이 묻은 칼이 발견되었고 자신이 유력한 살인 용의자로 지목되고 있음을 확인한다. 뜻밖의 소식에 당황하던 차에 누군가 숙소의 문을 두드리자 깜짝 놀란 주인공은 창밖 쓰레기 더미로 몸을 날린다.
전처의 죽음이라는 1부의 충격적인 사건은 이 작품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추리소설 같은 분위기로 이끈다. 이러한 긴장감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이어지며 독자로 하여금 과연 진실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되묻게 한다. 이후 주인공은 거리의 부랑자 신세가 되는데, 그가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생활하게 되는 과정은 처절함 그 자체다. 그는 그 와중에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감행한다. 그 시도는 또다른 미스터리를 남긴 채 좌절되기도 하고, 아내와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촉매제가 되어 주인공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주인공이 맞닥뜨리는 인간성 상실과 절대고독이란, 결코 본국에서는 상상도 못해봤지만 주인공에게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찾아온 시련이다. 현대문명에서 일상의 사소한 부분을 삭제함으로써 벌어지는 결과가 이토록 극적인 방향으로 삶을 이끈다는 사실이 놀랍도록 섬뜩한 실감으로 다가온다.
독자의 사유와 지평을 확장시키는 놀라움
특별한 의미와 감동을 선사하는 이 시대의 명작
이번 리마스터판을 펴내며 작가는 “팬데믹을 겪은 후였다면 이 소설은 쓰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삶을 폐허로 만드는 것은 역병과 쓰레기, 끊임없이 출몰하는 쥐떼가 아니라 적나라한 혐오와 차별, 정교한 자본주의임이 명백해졌으므로 다른 상상을 하기 어려웠을 것”(작가의 말)이라는 게 그 이유다. 그런 면에서 『재와 빨강』은 잘 짜여진 스릴러이자 인간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인 동시에, 현대사회와 문명 전체를 돌아보게 하는 거대한 스케일을 지녔다. 저마다 놀라운 상상력과 불편한 진실로 인간성을 파헤쳐온 편혜영의 여러 걸작 가운데서도 첫 장편소설인 『재와 빨강』이 유독 특별한 이유도 바로 독자로 하여금 사유의 지평을 확장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된 수많은 이유를 제외하더라도 2023년에 『재와 빨강』을 읽어야 할 이유는 명백하다. 이 소설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이미 현실로 다가온 상상력과 눈에 선명히 그려질 듯 밀도 높은 문장, 정교한 이야기 구성이 한데 어우러진 이 작품은 한국문학을 대표할 만한 명작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재와 빨강』은 몇년째 끝날 듯 끝나지 않는 팬데믹의 터널을 지나는 지금 우리에게는 더욱 특별한 의미와 감동으로 다가올 것이다.
제1부
제2부
제3부
작가의 말
(…)
책을 출간하고 십여년이 흐르는 동안 팬데믹은 가상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사건이 되었다. 소설을 구상하고 쓸 당시만 하더라도 내게 역병은 먼 과거이자 중세의 것이었다. 겪은 적 없는 시간이자 도래하지 않을 미래였다. 팬데믹을 겪은 후였다면 이 소설은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삶을 폐허로 만드는 것은 역병과 쓰레기, 끊임없이 출몰하는 쥐떼가 아니라 적나라한 혐오와 차별, 정교한 자본주의임이 명백해졌으므로 다른 상상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래전의 역병을 상기시키는 이 소설을 지금에 와서 다시 내놓는 일에는 얼마간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어떤 상상은 현실이 되기도 하고 때로 그렇게 겪은 현실은 이야기보다 더 적나라하다는 것을 잊지 않고 싶어서 다시 출간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래된 이야기를 다듬을 수 있게 해준 창비 편집부에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이미 이 소설을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그리고 새롭게 이 소설을 읽어주실 독자분들께 감사드린다. 드물지만 더디게 이어지는 독자분들 덕에 이 이야기의 희미한 잿빛이 계속 떠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