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467

피아노로 가는 눈밭

임선기  시집
출간일: 2021.12.31.
정가: 9,000원
분야: 문학,
전자책: 있음
 

 

 

"인간은 침묵에서 언어로 옮겨졌다

침묵은 미(美)처럼 펼쳐 있다"

 

 

 

관습과 상투를 하얗게 지우는 눈의 언어

의미가 새로이 도래할 자리를 비워두는 여백의 시

 

 

 

1994년 작품활동을 시작한 뒤 줄곧 언어의 본질을 탐구하는 독자적인 시세계를 일궈온 임선기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피아노로 가는 눈밭』이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특유의 정갈함과 간결함으로 언어의 원형을 복원하는 광경을 우리의 눈앞에 선연히 펼쳐 보인다. 화려한 수사를 배제한 “언어의 극한”(장철환, 해설)에서, 관습과 상투로 얼룩진 인식을 한겹씩 벗기는 문체를 연마하는 시편들은 기어이 언어, 인간, 세계의 본모습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순수를 향한 낭만과 향수로 구축한 시적 공간에 들어서면 그간 구별하고 경계 짓느라 손상된 우리의 가청범위로 감지할 수 없었던 ‘울림들이 여기저기 메아리치는 것’(정현종, 추천사)을 들을 수 있다. 그 낯설고도 매혹적인 울림은 굳어진 의미가 탈각되고 새로운 의미가 도래할 여백으로 독자를 깊숙이 데려간다.

‘눈밭’은 이 시집을 관통하는 풍경이다. 눈[雪]이 들판 위의 무수한 경계를 지우면, 분리되었던 공간은 하나가 되어 하얗게 빛난다. 시인이 눈처럼 고요하고 정결한 언어로 구현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것과 저것의 구분이 희미해진 눈밭의 세계이다. 시인은 구획을 따라 어느 곳에 속하기보단 “사이에 서 있”(「꿈 1」)기를 택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목소리를 줄이고 언어의 색을 비우다가 이내 경계와 함께 사라진다. 그리하여 구분이 없기에 무엇이든 가능한 너른 공간이 시 속에 들어설 때 지금까지 우리를 속박했던 시시비비의 선들이 얼마나 임의적인 것이었는가를 문득 깨닫게 된다. “꿈도 현실도 사라”(「스위치」) 지고 “주관과 객관의 경계가 철폐”(해설)되는 그 순간에야 비로소 “내가 본 가장 큰 손은/야학 교사 시절/어린 학생의 손이었다”(「검은 백조」)라고 말하고 “백지가 말하는 소리”(「이것으로도 저것으로도 눈을 가리지 말자.」)를 듣는 시적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 ‘눈밭’에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경치를 마주하는 것이다.

 

 

 

경계를 허물어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잇는,

더 넓은 풍경을 만나기 위한 문체 연습

 

 

 

한편 시인은 자신의 시작(詩作)에 영향을 준 여러 예술가와 학자, 그들의 작품을 시 속에 적극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시적 공간을 확장하기도 한다. 파블로 피카소-월리스 스티븐스-데이비드 호크니로 이어지는 “푸른 기타”의 계보 끝에 자신의 작품을 위치시키고(「파블로 피카소로부터/영향받은……」) 메리 올리버의 음성을 따라 프로빈스타운으로 향하며(「야생 기러기떼」), 언어학자 수잰 로메인의 저서를 참조하여 순수함을 간직한 언어 사용자의 모습을 시적으로 소개하는 식이다(「빈랑나무 열매」). 작품 밖의 작품과 접속할 때 작품의 공간은 작품을 넘어서며 그것은 ‘개방’이라고 시인이 말한바, 이는 장르 간 구분을 없애고 열림을 지향하려는 적극적 노력의 흔적이다. 시에 바깥과 연결된 창을 만드는 것이다. 독자는 그 창을 통해 시 밖으로 나가 그림에 닿고 다시 시로 돌아와 다음엔 인류학과 언어학으로 향하는 여정에 참여하며, 시인이 ‘눈밭’의 풍경으로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했던 ‘경계 없음’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시인이 무엇보다 예리하게 탐구하는 것은 ‘언어’이다. 언어학자인 시인에게 인간은 언어적 존재이고 세계는 인간이 구성하는 것이니, 세계에 대한 해명은 언어에 대한 궁리와 함께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언어에 대한 궁리는 언어의 표면을 더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본질에 대해 말할 줄 아는 자”(「문체 연습」)로서 “언어 지나/침묵”(「침묵」)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데에까지 나아감을 뜻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언어가 본래 모습인 침묵에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텅 빈 언어를/다시 텅 비게 해서”(「눈을 나르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 3」) 세상에 내보낸다. 이는 언어의 무용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관습적인 언어 사용의 흔적들을 말끔히 지우고 언어의 원형적 상태를 회복하여 새로운 인식이 도착할 자리를 마련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얻은 “침묵의 언어”(「침묵」)로 인간 인식의 한계를 뚫어내고 세계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시인은 오늘도 ‘문체 연습’에 심혈을 기울인다.

목차

제1부

 

꿈 1

꿈 2

꿈의 원천

꿈의 열쇠

존재하지 않는 사실

착각

검은 백조

스위치

여기는 그림이 아닙니다

 

 

제2부

 

피아노로 가는 눈밭

대화

밤의 독백

눈 1

눈 2

눈 3

눈을 나르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 1

눈을 나르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 2

눈을 나르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 3

눈을 나르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 4

 

 

제3부

 

목소리

퇴계의 시

시인

편지

점심 시

야생 기러기떼

빈랑나무 열매

메타포라

소녀

예술

그림

어느 사진가

수영장으로 쏟아지는 물, 서울

파블로 피카소로부터/영향받은/월리스 스티븐스로부터/영향받은/데이비드 호크니의 푸른 기타로부터 영향받은

음악

원초적 소리들

 

 

제4부

 

구름 아래 산책 1

구름 아래 산책 2

은평에서 1

은평에서 2

청송대

인천에서

수종사

파리에서

계획

오타루

어느 장례식

그랜드 투어

풍경 1

풍경 2

 

 

제5부

 

가을

이것으로도 저것으로도 눈을 가리지 말자.

눈물과 이성

거울

일기

문장들

우드 와이드 웹

시 프로그래밍

호모 바구니

태초에 말이 있었다

침묵

문체 연습

진실

별 바라기

 

 

해설|장철환

시인의 말

 

임선기 시인의 작품은 그 어조가 부드럽고 잔잔하다. 그런 어조로 하는 말 속에는 그러나 놀라운 이미지들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강한 울림들이 여기저기 메아리친다. 예컨대 나비가 날면서 그리는 궤적에서 “심전도”를 떠올리고 “내 핏줄의 끝”을 “해변”(「원초적 소리들」)과 연결하는 솜씨는 아주 감동적이다. 또 “나는 잠들어 있었다/깨어난다//잠들어 있는 사람을/깨워주는 일은/아름다운 일//아름다운 일이 내린다.//이미 깊은/눈이 내린다”(「눈 3」)라고 말할 때, 내리는 눈이 “이미 깊은” 이유 역시 필경 그것이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학자이기도 한 시인의 개성도 작품에 신선함을 더한다. 정현종 시인

저자의 말

어느 날 꿈을 꾸었다. 한번 꿈에서 깨어났으며, 다시 깨어나기 위해 다시 꿈꾸고 있다  

2021년 동지(冬至)

임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