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484

코끼리가 쏟아진다

이대흠  시집
출간일: 2022.11.10.
정가: 10,000원
분야: 문학,
전자책: 있음

“차가운 당신의 외딴 방에

봄을 켜겠습니다”

담박한 온기를 전하는 이대흠 서정의 새로운 출발

다정한 외로움으로 모진 삶을 보듬어 안는 사랑의 언어

 

삶의 구체적인 감각에서 길어올린 토속적인 언어와 구성진 가락으로 남도의 서정을 노래해온 이대흠 시인이 여섯번째 시집 『코끼리가 쏟아진다』를 창비시선으로 펴냈다. 2019년 제1회 조태일문학상 수상작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창비 2018) 이후 4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는 그간 생생한 사투리의 사용과 질박한 시적 서사로 남다른 문학적 성취를 이뤄온 시인의 시적 세계관이 한층 깊어져, 특유의 은은하고 아름다운 서정성을 유지하면서도 묵직한 통찰로 내면을 어루만지는 새로운 경향의 시편들을 선보인다. 시인은 “공기의 명랑함”을 사유하고 “별들이 뛰어노는 하늘 언덕”(「미래를 추억하는 방법」)을 그리는 한없이 자유로운 상상력 속에서 영원한 사랑과 그리움의 대상인 ‘당신’을 찾아가는 ‘사랑의 여정’을 펼쳐 보인다. ‘당신’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과 삶의 비의마저 담박하게 감싸 안는 “다정한 외로움”으로 가득한 이 시집을 읽으며 우리는 상실의 감정을 환대하고 긍정하는 넉넉한 마음을 배우게 될 뿐 아니라 “문학이란 그 무엇보다 사랑의 일임을 실감하게”(황인찬, 추천사) 된다. “마음을 다루고, 정서를 손질하고, 감정을 만져서” 빚어낸 따뜻한 언어와 “순한 온기로 지은 향기”(시인의 말)를 머금은 시편들이 자아내는 서정적 울림 또한 깊디깊다.

 

이별을 경유해 ‘당신’과 세상을 품어가는 사랑의 여정

 

시인은 줄곧 차분한 시선으로 세상과 사물을 관찰하며 대상의 이면을 발견해내는데, 마찬가지로 이별의 상황 속에서도 품 넓은 감수성을 빼곡히 두른 채 사랑의 실마리를 찾아나간다. “이별을 고백하고서야 당신을 사랑”(「바스키아의 편지」)하게 된 시인은 잃어버린 ‘당신’의 목소리를 찾고자 애타는 마음으로 ‘당신’을 숱하게 호명한다. 그러나 “당신의 입에서는 또 말없음이 쏟아”지고 “침묵의 폭설”(「당신의 망설임에서는 살구꽃 향기가 납니다」)만이 내릴 뿐, “나는 당신의 내용에 포함되지 않”(「나는 당신의 내용에 포함되지 않습니다」)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에 빠진다. 하지만 시인은 비극적 인식에서 멈추지 않고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살아나는 체온”(「그리움의 탈색 현상에 대한 연구」)으로 “화를 태워 사랑을/끓이”듯 “사랑을 제조하는”(「53쪽 열번째 줄에 있는 사랑 제조법」) 일에 정성을 다한다. 그렇게 ‘당신’을 향한 사랑이야말로 “내 안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당신”(「그러나를 수신하는 방식」)을 찾아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임을 터득해나간다.

이때 ‘당신’을 잃고 외로움에 몸서리치면서도 시인의 언어는 관념화되거나 일방적인 감상성에 젖지 않는다. 산뜻하고 발랄한 감각으로 일상적인 대상을 평이하게 표현하지만 조금씩 빗겨 말하며 깊은 깨달음에 가닿는 번뜩이는 기지가 돋보인다. 시인은 “눈에 보이는 마음”과 “살아 있는 말”(「나는 당신을 빨강합니다」)로 ‘당신’과 소통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꽃을 주었지만 그대가 받는 것은 가시일 수도 있”고, “마음의 거리는 변질을 부”(「에서의 거리」)르기도 한다는 점을 상기하며 슬픔과 외로움에 젖어든다. 시인은 이처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시소의 양 끝에 놓인 듯 오르내리는” 환대와 비애의 복잡미묘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이윽고 안팎으로 요동치고 끊임없이 술렁대는 이 “사랑의 운동”(추천사)을 담담히 수행하며 “감정의 국경을 침범하지 않을 방법을 연구”(「마음의 호랑에서 코끼리떼가 쏟아질 때」)하고 “막다른 곳에 이른 미로의 감정”(「미로의 감정」)을 헤아리며 마음을 다잡아낸다.

