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483

원근법 배우는 시간

송진권  시집
출간일: 2022.10.24.
정가: 10,000원
분야: 문학,

“우리 속에서 찰랑대던 그 물결은

말라서 다 어디로 갔을까요”

 

 

삶의 근원을 향해 흐르는 생생한 시적 언어

연민과 공생의 감각을 회복하는 정감 어린 노랫소리

 

 

2004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뒤 고향의 말과 풍속을 시적 언어로 되살려내며 “우리 시대 백석 시인의 현현(顯現)”(천상병시문학상 심사평)이라는 평을 받아온 송진권 시인의 세번째 시집 『원근법 배우는 시간』이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소실점에 가까운 “태초의 혼돈 상태로 돌아가 배 속 핏덩이의 목소리로” “원근법 너머의 시간”(김성규, 추천사)을 더듬어 쓸쓸히 잊혀가는 고향 마을의 애틋한 풍경과 그 안에서 순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채로운 모습을 세밀하게 그려내어 농익은 서정의 진경을 펼쳐 보인다. 충청도 사투리의 능청스럽고 구수한 가락과 삶의 내밀함을 담아낸 정밀한 비유가 돋보이는 단정한 시편들이 훈훈한 감동을 자아내는 동시에, 회색 도시의 음울한 그늘 속에서 쫓기듯 살아가는 우리들 가슴속에 잔잔히 스며들며 그윽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시집에는 ‘못골’을 비롯한 ‘오박골’ ‘도롱골’ ‘큰골’ ‘작은골’ 등 질박한 이름의 마을과 ‘가린여울’ ‘쇠물재’ ‘가릅재’ 등 정감 어린 지명이 곳곳에 등장한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장대 끝에 우리를 데려갈 새가 날아와 앉”을 거라고 믿으며 “장대를 높이 들고” 나란히 행진하고(「장대 들고 따라와」), 사람과 짐승이 “애초에 구분된 것도 없”이 한데 어울린다(「소나기 지나간 여름날」). 인위와 구별이 끼어들고 물질문명이 우리 삶의 아주 깊숙한 데까지 장악하기 전, 순전한 믿음과 위계 없는 공존이 가능했던 때의 원형적 풍경이 찬란하게 복원된다.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줄곧 고향에서 땅과 하늘을 가까이 두고 지내온 시인이 가꾸어낸 시적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고 존재의 도리를 다하며 살아간다. “아직 강이란 이름도 못 얻은/작은 도랑이었던 때”(「모교 방문」)의 순진무구한 마음에 얼비치던 “뭔지 모를 어룽거림”(「첫걸음마」)을 간직한 시편들이 거듭될수록 일찍이 우리 마음에서 희미해진 순수가 다시 빛을 발하고 이제껏 우리가 서로 “어떻게 어울려 살았는지”(「밑이 위로 갔던 때」) 곰곰이 떠올려보게 된다.

 

“아직은 그렇게 어두워지지 않았습니다”

단절과 소멸을 감싸 안는 부드럽고 푹한 시

 

정겹고 소박한 사람살이의 면면을 두루 살피는 송진권의 시선은 이번 시집에 이르러 더욱 눈여겨볼 만하다. “품삯두 제대루 못 받구 남의 일만 하구 돌아다닌다고” 동네 사람들이 손가락질해도 “그냥 웃기만 하던” 아버지(「음덕」)와 먼지 쌓인 이발소에서 팔십이 넘도록 겸손하고 성실하게 일해온 할아버지 이발사(「미복이용원」), “잘그락잘그락 올뱅이끼리 부딪는 소릴 내며” 저승길도 “동무해서” 함께 가셨을 할머니들(「올뱅이 잡으러 가듯」)의 사연은 삶의 곡진한 내력을 존중하는 시인의 진심을 통과해 더욱 뜻 깊고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지난 세월의 곡절을 마디마디 쓰다듬으며 흐르는 송진권의 시에서 미련함은 두터운 정으로, 낡음은 깊이로, 투박함은 아름다움으로 변화한다. 경쟁과 성장이 득세한 지금의 시대에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가치들이 그의 시 안에서는 “송아지 콧구멍에서 나오던 허연 김”(「다시 그 저녁에 대하여」)처럼 따스하게 살아 숨 쉰다.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타인과 함께 묵묵히 삶을 일궈온 이들의 모습을 통해 살아가는 일 앞에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순한 자세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시편들은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을 나긋나긋하게 달랜다.

