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한장 떼다가 감으로 눌러놓고
거울 닦듯이 들여다보자 내 마음을 들여다보자”
이 계절 가장 반짝이는 순간이
내 마음의 첫 문장이 될 때,
한뼘의 일기로 간직하는 계절의 선물
순박한 언어로 짙은 서정의 시세계를 다져내 독자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신미나 시인의 한뼘일기 『서릿길을 셔벗셔벗』이 창비에서 출간되었다. 시인은 시와 웹툰을 접목한 ‘시툰’으로 많은 호응을 얻은 데 이어 이번엔 계절의 정취를 듬뿍 담은 그림일기를 독자들에게 선물한다. 사계절을 지나는 동안 쓰고 그린 사랑스러운 그림일기를 통해, 자연을 가까이 느끼고 존재의 작은 기척을 보살피는 자세를 다정하고 친근하게 전한다.
겨울 일기부터 가을 일기까지 총 4부로 나뉜 일기장을 펼치면 시인 자신의 캐릭터 ‘싱고’와 그의 반려묘 ‘이응옹’이 아기자기한 그림 속에서 우리를 반긴다. 그림 곁에는 사계의 다채로운 색과 소리, 맛과 향을 선명히 노래한 한뼘의 글이 나란히 실려 있다. 한편의 시 같기도 한 이 글들은 그림 속 풍경에 깊이를 만들고 한뼘보다 긴 여운을 남긴다. 그림과 글이 정답게 기대어 부르는 계절의 노래는 오늘을 완성하는 사소하지만 특별한 순간을 포착한다. 아울러 우리를 감싼 시간의 섬세한 움직임과 자연의 생생한 힘을 실감케 한다. “자연의 생기와 신비를 구체적으로 실감하는 일이야말로 자연에 대한 감수성을 회복하려는 노력과 같다”(들어가는 말, 6면)는 믿음으로 꾹꾹 눌러쓴 싱고의 일기는 사계와 이십사절기의 풍광을 색색이 스케치하여 시간과 자연에 무디어진 우리의 감각을 부드럽게 일깨운다. 무감하게 매일을 보내는 데 지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책을 반갑고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활짝 열고 사계절을 걸을 때
우리 안에 환히 켜지는 새로운 감각
『서릿길을 셔벗셔벗』은 싱고가 하루를 찬찬히 둘러보며 수집한 순간들로 가득하다. 싱고는 바람 한줌, 낙엽 한잎, 햇살 한줄기도 쉬이 지나치지 않는다. 그 모든 작은 것들이 계절 속에서 단 한번 반짝이는 빛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계절이 바뀌면 잠시 모습을 감출 풍경을 붙잡아두기 위해 싱고는 온 몸과 마음을 쫑긋 세운다.
봄에는 저녁 공기에 진한 향을 풀어놓는 라일락 꽃길을 따라 자전거 페달을 구르고(「그 집 앞」), 여름엔 모내기 끝내고 잠든 삼촌의 코 고는 소리를 받아써본다(「망종 亡種」). 가을 아침 일찍 밖으로 나가 “셔벗 아이스크림처럼/부서지는” 서릿길을 가장 먼저 밟고(「상강 霜降」) 살금살금 자라는 겨울의 고드름을 지켜보는 것도 싱고의 일이다(「동장군」). 제철 음식을 맛보고 철마다 피고 지는 꽃들의 이름을 헤아리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이처럼 사계를 이십사절기로, 무수한 순간으로 잘게 쪼개어 음미하는 싱고의 자세는 우리의 매일이 뿌옇게 반복되는 생활이 아니라 또렷이 감각해야 하는 순간으로 꾸려진 ‘계절의 선물’임을 일러준다. 그리고 계절이 건네는 선물을 오래도록 간직하고픈 마음을 따스한 김처럼 피어오르게 한다.
손이 찬 당신이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쌀 때
따뜻한 밥뚜껑 위에
손을 올려놓을 때
나란히 걷다가
슬그머니 팔짱을 낄 때
─「둘이서 첫눈」 전문
한뼘일기에는 한뼘을 훌쩍 넘는 깊은 마음이 담겨 있다. 싱고는 한여름 엉겅퀴를 구경하다 자기 안에서 “사랑이/너무 많아서/지는 것 같은 마음”(「엉겅퀴는 멍든 깃을 달고」)을 발견하고, 보고 싶어도 꾹 참느라 쪼글쪼글해져버린 그리움을 봉숭아물을 들이며 떠올린다(「첫사랑」). 후회가 마른 국화처럼 후련히 가벼워지기를 기다리는 날도 있다(「서리 맞은 국화」). 싱고가 가만히 계절의 순간을 응시할 때 순간도 깨끗한 거울이 되어 싱고의 마음을 되비추기 때문이다. 자연처럼 계절 따라 빛깔을 달리하는 싱고의 마음을 지켜보다보면, 바삐 사느라 곰곰이 살피지 못했던 내 마음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계절의 기척에 귀 기울이는 것만큼이나 마음의 기색을 돌보는 일 또한 늘 “제자리에서 빛나고”(「정월 대보름」)있는 매일을 새로이 닦아내기 위한 방법임을 알게 된다.
