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481

여름의 사실

전욱진  시집
출간일: 2022.09.09.
정가: 10,000원
분야: 문학,
전자책: 있음

“살아본 적 없는 아름다운 나날은

내가 살 수 있을까”

 

기쁘고도 슬펐던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

다음 계절을 마중하는 마음의 풍경

 

2014년 『실천문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전욱진 시인의 첫 시집 『여름의 사실』이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당선 소감에서 “손안에 있는 아름다운 폐허에 관해 쓰겠”다고 말한바, 사랑과 믿음이 허물어진 자리를 오래 서성이던 나날을 비로소 이번 시집에 담아냈다. 52편의 시는 8년이라는 긴 시간 공들여 매만져 더욱 단정하고 서정적인 언어로 무엇도 영원할 수 없는 쓸쓸한 세계를 먹먹하게 그린다. 한여름의 열기처럼 뜨거웠던 사랑도, 넉넉하진 않았으나 다정했던 유년도, 거듭될 것 같던 약속과 다짐도 더는 지속되지 않는 세상을 차분히 응시한다. 그 고요한 응시는 향수나 체념으로 기울지 않고, 눈부셨던 지난날이 지금 여기에 “흔적으로나마 존재한다는 사실”(해설, 임지훈)에 조심스레 다가간다. 무언가 영영 지나가도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은 아니며 빈자리에도 결국 “다음 계절이 온다고”(추천사, 신미나) 이야기하는 시편들이 따스한 위안을 전한다.

 

『여름의 사실』은 기쁨도 슬픔도 무성하고 열렬했던 ‘여름’에 관한 기록이다. 시인은 “그게 여름이었다”(「트라우마」)라는 한마디로는 요약될 수 없는 시절이 남긴 아름답고 애틋한 풍경들을 담담하면서도 감미로운 문장으로 한겹씩 풀어놓는다. “그대의/그대가 되는 일은 이 세상의 좋은 일”(「여름의 사실」)이라고 속삭였던 사랑의 순간을 또렷이 재현한다. 불화와 이별의 장면조차 빛나는 기억처럼 재생되는 시편들을 읽어나가며 독자 또한 삶에서 ‘여름’이라고 할 만한 시절을 곰곰이 떠올려보게 된다. 동시에 날카로운 통증도 느끼게 되는데, 이는 시인이 “물론 다 지난 일입니다”(「열린 결말」)라고 덧붙이며 그가 서 있는 곳이 이미 한 시절이 끝난 황량한 자리임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 되어가는 중”(「회복기」)과 같은 구절에서도 과거를 향한 그리움이 짙게 묻어나지만, “과거를 다시 돌보아/현재를 돕고 싶”(「리얼리티」)다고 말하는 목소리는 이 여름의 기록이 지난날에 관한 것임에도 결국 앞으로의 날들에 바쳐지는 것임을 일러준다. 

 

“거기 있는 것들이 너한테 상냥하길”

지나간 계절과 당신에게 건네는 다정한 진심

 

시인에게 지난날을 받아 적는 일은 스러지는 것들을 그저 스러지게만 두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현이자 남은 삶에 “아직도 볕바를 자리 있는 것”(「희우」)을 믿기 위한 노력이다. 그것은 또한 찬란했던 관계도 언젠간 저물고 끝까지 팽팽할 것 같던 마음도 느슨해지는 세상에서 쉽게 허무와 비의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한 실천이다. 시집 곳곳에 “모든 일은 과거가 되어”(「리얼리티」)갈 뿐인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이 스미어 있지만, “바래도 앙상해도 봄의 한창으로/계속 가는 일은 내가 자주 하는 사랑”(「사랑」)이라고 되뇌며 슬퍼하지만은 않는 것이 전욱진의 시 쓰기이다. 그렇게 감상에 치우치지 않고 과거를 적어 내려갈 때 지나간 모든 순간을 향해 “거기 있는 것들이 너한테 상냥하길”(「남아 있는 나날」)이라고 산뜻하고 의연하게 끝인사를 할 수 있게 되고, 한 시절이 닫힌 자리가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는 곳”(「간절기」)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때에 이르면 과거의 잔해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누구든 시 속에서 작지만 선명한 희망을 마주하게 된다. 

