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아이즈

사만타 슈웨블린  장편소설  ,  엄지영  옮김
원제: Kentukis
출간일: 2021.12.20.
정가: 16,000원
분야: 문학, 외국문학
전자책: 있음
 

 

 

 

넷플릭스와 『뉴욕 타임스』가 주목한

동시대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가장 빛나는 별

사만타 슈웨블린의 화제작!

 

 

 

 

 

올겨울에 어울리는 고요하고 스산한 SF‧공포소설

21세기의 프랑켄슈타인 ‘켄투키’가 바꿔놓은

달콤하고 섬뜩한 일상의 풍경

 

 

 

 

 

“사만타 슈웨블린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

편혜영

 

 

 

 

 

★ 2020 『뉴욕 타임스』 ‘올해의 책 100’

★ 2020 인터내셔널 부커상 후보

 

 

 

 

내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동물 인형 로봇의 형태를 하고 내 집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나와 직접 교류한다면 어떨까? 내가 팔로하는 사람의 일상을 내 집에서 모니터로 들여다볼 수 있다면? ‘초연결’ 시대에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한 관계 맺기의 본질을 서늘하고 섬뜩한 상상으로 통찰한 소설 『리틀 아이즈』가 창비에서 나왔다. 2020년 인터내셔널 부커상 후보에 오르고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올해의 책 100권’에 꼽힌 아르헨티나 작가 사만타 슈웨블린의 최근작이다. 올 10월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무비의 동명 원작소설인 『피버 드림』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된 사만타 슈웨블린은 『리틀 아이즈』와 『피버 드림』 외에도 초기작인 소설집 『입속의 새』까지 영어로 번역된 주요 작품이 모두 인터내셔널 부커상 후보에 오르는 등 세계적인 젊은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는 라틴아메리카 대표 작가이다. 슈웨블린과 같은 해인 2017년에 셜리잭슨상 장편 부문을 수상했던 소설가 편혜영은 사만타 슈웨블린을 가리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이라고 평했다. 2010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바르가스 요사는 “현대문학의 가장 유망한 목소리 가운데 하나”라고 했으며, 『뉴욕 타임스』는 “현재 스페인어권 동세대 작가들 중 단연 돋보이는 작가”라고 평가했다.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오분 뒤”(NPR)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이 소설은 스마트폰 보급과 소셜 미디어의 발달로 전세계가 그 어느 때보다 촘촘하게 연결되고 팬데믹으로 인한 이동 및 대면 모임 제한 등으로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이 급격하게 증대된 오늘의 현실에서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올 것이다.

 

 

 

“타인의 삶 속에서 익명의 존재가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털북숭이 동물 인형 로봇이 바꿔놓은 세계의 일상

 

 

 

두더지, 토끼, 까마귀, 판다, 용, 부엉이… 각기 다른 동물 인형 모습을 한 반려로봇 ‘켄투키’가 전세계 사용자들의 삶을 깊숙이 파고든다. 켄투키의 특징은, 그것을 직접 구입해서 ‘소유하는’ 사람과 온라인으로 연결 암호 카드를 구입한 뒤 제어프로그램을 통해 ‘조종하는’ 사람이 다르며 서로가 서로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 모든 매칭은 서버에서 자동으로 이루어지며, 하나의 켄투키-암호 카드로 단 한번의 연결만 할 수 있다. 이 ‘소유자’와 ‘사용자’(조종자)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사람들의 일상과 그들을 둘러싼 세계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달라진다. 때로는 행운으로, 때로는 악몽으로.