 

정제된 시적 언어로 이룩한 서정의 놀라운 경지

 

그리하여 ‘당신’에 대한 시인의 환대는 단지 그리움의 정념에만 그치지 않고 ‘다정’으로 진화해나간다.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병의 씨앗”(「다정에 감염되다」)을 마음에 심은 시인은 삶의 길 어디에서 “예측할 수 없는 폭풍이 일어”(「감정의 적도를 지나다」)나더라도 “절대의 아름다움”이며 “내 우주의 중심”(「놀랍구나 너의 얼굴은」)인 ‘당신’의 존재를 곳곳에서 감각하고 “오답만으로 채워진 사랑도 가능하리라”는 믿음을 되새긴다. 마침내 자신이 ‘당신’은 잃었으나 끝내 “사랑을 잃지는 않았”(「감정의 적도를 지나다」)음을 확인한 시인은 “나의 파장과 당신의 파장이 만나”(「그러나를 수신하는 방식」) “사랑의 그늘이 비로소 몸을 얻는 순간”(「찰나」)에 이른다.

시인은 삶의 고단함과 애달픈 서러움에서 사랑의 싹을 틔우고 보살펴 끝내 향기로운 깨달음의 열매를 수확하는 역설의 미학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모습을 한장의 “사랑의 지도”(「감정의 적도를 지나다」)로 그려냈다. 군더더기 없는 시적 언어로 새로운 서정의 세계를 맞이하며 “풍경을 감춘 말의 뒤편”(「당신의 망설임에서는 살구꽃 향기가 납니다」) 구석구석까지 따스하게 바라보는 시편들에서 우리는 “아직은 희미해서 더욱 밝아질 ‘다정’과 ‘사랑’의 등불을 애틋하게 매다는 중”(최현식, 해설)인 시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따스한 온기로 세상을 밝혀나갈 이대흠 서정의 무궁무진한 여로를 기대해봄직하다.

목차

제1부

 

마음의 호랑에서 코끼리떼가 쏟아질 때

혈액이 흐르는 외투

그러나를 수신하는 방식

노랑을 입을래요

감정의 척도를 지나다

슬픔도 배달되나요

지렁이 어머니

독취(獨醉)

아우슈빠이

어란

봄을 입고

천관산 억새

 

제2부

 

미래를 추억하는 방법

손톱

열일곱번재의 외로움

구름의 망명지

미로의 감정

다시 회진(獨醉)에서

슬픔의 뒤축

어떤 예방

뒤집어진 공터에 대한 보고서

골목의 후회

포장술의 발달

우는 남자는 구입한 슬픔에 만족하려 합니다

공원을 믿지 마세요

싱싱한 폐허

 

제3부

 

에서의 산책

구엄리 사랑바위

당신의 망설임에서는 살구꽃 향기가 납니다

당신에게 골목의 오후를 드리겠습니다

내가 그날 마량에 간 것은

53쪽 열번째 줄에 있는 사랑 제조법

다정에 감염되다

바람을 입었던 오후가 있었다

그리움의 공장은 휴무가 없습니다

당신을 골목

내 임술에게는 당신의 입술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개울을 건너자 옥수수밭이 나왔습니다

찰나

놀랍구나 너의 얼굴은

나는 당신을 빨강합니다

 

제4부

 

바람의 건축술

슬픈 악기

나는 당신의 내용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흐느낌이 소멸로 가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리움의 탈색 현상에 대한 연구

버려짐을 찬양함

투명한 대지

정취암에서

에서의 거리

이제는 그리움에도 장갑이 필요합니다

바스키아의 편지

 

해설 ㅣ 최현식

시인의 말

다정한 외로움으로 가득한 이 시집을 읽으며 감탄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자연물 사이를 거닐며 “공기의 명랑함”(「미래를 추억하는 방법」)을 읽어내고 “구름의 망명지”(「구름의 망명지」)를 헤아리는 시인의 자유롭고 섬세한 상상력은 공중과 구름을 넘어, 옥수수밭과 적도를 넘어 더 넓고 아름다운
타자의 세계를 맞닥뜨린다. 우리 삶의 곡진한 사연들을 살피는 시인의 시선은 섣부르게 타인을 이해한다 자부하지 않고 그저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사람들의 사이 어딘가를 향해 있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이 시집을 통어하는 것은 사랑의 운동이다. ‘나’의 ‘홀로 됨’을 먼저 드러내 보이며 당신의 ‘홀로 됨’을 애써 읽어내는 이 모든 시적 운동은 “시커먼 흙으로 꽃을 빚듯” “사랑을 제조하는”(「53쪽 열번째 줄에 있는 사랑 제조법」) 일이 되는 것이다. 시인에게는 우리 삶의 고단함도 서러움도 모두 사랑의 토양이 된다. 무엇보다 담박한 온기를 품은 시인의 문장이야말로 그 사랑의 몸짓이라 할 수 있으리라.
당신은 이 시집을 읽으며 “그리움에도 장갑이 필요”(「이제는 그리움에도 장갑이 필요합니다」)하다고 말하는 다정함이야말로 이 혼란과 고독의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며, 문학이란 그 무엇보다 사랑의 일임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황인찬 시인

저자의 말

바깥으로 향했던 시선을 내 안으로 돌렸습니다.

마음을 다루고, 정서를 손질하고, 감정을 만져서

상대가 다치지 않을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순한 온기로 지은 향기를 흘리려 합니다

2022년 11월

‘노랑을입을래요’에서

이대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