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세계를 반영하는 동시에 형성한다”
갱신되는 현실, 다른 세상을 여는 문학
진실을 향해 쇄도하는 힘찬 비평
『리얼리티 재장전』은 문학과 현실의 역동적 관계를 섬세한 감식안과 날렵한 필치로 묘파해온 문학평론가 강경석이 등단 18년 만에 펴내는 첫 평론집이다. 87년 민주화 이후의 한국문학을 큰 테두리로 삼았으며 세월호참사와 촛불혁명 전후로 문학의 현장에서 발화된 다양하고 개성적인 목소리들을 분석한 27편의 글을 묶었다. 2000년대 초부터 문학이 사회적으로 무용하거나 현실 앞에서 무력할 뿐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졌는데, 저자는 이러한 공허한 논의를 단숨에 뛰어넘어 우리 시대 문학에서 새로운 현실을 향한 움직임을 생생한 감각으로 읽어낸다. 특히 수입 이론이나 거대담론에 휘둘리지 않고 문학적 사실 자체에서 출발해 진실로 나아가는 비평의 단단한 힘을 느낄 수 있다.
민주화 이후, 혁명 이후의 문학
문학과 현실의 복합적 관계에 대한 비평적 관심이 집중된 계기는 2014년 세월호참사와 뒤이은 촛불혁명이다. 대전환의 계기 앞에서 우리 문학은 사회현실에 대한 폭발적 관심과 참여를 보여주었고 비평이 이에 호응한 것은 일견 당연한 일이다. 다만 저자는 들끓는 현상에 대한 분석을 넘어 그 ‘이후’를 탐색한다. 그 열성이 1‧2부의 글들에 담겨 있다. 한 예로 87년 6월항쟁, 96년 한총련사건, 2017년 촛불혁명의 경험이 같이 담긴 황정은의 중편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와 윤이형, 김성중의 단편들을 정밀하게 읽는 가운데(「혁명의 재배치」) 저자는 사소하게 여겨져온 문제와 지워져온 존재들의 무한히 많은 혁명, ‘혁명의 혁명’과 그것을 가능케 할 도약의 순간을 발견한다. 하지만 혁명에 긍지와 기쁨만 있을 리 없다. 반동의 시절에 닥치는 수치와 무력감, 다시 그것을 갱신하려는 분투는 언제나 오늘 이 자리의 것이다. 따라서 “다음을 묻는다는 것, 언제나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48면)
이런 명제는 87년체제의 유산에 대한 저자의 끈질긴 탐색에서 비롯한 것이다. 개인과 일상의 차원에서 민주화는 소비자본주의의 내면화와 동시에 진행되었다. 이것이 가져온 여러 층위의 변화는 현실에서 페미니즘적 각성(「완전한 타인」), 시와 윤리의 문제(「시인의 경제, 시민의 정치」),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시야(「『바리데기』와 흔들리는 세계체제」) 등과 더불어 “사회적 빈곤 즉 소비미학 시대의 문화적 소외”(133면)로도 표현되었다. 이렇게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실종시킨 연대의 감수성, 불가역적 대세로 각인시킨 각종 ‘종언론’과 그 변종들에 맞서 저자는 “달라진 세상의 감각이 새롭게 불러내는”(71면) ‘민중적인 것’의 귀환을 말한다. 김현 시의 새로움을 현실의 맥락에 연결하고 정지돈의 정보조합형 소설과 이인휘의 노동소설을 ‘과거완료’와 ‘현재진행’의 거울상 위에서 만나게 하며 김남주 시의 현재성을 조명하고 ‘리얼리티를 재장전’할 수 있는 배경에는 87년체제의 긍지와 한계를 날마다 새롭게 살아내는 현실을 발견하는 안목이 있는 것이다.