남편과 사별하고 하나뿐인 아들은 지구 반대편 홍콩으로 일하러 가서는 연락조차 뜸해 적적하게 지내던 노년의 페루 여자 에밀리아는 독일에 사는 젊고 매력적인 여자 에바의 삶을 켄투키-토끼를 통해 동경의 눈으로 지켜보며 애정을 갈구한다. 과테말라 안티과에 사는 소년 마르빈은 노르웨이의 어느 상점 쇼윈도에 갇혀 있는 켄투키-용을 조종해 얼마 전 돌아가신 엄마가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던 눈을 찾아 험난한 모험에 나선다. 수십대의 태블릿 컴퓨터와 연결 암호 카드를 사들여 세계 각지의 켄투키들을 관리하면서, 특정한 조건의 켄투키를 조종하길 원하는 사람에게 웃돈을 얹어 연결 회선을 판매하는 사업을 벌이는 크로아티아 청년 그리고르는 어느날 한 켄투키를 통해 베네수엘라 소녀가 브라질의 외딴 마을에 납치되어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직원인 니콜리나와 함께 아이를 구출하기 위해 애쓴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예술가’인 남자친구와 함께 멕시코 오악사카의 예술가 공동주택에 머물던 알리나는 무료함을 이기고자 켄투키-까마귀를 구입하지만 점차 히스테리에 사로잡힌다. 이탈리아 움베르티데에 사는 이혼남 엔초는 아들이 켄투키-두더지의 사용자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한 뒤에도 켄투키에 대한 애착을 쉽게 끊어내지 못한다. 이렇게 주요 인물 10여명의 이야기와 함께 중간중간 짤막하고 강렬한 일화들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어진다. 소유자가 죽자 테라스 밖으로 몸을 던져 ‘자살’을 선택하는 켄투키, 자신이 조종하는 켄투키가 화려한 콘서트 현장에서 청중에 의해 하늘 높이 던져지다 땅으로 추락해 연결이 끊긴 뒤 폭발음과 총성이 잦아든 시에라리온의 난민 캠프 막사 안의 현실로 돌아오는 사용자의 삽화 등은 정서적 충격과 함께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겨울에 어울리는 건조하고 스산한 공포

고요하게 숨통을 조여오는 ‘사만타 슈웨블린’식 서스펜스

 

 

 

사만타 슈웨블린은 공포야말로 인간 내면의 깊은 곳에 내재한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감정이라고 본다. 전작 『피버 드림』에서 서로 원하는 답이 다른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만으로 팽팽한 긴장과 불안을 자아내며 독특하고 매력적인 ‘뉘앙스의 공포’를 보여준 그는 『리틀 아이즈』에서 또 한번 자신의 독창적인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피버 드림』이 대화체 소설이라는 형식적 장치를 통해 서스펜스를 만들어냈다면, 『리틀 아이즈』는 주요 소재인 켄투키에게 몇가지 영리한 장치 혹은 ‘제약’을 부여함으로써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첫번째 장치는 켄투키의 눈이 카메라라는 것이다. 사용자는 켄투키의 눈을 통해 소유자와 그가 생활하는 공간을 엿볼 수 있지만, 소유자는 사용자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다. 그가 선의를 가진 좋은 친구일지, 악의를 가진 관음증자나 협박범일지 알 수 없는 데서 오는 긴장이 시종 이어진다. 이런 시선의 비대칭성에 정보와 의사소통의 비대칭성이 더해진다. 켄투키-사용자는 말을 하지 못하고 오직 동물의 울음소리(또 하나의 소름 끼치는 장치로 작동하기도 한다)와 바퀴를 이용한 이동으로 제한적인 의사 표현만 할 수 있다. 반면 켄투키-소유자가 하는 말은 모르는 언어라도 번역기를 통해 사용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는 사용자-소유자 사이에 일종의 불균형한 권력관계를 낳고, 이로 인해 숱한 사건이 벌어진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장치는 켄투키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켄투키의 ‘생명’은 하나뿐이어서 사용자가 아주 오랫동안 접속하지 않거나 제때 충전기로 이동하지 못하고 배터리가 소진되면 더이상 ‘되살릴’ 수 없고 연결은 영원히 끊겨버린다. 이 유사죽음은 이야기에 비극적 우연을 더하고 긴박감과 긴장감을 부여해 독자를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또한 사용자-소유자의 관계가 잘못된 방향으로 틀어질 때 지독히 어둡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기술은 인간의 내면을 고스란히 되비추는 거울

단절과 고립을 낳는 초연결 사회의 역설

 

 

 

사만타 슈웨블린은 한 인터뷰에서 기술은 그 자체로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며 『리틀 아이즈』로 “우리가 기술을 통해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렇게 떠올린 아이디어가 바로 “왓츠앱, 트위터, 페이스북과 스마트폰을 합친 것 같은 장치”인 켄투키였다. 소유자와 사용자가 다른 방식의 접속은 사람들 사이의 우발적인 “상호 이해와 연대”를 통해, 그리고 “두 종류의 삶”을 향유함과 동시에 삶의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처럼도 보인다. 실제로 몇몇 이야기에서 (적어도 처음에는)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과 익명적 관계의 잠재성에 대한 희망이 간간이 엿보이기도 한다. ‘켄투키 해방 클럽’ 멤버들의 도움과 응원으로 한번도 본 적 없는 눈을 찾아나서는 소년 마르빈의 이야기나 짤막하게 뉴스로 등장하는, 구급차를 불러 심장발작을 일으킨 주인을 살린 켄투키의 일화처럼 말이다(하지만 여기에도 반전이 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소설 속 현실은 아주 부정적인 양상으로 전개된다. 켄투키-사용자들은 “여러개의 눈으로 전세계를 한눈에 내다보는 유리창”처럼 소유자들의 사생활을 감시하는가 하면, 이를 통해 상대방에게 협박을 일삼고, 아이들을 상대로 도착적 행위나 납치를 자행하기도 한다. 반면 소유자들이 켄투키들을 학대하거나 파괴하는 경우도 자주 눈에 띈다. 이는 순진무구한 사물이 아니라 상품을 매개로 이루어진 관계에서 비롯되는 필연적인 결과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리틀 아이즈』는 소셜 미디어와 스마트 기기로 그물처럼 짜인 현재의 초연결 사회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전지구적 봉쇄가 다시 한번 가시화된 상황에서 읽는 이 소설은 고독과 고립에 대해, 온라인을 통한 연결에 대해 더욱 가슴에 사무치는 통찰을 안겨줄 것이다.

