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열린 길

사유.정동.리얼리즘

한기욱  평론집
출간일: 2021.12.03.
정가: 20,000원
분야: 문학, 평론

난해하지 않게 핵심을 짚어내는 최상의 평론집

 

 

 

 

 

섬세한 독해, 열린 생각, 당당한 마음

문학의 생생함을 구하는 창작과 비평의 자세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주간으로서 묵직한 문학비평을 활발히 이어온 한기욱 교수(인제대 영문과)의 두번째 평론집 『문학의 열린 길』이 출간되었다. 특유의 균형감 있는 섬세한 독해는 오래전부터 평단에 정평이 난바, 문학을 통해 사회를 읽어내는 시대감각 또 한번 날카롭게 갱신함으로써 최상의 완성도를 갖춘 평론집을 선보이게 되었다. 영문학자로서 외국문학에 대한 폭넓은 식견을 담아낸 점도 뜻깊은데, 그것이 서구중심으로 쏠리지 않고 유력한 이론과 비평에 맞서는 당당한 모습도 본보기가 될 만하다. 이번 평론집에는 한편의 글을 쓸 때도 모든 것을 쏟아붓는 저자의 정성스러움이 여실히 담겨 있다. 발표한 글들을 추리고 추려 이 책을 내기까지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것도 그 때문이다. 문학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작품에 대한 분별력, 대중문화 영역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저자의 방대한 관심사가 집약된 이번 평론집은 지금의 문학 독자들이 주목할 만한 귀감이라 할 수 있다.

 

 

 

각 시기 가장 주목할 작가와 작품,

문학이라는 창조적인 행위의 현재성

 

 

 

총 4부로 구성된 이번 평론집의 1부는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한국사회를 진단한다. 여기 묶인 글은 촛불혁명이라는 거대한 물결을 지나는 과정에서 쓰였는데, 저자는 촛불혁명이 일으킨 전환의 에너지를 긍정하면서도 그것이 현재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는 평가를 내린다. 이는 촛불반대 세력과의 대치라는 어두운 경색 국면에 주목한 「사유·정동·리얼리즘」에서 잘 드러나는데, 촛불혁명기 리얼리즘의 성과를 짚어내면서도 극단적 축적방식으로 전환한 자본주의적 현실이 “사유와 진리에 깨어 있는 일”(39면)을 어렵게 한다는 분석은 두고두고 뇌리에 남는다. 최근의 비평적 경향이 대체로 서구의 최신 이론을 척도로 삼아 지금의 한국문학을 일방적으로 분석한다면 한기욱은 이론과 작품 간의 쌍방향적 관계에 집중하는데, 이는 문학이 사회과학이나 철학 이론에 후행(後行)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열어가는 창조적인 행위라는 저자의 믿음에서 기인한다.

2부는 본격적인 작품론/작가론이다. 각 시기 가장 주목할 만한 소설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아볼 수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가부장제하의 여성차별 현실이나 노동자의 삶을 조명하는 비평적인 작업이 곡진하게 수행되었다. 2부에서 자주 등장하는 어구는 ‘현재성의 예술’이다. 「야만적인 나라의 황정은씨」에는 ‘그 현재성의 예술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우리 시대의 ‘객지’들」에는 ‘황석영과 김애란 소설의 현재성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각각 붙어 있는 것은 저자가 소설을 통해 가장 먼저 규명하고자 한 것이 현재성임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저자가 리얼리즘의 핵심을 ‘지금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으로, 저자를 통해 황정은 김애란 조해진 김금희 신경숙의 작품에서 확인되는 현재의 힘이 종요롭다.

 

 

 

논쟁과 시대론이 가미된

읽는 재미 가득한 평론집

 

 

 

장편소설론을 중심으로 한 3부는 당대의 논쟁이 가미되어 있어 특히 흥미롭다. 한국 소설문학의 침체를 장편소설 활성화로 타개해보자는 『창작과비평』의 주장은 ‘장편소설 해체론’ 등 반박과 그에 대한 재반박 등 흥미로운 논의를 이끈 바 있다. 저자는 차분한 어조로 비판론자들에게 조목조목 대응하는데, 그들의 탈근대적 성향이나 서구중심주의를 적절하게 논파해낸다. 비판에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 그들을 이해하려 하고, “중심의 논리를 속 깊이 이해한 다음에야 여러 모습의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실효적인 대응이 가능”(7면)하다는 저자의 말에서는 연구자와 비평가가 지녀야 할 미덕의 일단이 엿보이기도 한다.