갱신의 비평과 오늘의 문학이 그리는 새로운 미래
문학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탐구는 동시대 사회 속에서 비평의 역할과 자세에 대한 물음과 짝을 이룬다. 3부는 근대문학 종언론, 미래파와 탈서정, 문학의 정치성과 미학 등 2000년대 초부터 평단을 달군 여러 논의 가운데서 비평의 태도를 모색하는 글들이다. 1980년대식 정치주의·엄숙주의에 대한 반발은 90년대산 리버럴을 낳았고 이는 2000년대 문학에서 정치적인 것과 미학 논의를 어정쩡한 타협에 머물게 했다는 진단(「우리들의 일그러진 ‘리버럴’」)은 사회적·문학적 전사(前史)에 대한 명쾌한 정리로 오늘 비평이 처한 조건을 드러낸다. 현상 분석에 치우친 90년대, 2000년대 문학비평을 단기·중기·장기 층위의 사회변화에 잇대고 종언론 파동의 의미와 미래파·뉴웨이브를 일목요연하게 연결해 분석한 「비평의 로도스」는 물론 「‘가능한 현실’과 장편소설」 「이름 너머의 사유」 같은 글에는 ‘항상 역사화하라’라는 명제를 부단히 실천하는 가운데 리얼리즘의 재구성을 기획하는 저자의 내공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비평위기론과 그에 대한 책임 공방을 넘어 웹소설에 대한 실제비평적 탐구에 주목하는(「제도 비판 이상의 것」) 데서 보듯 저자에게 문학의 외연을 확장하는 일은 80년대의 민중을 오늘의 현실에서 ‘민중적인 것’으로 갱신하는 작업, 역사적인 것을 현재화하는 작업과 맞닿아 있다. “문학은 세계를 반영하는 동시에 형성”(241면)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문학계를 휩쓴 수입 이론의 과잉이 80년대적인 것의 억압에서 기원한다는 점을 짚는(「이름 너머의 사유」) 저자는 화려한 수사나 이론의 권위에 의지함 없이 성실한 텍스트 독해를 통해 작품과 작품 사이, 작품과 현실 사이를 날렵하게 연결한다. 최은미·김이설·정유정 소설에 드러난 악의 표상에서 ‘현실을 하강 초월하려는 잔인한 열정’을 읽어내면서 그 바탕에 ‘해소되지 못한 계급적대의 리비도’가 있다고 진단하고(「무저갱의 안과 밖」), 이미지와 운율의 의미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자리를 리듬으로 정의하며 김남주와 김수영 시가 공유하는 지점을 정밀하게 분석하는(「리듬의 사회성에 관한 스케치」) 등의 4부 글들은 비평이 동시대의 작품들 속에서 새로운 현실을 발견해가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평론가 최원식은 추천사에서 저자의 비평에 대해 “원체 박람(博覽)하고 강기(強記)한 바탕에 졸가리를 세워 물음을 구성하는 역능이 단연”이라 평하고 있다. 단편적 현상을 좇지 않고 총체적 진실을 향하는 열정의 바탕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하게 하는 표현이다. 문학과 사회의 전환기에 그 기미들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날마다 갱신하는 강경석 비평이 문학 안팎에서 다른 세상을 열어젖히는 중요한 계기로 읽히기를 기대한다.
책머리에
제1부 촛불 스펙트럼
진실의 습격: 민주주의와 문학 그리고 자본주의
혁명의 재배치: 황정은, 윤이형, 김성중의 눈
민족문학의 정전 형성과 3·1 운동: 미당이라는 퍼즐
묵시록과 계급: 백민석의 '폭민'과 최진영의 여자들
단지 조금 다르게: 김현의 시와 시대전환
리얼리티 재장전: 다른 민중, 새로운 현실 그리고 '한국문학'
제2부 민주화 이후의 한국문학
모든 것의 석양 앞에서: 지금, 한국소설과 '현실의 귀환'
그 시린 진리를 찬물처럼: 은희경, 권여선의 장편을 통해 본 87년체제의 감정구조
모더니즘의 잔해: 정지돈과 이인휘 겹쳐 읽기
완전한 타인: 이주혜 소설 『자두』
만인의 입술 위에 노래가: 김남주 시의 현재성
시인의 경제, 시민의 정치: 진은영 시집 『훔쳐가는 노래』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에 관한 수상: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와 가족서사
『바리데기』와 흔들리는 세계체제: '2000년대 작가' 황석영
제3부 비평의 임무
우리들의 일그러진 '리버럴': 비평이 하는 일에 관한 단상
비평의 로도스: '근대문학 종언론'에서 '장편소설 논쟁'가지
'가능한 현실'과 장편소설
제도 비판 이상이 것: 2018년의 평단
이름 너머의 사유: 비평과 이론 사이에서
리얼리스트의 자유: 최원식 평론집 『문학과 진보』
제4부 재현과 재현 사이의 진실
무저갱의 안과 밖; 최읜비, 김이설, 정유정 소설에 나타난 악의 표상
리듬의 사회성에 관한 스케치
교과서 여백에 쓴 시: 이기인의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 연작
침묵과 호흡: 임선기 시집 『항구에 내리는 겨울 소식』
사실과 중립: 다시 읽는 김원일의 『겨울 골짜기』
고양이들은 밤의 감정을 노래한다: 이설야 시집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
타원형 감옥의 외부: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과 그 맥락
수록 글 발표 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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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집 제목을 ‘리얼리티 재장전’으로 정한 것은 사실 또는 현실에 대한 존중으로부터 진실로 나아가는 힘이 나오며 그런 힘에 대한 신뢰가 언제나 문학 특유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자 존재 이유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오래된 문장들을 고치고 다듬으면서, 그리고 최근의 문학과 현실을 골똘히 들여다보면서 그런 생각이 더 뚜렷해졌다. 낡은 세상의 막바지가 생각보다 길다. 그러나 눈을 제대로 뜨기만 한다면 다른 경개(景槪)는 마치 늘 그래오기라도 했던 것처럼 이미 가까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어딘가에는 있을 나의 독자들과도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