소리 내어 읽으면 노래가 되고
마음속에 간직하면 시가 되는
신미나 시인은 싱고의 한뼘일기를 “일상에서 불현듯 반짝이며 찾아오는 착상의 순간에 대한 메모이기도 하고, 시로 가기 위한 에센스”(7면)라고 일컫는다. 오늘 불현듯 찾아온 리듬과 문장을 흘려보내지 않고 짧게나마 적어둔다면 노래 같은 일기는 어느 날 시로 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시인의 활달하면서 그윽한 언어를 빚어낸 시선과 습관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시를 웹툰으로 풀어낸 시툰 『詩누이』(창비 2017)를 통해 시 읽기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평가받는 싱고는『서릿길을 셔벗셔벗』에서 잠깐의 흥얼거림 또한 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어 이제 독자를 ‘시 쓰기’의 세계로 초대한다. 한번도 같은 적 없는 매일의 결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특별하게 기억하고 싶다면 작은 시인 싱고의 일기를 읽어보는 건 어떨까. 나를 둘러싼 것들에 오감이 활짝 열려 “순하고 심심한 하루”(「초당」)가 흐르는 속도를 고스란히 느끼는 경험과 함께, 그 순간을 오래 매만지기 위해 언제든 노래가 될 수 있고 언젠가 시가 될 한뼘의 일기를 써보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1부 겨울 일기
입동 立冬 / 둘이서 첫눈 / 두고 온 마음 / 주름 / 소설 小雪 / 수묵화 / 별똥별 / 겨울나무 / 대설 大雪 / 유자차 한모금 / 국화 발자국 / 찬비 / 수틀 / 동지 冬至 / 입맛 / 해돋이 / 근하신년 / 소한 小寒 / 배 / 눈길 / 살구 비누 / 대한 大寒 / 동장군 / 알쏭달쏭해 / 막내 / 따라쟁이 / 까치밥 / 정월 대보름 / 작별 인사 / 보풀
2부 봄 일기
입춘 立春 / 우수 雨水 / 해 뜬 뒤 / 눈꺼풀 / 초당 / 경칩 驚蟄 / 저녁밥 / 춘분 春分 / 강릉 관아의 매화 / 손 없는 날 / 화전 / 꽃의 행진 / 개나리 폭포 / 청명 淸明 / 식목일 / 영원한 순간 / 그 집 앞 / 곡우 穀雨 / 구름이 웅덩이에게 / 봄빛의 영롱 / 봄바람 / 노을 / 손바닥 / 오월의 종달리 / 안면도 바지락 / 아까시 꿀 / 인왕시장 모퉁이 / 김매기 / 태양의 조리개
3부 여름 일기
입하 立夏 / 소만 小滿 / 매실 / 민물 냄새 / 궁남지의 가랑비 / 망종 芒種 / 분꽃 폭죽 / 단오의 달빛 / 담장 옆 접시꽃 / 딱따구리 / 비녀 / 유월의 바람은 / 하지 夏至 / 아코디언 / 함흥냉면, 평양냉면 / 소서 小暑 / 초당 옥수수 / 태풍 / 꽃창포 / 서귀포의 파초 / 대서 大暑 / 엉겅퀴는 멍든 깃을 달고 / 첫사랑 / 소나기 / 연잎 방석 / 도라지 / 맨드라미 / 나팔꽃 / 할아버지 / 홈런볼 / 해바라기 / 허난설헌의 능소화
4부 가을 일기
입추 立秋 / 단꿈 / 곱창김 / 호두 한알 / 처서 處暑 / 가을볕 / 음치 / 홍옥 / 8월 31일 / 기쁨 / 백로 白露 / 비가 오려나 / 가을장마 / 잎사귀의 왈츠 / 주문진 가자미 / 추분 秋分 / 솔방울 / 간이역 / 티끌의 노래 / 가을 하늘 / 감 / 한로 寒露 / 억새 / 모과 형제 / 가을 유감 / 상강 霜降 / 서리 맞은 국화
누군가는 자연에서 ‘위로’나 ‘치유’를 떠올리겠지만, 어머니에게 자연은 치열한 노동의 현장이었습니다. 태풍이 지나가면 종아리에 붙은 거머리를 떼며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웠고, 땡볕 아래서 살갗이 벗겨지도록 풀과 씨름했습니다. 고된 일과를 보내면서도 길가에 핀 백일홍을 보면 걸음을 멈추고 눈을 맞추곤 했습니다. 어머니의 땅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과 대수롭지 않게 나눴던 이야기가 이 책의 거름이 되었습니다. (…) 자연의 생기와 신비를 구체적으로 실감하는 일이야말로 자연에 대한 감수성을 회복하려는 노력과 같다고 봅니다. 이러한 보살핌은 세상에 무엇 하나 하찮은 생명은 없다는 인식과 연결됩니다. 어쩌면 이 지점에서 우리는 사람과 자연의 관계회복을 위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한뼘일기를 썼습니다. (…) ‘한뼘일기’는 단구(短句)나 동요 같은 간결한 형식에 계절의 변화와 감미를 담은 기록입니다. 일상에서 불현듯 반짝이며 찾아오는 착상의 순간에 대한 메모이기도 하고, 시로 가기 위한 에센스라 불러도 좋습니다. 24절기를 칠정산 역법에 따라 시간의 흐름대로 배치했으나, 정해진 순서 없이 마음 가는 대로 읽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