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466

뿌리주의자

김수우  시집
출간일: 2021.11.12.
정가: 9,000원
분야: 문학,
전자책: 있음

“누군가의 가난, 누군가의 혁명이 네 거름이었다면

 

 

그래 거기를 아침이라고 부르자”

 

 

 

합리와 절망을 뛰어넘는 역설의 미학

 

 

삶의 근원을 향해 뻗어 내리는 단단한 시

 

 

 

 

 

삶의 모순을 치열하게 사유하며 특유의 서정적인 언어로 가난과 고통의 풍경을 그려온 김수우 시인의 여섯번째 시집 『뿌리주의자』가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2017년 최계락문학상 수상작 『몰락경전』(실천문학사 2016)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현재와 과거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치며 인간 존재의 근원과 삶의 본질을 탐구하는 통찰의 세계를 보여준다. “비약과 역설의 미학”(장은영, 해설)이 담긴 은유와 상징의 언어가 선명하게 빛나는 시편들이 매혹적이면서 묵직한 울림을 선사한다. 표제작 「뿌리주의자」를 포함하여 “살아 부풀어오르는 적막”과 “끝끝내 향을 피우는 꽉 찬 공허”(이정록, 추천사)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삶의 철학이 오롯이 녹아든 52편의 시를 묶어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이 시집의 근간을 이루는 정신은 ‘뿌리주의’이다. 이는 “내려가고 내려가면 히말라야 끝자락 수미산에 도착”(「하강」)하는 ‘하강’의 역설을 함축한 표현이다. 시인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현실 세계를 응시하며 삶의 기원이자 존재의 근원인 ‘뿌리’를 찾고자 “까맣게 잊어버렸던 원시”(「허리 디스크」)의 시간으로 비약하기도 하고, 자아의 세계를 벗어나 무한 공간과 접속하기도 한다. 구체적인 현실을 발판으로 삼아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도약하는 상상력은 곧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이자 부조리한 현실에 저항하는 실천적 사유의 흔적이다. 내면을 파고들며 끝없이 하강하는 사유의 과정에서 시인은 ‘진보’라는 명분 아래 물질적 성장만을 추구해온 인간의 비루한 역사를 돌이켜보며 “지구를 유령선으로 만든 자본”(「기점(起點)」)의 폭력에 짓눌린 가난한 현실을 냉철히 비판한다.

 

 

 

 

당신을 잊지 않으려는 시

잊지 않으려 앓는 시

 

 

 

“가난이 진화하는 방식”(「문어」)을 목격하는 시인은 한 사람이 가난으로 겪는 고통과 슬픔을 곡진하게 그려낼 뿐만 아니라, 가난을 방치하고 생산하는 체제의 불합리를 시의 언어로 낱낱이 밝히고자 한다. 이는 절대자를 향한 막막한 절규가 되어 울려 퍼지고, 문명과 그 이기를 누리는 자신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시인은 그 비탄과 반성을 절망의 언어로 적되, 절망 속에서 멈추지 않으려 누군가가 가난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또 묻는다. 그 간절한 물음 속에서 “뽑아내도 몰래몰래 자라는 혁명”(「고무발가락」)을 외면하지 않으려 애쓴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부산에서부터 쿠바까지 망각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 존재들을 기억하고 증언하면서 유구한 가난과 고통의 역사를 끊어낼 혁명을 꿈꾼다.

『뿌리주의자』에서 혁명이란 편협한 자아에서 벗어나 타자와 연결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다. 김수우의 ‘뿌리주의’는 “플라스틱을 삼킨 앨버트로스를 어떤 것에도 비유하지 말자”(「뿌리주의자」) 다짐하며 타자를 대상화하는 자기반성에서 벗어나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그의 시는 편리한 이론과 값싼 비유를 통해 지금 여기와 자기 자신을 고쳐 쓰려 하지 않는다. ‘무엇도 하지 말자’고 선언하는 ‘뿌리주의’는 현실을 비관하는 패배주의가 아니다. 이는 진보와 합리를 변명으로 하여 세계를 손쉽게 교정해왔던 폭력에 반대하는 강한 의지다. 자신의 욕망에서 벗어나 타자와 함께 전혀 다른 세계를 꿈꾸고자 하는 혁명의 시작이다.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뿌리는 결국 타자라는 기원에 다다라 “폐허가 된 영혼들”(「구름의 도시」)을 어루만지는 시인의 손길이 따뜻하다.

 

 

 

목차

제1부

 

칸나, 노란

하강

문어

뿌리주의자

소금 엽서

하필

해골

봉래산 마고

제의(祭儀)

변신 이야기

흔들의자

선생들

허리 디스크

 

제2부

 

아침

감자 싹

약력

가오리

빚을 견디는 법

안개 손톱

등짝

단추를 달다가

대추꽃

실,업

구름의 도시

환멸문(還滅門)

 

제3부

 

고무발가락

이승잠

중얼중얼

단풍 씨앗

물꽃 아래

작은 가방

비탈

유령의 딸꾹질

근대화슈퍼

기점(起點)

공범

고고한 대답

 

제4부

한바퀴

찔레

바위는 걷는다

청둥호박의 까닭

연각(緣覺)

한올의 실

묵은빚

서랍엔 영혼이 산다

신을 창조해놓고도

후두염

신단수(神檀樹)

키메라

훈장

 

해설|장은영

시인의 말

 

사막 모래를 쥐고 있는 풀뿌리 같다. 그 이미지의 실뿌리를 들어 올리면 그늘로 쌓인 설산이 나타난다. 뿌리 끝에 매달린 창문에 불이 켜진다. 커튼에 수놓은 낯선 무늬가 애써 의미를 짓지 않는다. 접힌 문양 한 귀퉁이를 당기면 세상 어딘가에서 울음이 새어나온다. 관계를 놓치지 않는 존재들. 존재 안에 응축된 눅눅한 문장들이 주문을 왼다. 마을버스 낡은 스피커에 들어가보지 못한 뉴스가 있나? 지렁이 입에 들어가보지 못한 흙이 있나? 물고기 창자를 통과해보지 못한 바닷물이 있나? 네발짐승의 허파를 훑어보지 못한 바람이 있나? 구멍 숭숭한 뼈 피리를 불어보지 못한 한숨이 있나? 김수우 시는 폐허를 어루만지는 가슴우리에 징글징글한 희망 한단을 내려놓는다. 닳고 닳으며 굴러온 살덩이에게 풀풀 살아나는 마른미역을 선물한다. 살아 부풀어오르는 적막을. 끝끝내 향을 피우는 꽉 찬 공허를. 이정록 시인

저자의 말

발원지를 기억할 수 있을까. 녹슨 칼로 새긴 목판의 오래된 글씨처럼 어줍은 이상주의자. 등뼈를 곧추세우려던 공룡 같은 날들, 모두 혁명을 소비했을 뿐. 두개골 뒤통수에서 돋는 실뿌리가 저릿저릿하다.   창틀 위로 차오르는 방울벌레의 울음은 몇번의 허물을 벗었을까.   파이고 파인 서사들이 부스럼투성이지만 도둑질한 꿈도 언어도 부유하는 비닐처럼 떠돌지만 뿌리는 안다. 이상이 현실을 바꾼다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세계를 업고 있다는 것을. 바람의 대합실에 저녁불이 들어온다.   미얀마의 눈물은 나의 제국주의 때문이다. 한발 내디딜 땅도 바다도 내가 버린 쓰레기로 가득하다. 미안하다.  

2021년 11월

김수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