4부는 세계문학/미국문학 평론을 모은 것으로 포스트모던 논자들(네그리와 하트, 지젝, 아감벤, 들뢰즈 등)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여기서 영문학자인 저자의 깊은 식견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뛰어난 필력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미국에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가 되풀이한 말에서 출발한 「“숨을 쉴 수 없어”」는 노예제라는 과거와 팬데믹이라는 현재를 넘나들며 미국의 체제적 인종주의를 분석하는데 그 과정에서 역사적 사건, 대중문화, 번역되지 않은 소설을 폭넓게 인용함으로써 새로운 지평으로 독자를 이끈다.

 

 

 

한기욱의 비평은 많은 내용을 담고 있으나 난해하지 않고, 핵심을 짚어내면서도 주변을 허투루 넘기지 않는 미덕이 있다. 작품의 내적인 형식을 세심하게 파악하면서도 시대 현실과 조응하는 ‘문학의 열린 길’을 탐구하는 폭넓은 시야는 당대의 비평가뿐 아니라 글 쓰는 모두가 참조해야 할 덕목이다. ‘문학주의자’라는 칭호를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저자의 문학 사랑은 평론집 곳곳에 스며 있는데, 그것을 확인하는 일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목차

책머리에

 

 

제1부

주체의 변화와 촛불혁명: 황정은・정미경・김금희의 소설들

사유·정동·리얼리즘: 촛불혁명기 한국소설의 분투

촛불민주주의 시대의 문학: 한강과 김려령의 소설들

문학의 열린 길: 어그러진 세계와 주체, 그리고 문학

 

 

제2부

한국 근대를 살아냈을 뿐: 신경숙 『아버지에게 갔었어』

야만적인 나라의 황정은씨: 그 현재성의 예술에 대하여

우리 시대의 「객지」들: 황석영과 김애란 소설의 현재성에 대하여

가족의 재구성: 가부장제와 근대주의를 넘어서

떠도는 존재의 기억과 빛: 조해진의 『빛의 호위』에 대하여

촛불혁명은 진행형인가: 『디디의 우산』을 읽고

 

 

제3부

기로에 선 장편소설: 최근 소설비평의 흐름에 대한 비판적 고찰

최근 소설과 비평의 지나친 탈근대적 성향이 불편한 이유

: 재반론―김형중 교수의 반론에 답하며

장편소설 해체론과 비평의 미래: 『문학과사회』 2013년 가을호 특집에 대하여

주변에서 중심의 형식을 성찰하다: 호베르뚜 슈바르스의 소설론

 

 

제4부

근대세계의 폭력성에 대하여: 멜빌의 『모비 딕』과 매카시의 『피의 자오선』

근대체제와 애매성: 「필경사 바틀비」 재론

로런스는 들뢰즈의 미국문학론에 동의할까?: 그들의 멜빌 비평에 대한 비교론적 연구

“숨을 쉴 수 없어”: 체제적 인종주의와 미국문학의 현장

 

 

찾아보기

 

저자의 말

지난 10년 동안 발표한 문학비평들을 묶어서 두번째 평론집을 내게 되었다. 특정 주제의 저서를 염두에 두고 기획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요구에 부응하는 글들이라서 한데 묶이니 꽤 다양한 모둠이 되었다. 그래도 각각의 글에서 감지되는 기본적인 발상과 정동, 현실인식이 서로 이어져 일관된 흐름을 이루기는 한다. 마감이 코앞에 다가와야 발동이 걸리는 글쓰기 습성 때문에 편집자를 애태우기 일쑤였지만, 나로서도 분투의 산물인 이 평문들은 집필 당시 문학과 세상에 대한 내 생각과 느낌을 증언하는 기록이다. 동시에 그 대다수는, 특히 한국문학 비평은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진의 협동적 산물이기도 하다. 계간 『창비』의 편집 부주간 혹은 주간직을 수행하면서 집필한 것인 데다 대부분이 『창비』의 ‘특집’이나 ‘문학평론’란에 발표되었고, 글의 구상에서 최종 원고에 이르기까지 창비 편집진의 집단지성적 역량에 크게 힘입었다. 이 글들을 쓰는 동안 한국 사회와 문학에 가장 심대한 변화를 불러일으킨 사건은 물론 2016년 말에 시작된 촛불혁명이다. 촛불혁명의 혁명성을 어디에 둘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나로서는 그 핵심이 박근혜정부의 탄핵과 정권교체 자체라기보다 그를 포함한 여러 종류와 층위의 기득권 장벽을 돌파함으로써 한국사회의 기본적인 체질을 바꿔놓는 일이라고 본다. 그러니 ‘촛불정부’를 자임한 정부 출범 이후에도, 그리고 촛불 5주년을 맞이하는 지금도 촛불혁명이 끝나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