 

 

목차

리틀 아이즈

 

옮긴이의 말

 

이 책의 전제가 무엇인지 깨달았을 때 나를 스쳐간 전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물론 그 아이디어는 시의적절할 뿐 아니라―켄투키는 우리 시대의 위험, 허영, 망상, 해악 그 어느 것에든 대입할 수 있다―소셜 미디어 시대의 소비문화, 프라이버시, 허물어지는 경계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더없이 적합하다. 하지만 내가 놀란 지점은 슈웨블린이 이 손쉬운 길을 피해 소설의 주요 소재를 배경으로 밀어낸 채 대신 인물들의 내면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를 강렬하고도 구체적으로 조명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처럼 효율적으로 캐릭터를 구축하고 내러티브를 이끌어가는 작품을 본 적이 없다. 능란하고 풍성한 350면[한국어판 기준] 남짓한 페이지에 소설 백권의 재료가 들어 있다. 『뉴욕 타임스』
사만타 슈웨블린은 SF 작가는 아니다. 어쩌면 그것이 그의 새 소설 『리틀 아이즈』가 훌륭한 SF소설로 읽히는 이유일지 모른다. (…) 『리틀 아이즈』는 몸서리나게 소름 끼치지만, 그런 [일반적인 공포소설의] 방식으로 무서운 것은 아니다. (…) 그런데도 눈을 뗄 수 없다. 심지어 고개를 돌리고 싶어도―압도적으로 파괴적이고 충격적인 결말로 다가갈수록 슈웨블린이 당신의 믿음을 산산조각 내고 당신에게 상처를 입히더라도―돌릴 수 없다. NPR(미국공영라디오)
슈웨블린은 예술적인 솜씨로 이 새로운 기계에 제각기 다르게 반응하는 세계 곳곳의 사용자와 소유자 들을 독자에게 소개해주며 익숙해지도록 해준다. (…) 슈웨블린의 작품에는 언제나 공포가 감도는데, 특히 이 작품에서는 각각의 연결이 잘못된 방향으로 틀어질 때 벌어지는 폭력적인 순간에 최고조에 달한다. 무생물이 살아 움직인다는 구닥다리 소재도 당신이 대가를 지불하는 만큼 얼마든지 무시무시해질 수 있다. 심지어, 아니 오히려 꼭 껴안고 싶어지는 판다 인형이 알 수 없는 의도를 품고 가까이 다가올 때 말이다. 그러나 슈웨블린이 자신이 만들어낸 전제가 내포한 함의를 통해 내러티브를 영리하고 빠르게 이끌어가는 와중에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가 등장인물들 내면의 희망과 두려움을 중요하게 다루는 방식이다. (…) 『리틀 아이즈』는 세계화된 세상에서의 연결과 공감에 관해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글로벌 락다운 상황에서 이 소설 속 고독/고립에 대한 탐구와 온라인 경험이 더욱 가슴에 사무치게 다가온다. 『가디언』
『리틀 아이즈』에서 슈웨블린은 자신이 인물들을 세밀하게 묘사해내는 장인임을 증명해 보인다. 각각의 스토리는 기술로부터 의미와 타락을 이끌어내는 인간 능력의 새로운 국면을 조명한다. 반려동물처럼, 슈웨블린의 로봇들은 심리적 투영을 위한 그릇, 곧 숭배, 불안, 혐오, 악의, 헌신으로 가득 찬 괴물이 된다. 그들의 작은 눈을 들여다보거나 그들의 작은 눈을 통해 내다보는 것은 무한하고 불안한 고리, 한번 활성화되면 완전히 파괴되어야만 끊어지는 고리의 액자소설처럼 불안을 자아내는 효과를 낳는다. 『LA 타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