 

시인은 시 쓰기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쓸쓸함으로부터 구원할 뿐 아니라 속절없는 세상을 함께 슬퍼하는 다른 존재들에게도 관심과 연민을 기울인다. “혼자 주저앉아/우는 거 같은 사람”(「삭제 장면」)의 사정을 궁금해하고 세상의 ‘비탈’에 “간신히 붙박이며”(「상도동」) 살아가는 존재들의 일상을 유심히 살핀다. 또한 “생활이 무거워 종일 울고 싶다는 사람”과 “지금 죽을 만큼 아프다는 사람”(「컷트」)들의 소식을 듣고 안녕을 바란다. 나아가 그런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에//그래도 한번은 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팩트 체크」)고 말하며 무너져가는 풍경에 희망과 사랑을 새로이 새겨나간다. 이 시집이 끝내 세상을 감싸 안으려는 시도로 와닿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여전히 세상사에 어둡고/언제나 사람이 어렵다”(시인의 말)라고 말하는 전욱진 시인은 그렇기에 늘 세상과 사람의 가까이에서 오래도록 시를 써왔다. 『여름의 사실』은 그간 “가슴에 이를 만큼 쌓이고 쌓여/깊어진 말들”(「창원」)이 처음 빛을 보는 자리이다. 이 자리에서 독자는 무엇도 영원하지 않은 세상의 쓸쓸함을 위로하기로 결심한 한 사람의 담담한 용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제1부·신들을 위한 여름

 

트라우마

라이브

연착

몬순

폭서

상도동

신들을 위한 여름

아프리카 커피 자루

여름의 사실

하경(夏景)

잔서(殘暑)

여름잠

 

제2부·돌이키지 않아도 온 마음인 것으로

 

회복기

도벽

결심

남아 있는 나날

너의 낮잠

미아리

유기

월동

조명 가게

은하수비디오

컷트

올무

망정

 

제3부·에스키모의 나라

 

삭제 장면

리얼리티

팩트 체크

뜬눈으로

와사비

휴일

에스키모의 나라

소금과 빛

안식년 

측량

경주

간절기

 

제4부·시절은 이제 상관도 안 하고

 

입춘

입춘소묘

사랑

단둘

창원

안양

내담

기도하고 있어요

춘분

회우

제주

삼천포

곡우 무렵

주문

 

해설|임지훈

시인의 말

신의 뜻을 받은 이는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 사랑이 어려웠던 사람은 시인이 되었다. “깊고 넓은 시름들이 전부/기담으로 전해지는”(「라이브」) 세상에, 부모와 누나가 있다. 더러는 미열처럼 앓던 사랑도 조용히 왔다 간다.
시인은 허전하고 쓸쓸한 세상에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미신처럼 “겪어본 적 없는 아름다운 기억”(「신들을 위한 여름」)을 함께 좇는다. 그 여정이 뜬눈으로 꾸는 잠 같고, 흉사가 드나드는 폐가 같았으리라.
시집을 읽는 내내, 폭서가 계속되던 여름을 떠올렸다. 그가 살아온 절기마다 불에 덴 자국이 화창하게 펼쳐지기를 바랐다. 지난날을 아물린 시인의 손에 얼음 한알 쥐여주고 싶다. 여름의 화기가 식고 나면, 다음 계절이 온다고. 그러니 “누추한 이 세상에 그래도 누군가는 사랑한다는 소문”(「잔서(殘暑)」)을 믿으며, 우리도 간신히 아름다워지자고.

신미나 시인

저자의 말

마음과 기억은 대개 같은 말이고

자주 내 편이 아니었다

 

다만 나를 뚫고서 지나간 것

그게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여전히 세상사에 어둡고

언제나 사람이 어렵다

 

사랑하지만 용서는 하지 않은

그 모두에게 이 책을 건넨다

 

2022년 여름

전욱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