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부르면 기대하게 된다
온 세상을 다 채우고도 모자라 지워버릴 수도 있을 거라는 예감”
가벼운 산책을 하며 꺼내보는 낯설고도 아름다운 이름들
새로운 가능성을 부르는 투명한 목소리, 이종민 첫 시집
2015년 작품활동을 시작한 뒤 대상을 바라보는 섬세한 시선과 선명한 감각이 어우러진 개성적인 어법의 시세계를 찬찬히 다져온 이종민 시인의 첫 시집 『오늘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가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날카로운 관찰력과 정밀하고 투명한 언어로 지나온 삶의 흔적들을 담백하면서도 은근한 목소리에 담아낸다. 또 때로는 “중요한 말을 빼놓고 지속”(시인의 말)되는 삶의 진실한 의미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현실 세계를 인식하는 시적 사유의 힘과 “모든 것이 낯선 존재와 하나가 되어가는 탐색의 과정”(이수명, 추천사)이 정교하게 드러나는 진솔한 시편들이 울림 속에서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침묵의 언어로써 삶의 순간순간을 관조하며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이종민의 시는 “현실을 향한 비애”이거나 “슬픔이나 우울의 작은 조각”(최현우, 발문)과 같다. 시인은 시의 문장과 문장, 행간과 행간 사이마다 침묵을 문장부호처럼 찍어두고, 일상의 복잡다단한 감정의 편린을 침묵 속에 숨겨둔 채 “그대로 두기로” 하면서 “자, 이것이 내 마음입니다”(「정원사의 개인 창고」)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무거운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에게만 닥친 특별한 불행이 아니기에, 누구나 겪는 일상의 풍경을 과장하거나 왜곡하지도 않는다. 다만 “험한 벼랑이 이어”지고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결국 그렇게 되고야 마는 일들”(「초입에서 발견된 페이지」)이 지속되는 삶의 장면들을 세심히 관찰하고 기억 속에 온전히 새겨둔다
익숙한 풍경에 메아리치는 낯선 예감
그 산뜻한 울림에서 시작하는 맑고 넓은 미래
“내일을 꺼내려 하면 어제의 보풀이 일어”나고 “손을 넣었다 빼면 뒤집히는 주머니”(「가벼운 외출」) 같은 ‘오늘’을 살아가는 삶은 인생의 거친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다. 그래서인지 이 시집에는 ‘물’이 자주 등장하고, 다양한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침묵의 시간을 끈질기게 견뎌온 시인은 “물은 색이 없”지만 “물의 색은 많다”(「연쇄」)는 깨달음에 이른다. “파도 뒤에는 더 큰 파도가 있”(「바다를 건너는 일은 지구를 이해하는 일이 되지 않는다」)고 “바다는 결코 잠잠해지지 않을”(「가늠하다」)지라도 시인은 기꺼이 그 바다를 건너 미래로 나아가고자 한다.
삶에 대한 시인의 성찰과 감각은 “벽 너머의 존재”(「투서」)를 응시하고, “‘아름다운 노을’과 ‘노을이 아름답다’의 차이를 생각”(「찢어진 페이지」)할 만큼 예민하고 냉철하다. 침묵의 언어로 통증의 시간과 삶의 흔적들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이 ‘시의 집’에서 시인은 “지금의 나는 좋아지는 중”(「기지개를 켜다」)이라는 긍정의 마음으로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은”(시인의 말) 삶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누군가 꾸어야 하는 악몽을 대신”(「정원사의 개인 창고」) 꾸기도 하면서 “언젠가 당신으로도 살아보기를 희망”(「나를 위해 쓰인」)한다. 그러니 생의 비밀을 찾아가는 시인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에서 ‘이름’은 대상을 다른 무엇과 구별하기 위해 쓰이는 말이 아니다. 이름을 부르는 일은 고정된 의미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조심스레 꺼내보는 일이다. 이 시집과 함께 독자는 늘 익숙하게 느껴지는 계절과 멈춰 있는 것만 같은 숲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보게 된다. 그럴 때 지난가을 혹은 먼 산의 숲은 생생한 실감을 지닌 울림이 되어 다가온다. “뜻이 없고 소리만”(「말을 걸어오는 나무 2」) 남은 그 이름들은 낯선 예감이 되어 우리의 삶에 고요히 메아리친다. 이 맑고 산뜻한 울림 속에서 독자는 다른 의미나 목적을 붙잡기 위해 헤매지 않아도 된다. 이종민의 시가 만들어내는 “온 세상을 다 채우고도 모자라 지워버릴 수도 있을 거라는 예감”을 쥐고서, 우리는 ‘가벼운 산책’을 언제까지나 이어나갈 수 있다. “마음에 대한 일도 답을 찾아야 하는 세상”(「보호색」)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미로 속이지만 끝내는 진실을 알게 되리라는 믿음을 간직하고서 조심조심 걸어나가는 ‘침묵의 투어리스트’(최현우, 발문) 시인의 발소리가 사뭇 경쾌하다.
제1부
트랙
가늠하다
투서
투어리스트
목도
그림자밟기
아무도 보여주지 않은 그림
호시절
그린 그림
연쇄
중턱에서 발견된 페이지
수와 기대
지금부터 숨 참으세요
하(霞)
찢어진 페이지
정원사의 개인 창고
제2부
가벼운 외출
보호색
메시지를 남겨주세요
야생의 마음
주인은 힘이 세다
입술을 빌려서
파티
예감은 틀리지 않아
식탁의 최선
교통과 재난
테이블
놓고 오기
없는데 있어
개점휴업
심령사진
대합실
밥무덤
착하고 쉬운
200529
레이트 체크아웃
주말
제4의 벽
노래가 시작되면
제3부
초입에서 발견된 페이지
보호색
기념
우리를 말하면 멀어지는
언젠가 당신도 죽겠지요
부르는 사람
따라 부르는 사람
혁명은 사랑에서부터
말을 걸어오는 나무 2
띄어쓰기
기지개를 켜다
보호색
나들이
그림의 뒷면은 언제나 비어 있고
우리가 문장이라면
히든 페이지
바다를 건너는 일은
지구를 이해하는 일이
되지 않는다
메아리가 울린다
당신이 이겼어
나를 위해 쓰인
투서
발문|최현우
시인의 말
언젠가부터 말을 걸어오는 그가 있습니다. 그를 알기 위해 산을 오르기도 하고 무작정 걷기도 했습니다. 파란 숲에서 먼 미래까지 다녀오기도 했고요. 바다에서 노을이 지는 모양과 물방울이 웅덩이에 닿는 순간을 오래 간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몸에 묻은 것들도 많습니다. 주워서 요긴하게 쓰다 남은 것들도 있습니다. 그와 비슷한 사람을 많이 만났지만 모두 제가 찾던 그는 아니었어요. 그렇게 만난 좋은 사람들이 많아요. 때로 삶은 중요한 말을 빼놓고 지속되기도 합니다. 이 책에는 그런 일들만 쓰여 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인사를 건네고 있었어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은데 작별입니다. 우리가 문장이라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2021년 10월 이종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