한편 시인은 인간 아닌 생명들과도 공들여 눈을 맞춘다. “소가 되새김질하다 말고 나를 볼 때” 자신도 기꺼이 소의 눈동자에 맺힌 것을 마주보고(「소와 나」) 분꽃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그 속에 들어앉은 이 누구시냐고” 묻는다(「누구여」). 생명의 기척에 익숙히 다가서는 시인의 눈길을 따라가다보면 모든 존재 안에 다를 것 없이 깃든 신성함을 발견할 수 있다. 아울러 인간과 자연이 나누는 우정이 마음 뻐근해지는 장면으로 펼쳐지기도 한다. 당나귀처럼 뛰쳐나가고 싶지만 얼마 전 남편을 여읜 할머니가 외롭지 않도록 곁을 지키는 살구나무의 진득한 목소리(「살구나무 당나귀」)는 이제는 무뎌진 넒은 의미의 ‘함께 살이’의 감각을 깨우친다.

이렇듯 고향과 피붙이와 이웃들과 뭇 존재의 수수한 나날을 특유의 익살과 리듬을 버무려 노래하는 시인은 서로를 향한 연민과 공생에의 의지가 다 마르지 않은 시절로 독자를 데려간다. 시인이 그의 본원인 ‘못골’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엎드려 “우리들이 살았습니다”(「못골 살 때」)라고 되뇌며 “오는 줄 모르게 왔다가/가는 줄 모르게 가버리는 것들”(「인연」)을 줄기차게 시로 남기는 것은 무엇을 간직하고 기억해야 하는지 분별하지 못하고 발전과 성장만을 좇는 작금을 향한 나름의 저항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원근법 배우는 시간』은 우리의 속도와 방향성을 다시금 검토해보아야 할 지금 이 시기에 진정 귀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아직도 “장대를 높이 든 아이들”(「장대 들고 따라와」)을 따라가는 시인이 있다. “해와 달이 한 하늘에서 놀고/명암이 음양이 한자리에서/지지고 볶고 놀”던 시절, “애초에 구분된 것도 없고/사람이고 짐승이고 다 한 말을 하”(「소나기 지나간 여름날」)던 시절, 태초의 혼돈 상태로 돌아가 시인은 배 속 핏덩이의 목소리로 “언젠가 내가 피로 뭉쳐지던 때/형체도 갖지 못했던 붉은 덩어리일 때의 기억”(「원근법 배우는 시간」)을 불러낸다. 원근법 너머의 시간 속에는 “하늘이 다 사람 살게 하시나부다”(「봄비가 오려 할 때」) 믿으며 살던 사람들과 그런 믿음이라도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과 “팔밭 다랭이 일궈 먹고 살”다 죽으면 가릅재 “골짝으로 들어와 묻혀”야 할 사람들과 이미 묻혀 “하늘 위에 빼곡한 별”(「가릅재」)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일관되게 ‘못골’이나 ‘가릅재’와 같은 반(半)신화적 공간에서 살다 간 사람들, 전근대의 모순 속에서 상처 입고도 웃으며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의 삶을 따스하게 그려내어 그들에 대한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시로 전한다. “진득하니 붉어서 서로 엉겨 붙으며 이상하게 아름다운 모양”(「가죽나무 에서 가죽나무로」)의 시를 쓰며 그는 “세상에서 지니고 온 노래”(「너무 많은 어머니들」)를 다 풀어놓을 때까지 아이처럼, 아이가 되어 지상에서 자라나 하늘을 가리키는 장대를 들고 씩씩하게 걸어갈 것이다.
김성규 시인

저자의 말

소 몰고 집에 돌아오던 해 질 녘

봇물엔 피라미떼가 뛰곤 했습니다

원추리며 패랭이꽃 어룽어룽 배긴 물속에선 자라가 떠오르고

소낙비 오듯 후드득후드득 피라미떼도 뛰어오르면

자잘한 동그라미가 번지고 뭉개지며 포개져

커다란 둥그러미가 되어 출렁하니 봇둑을 스치곤 했습니다

앞서가는 소와 송아지와 하나로 뭉뚱그려져

하나의 큰 금빛 일렁임이 되어 집에까지 왔던 것인데요

그 물결의 출렁임 같은 것을 꼭 한번

써보리라 써보리라 맹세한 적이 있습니다.

 

더듬이 긴 별이 나를 만지는 가을 초입

솔미에서 송진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