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464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

정다연  시집
출간일: 2021.10.08.
정가: 9,000원
분야: 문학,
전자책: 있음

제각각인 서로의 빛깔을 가끔 확인하면서

 

 

우리, 이 걷기를 포기하진 말자

 

 

 

읽는 이의 가슴을 지그시 누르는 다정한 언어

 

 

가지런하게 나와 세계를 연결하는 징검다리 같은 시

 

 

 

 

 

세상을 응시하는 예민한 감각과 탁월한 시적 감수성이 돋보이는 단정한 시 세계를 펼쳐온 정다연 시인의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가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2015년 『현대문학』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선보인 소시집 『내가 내 심장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니까』(현대문학 2019) 이후 2년 만에 펴낸 이 시집에서 시인은 “정돈된 아름다운 언어들”(조대한, 해설)로 세계에 만연한 폭력과 거기에 굴하지 않는 연대의 마음을 펼쳐낸다. 미래를 낙관하지도, 그렇다고 현재에 좌절하지도 않는 이 시들은 “읽는 이의 가슴 복판을 지그시”(박연준, 추천사) 누르며 공공연한 차별과 편견을 함께 이겨내는 걸음에 독자를 동참시킨다.

 

정다연 시인은 뉴스나 전시회, 길을 가다 만난 사람, 공간을 함께 사용하는 동물과 식물 등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통념을 깨고 무심히 해오던 행동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시인이 특별한 애착을 느낀다고 밝힌(아래 인터뷰 참조) 「에코백」은 대표적인 예다. 공정무역으로 유통된 커피를 마시고 “최저가 에코백”을 덤으로 받은 화자는 최소한을 최선이라고 여기는 세태가 과연 정의로운지 되묻는다. 그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서울 한복판에서 불합리한 구조조정에 항의하며 칼을 휘두른 어떤 사람에게까지 가닿는다. 나의 작은 깨달음으로 남의 우위에 서기보다는 그 깨달음을 통해 세계의 부조리를 새롭게 돌아보는 것은 이 시집의 미덕이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공공연한 차별과 부조리를 말하면서도 가르치거나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감각적인 이미지와 냉정하면서도 섬세한 언어들은 병든 사회의 환부를 날카롭게 찌르지만 다른 존재를 훼손하는 법이 없다.

 

 

 

춥고 낯선 세계,

당신의 비명을 외면하지 않는 시

“맑게 퍼지는 주문 같은 정다연의 목소리”

 

 

 

이 시집에는 손쉬운 위로 또한 없다. “힘을 빼 그러지 않으면 더 아파” 같은 충고는 “쉴 틈 없이 때리는//다정한 말”일 뿐임을 알기 때문이다(「크럭스」). 정다연 시의 “비밀”은 “거리 조율”에 있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추천사), 함께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메시지가 시집 이곳저곳에서 발견된다. “나의 너무 많은 최선이 식물을 괴롭히지 않도록//거리를 둔다”(「셰플레라」)라거나 “아주 커다란 침대를 사자. 서로의 윤곽이 마음껏 흘러갈 수 있도록”(「가정」) 같은 구절은 그래서 더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시인은 “네 곁에 다가갈수록” “널 다치게” 할지도 모르는 잠재적 가능성을 알고 있다(「익스트림 클로즈업」). 이는 무언가를 피사체로 두고 언어를 세공하는 시인이 지녀야 할 윤리와도 통하는 바가 있다.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를 읽다보면 어느새 타인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밥과 약을 잘 챙겨 먹고”(「흑백필름」) 스스로의 일상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가능할 때 비참한 삶의 벼랑 끝에서 무수히 쏟아지는 “당신의 비명”(시인의 말)을 외면하지 않을 수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시집을 “읽으면, 마지막 장에서 열 개, 스무개, 서른개의 발자국이 종이 바깥까지 계속 이어져 펼쳐지는 장관을 볼 수 있다.”(추천사) 세상의 편견과 부조리에 저항하는 따뜻한 방법을 독자들이 나눠 가지게 되기 때문인데, 이것이 바로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 갈 수 있는 힘이다. 혼자의 삶을 우리의 삶으로 묶어내는 정다연 시의 무궁무진한 가능성도 이 힘 안에 숨어 있다.

 

 

 

정다연 시인과의 짧은 인터뷰

 

 

 

- 이번 시집으로 정다연 시인을 처음 만나게 될 독자들을 위해 간단히 자기소개를 해주실 수 있을지요. 평소의 일상 그리고 시를 쓰는 날들에 대한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시를 쓰는 정체성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2년째 유튜브 채널 「문장입니다영」의 진행을 맡고 있기도 하고, 계절마다 우편을 보내주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가워요. 저는 단출하게 살아가고 있어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반려견 밤이와 산책하고 도서관에 출근합니다. 최근에는 시 말고도 에세이와 장편 동화를 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시를 쓸 때는 굉장히 부지런해져서 책도 많이 읽고 산책도 열심히 합니다. 먹을 것도 잘 챙겨먹고요. 시를 쓰는 건 여러모로 힘이 드는 일이지만 최대한 건강하고 기쁘게 또 치열하게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시 「익스트림 클로즈업」의 구절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를 시집의 제목으로 삼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제목을 어떻게 짓게 되었을까요?

 

 

 

쓸 때만 해도 이 구절이 시의 제목이 될지는 몰랐어요. 수십번 읽어보고 수정하면서 나름대로 제목을 상상해보기도 했는데, 그때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거든요. 이 제목은 편집자 선생님께서 추천해준 제목 중 하나였습니다. 제목을 보는 순간 이거다! 했는데, 놀라웠어요. 시를 쓴 저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한조각을 타인이 건네주는 것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이 시집이 저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다시 깨닫게 되었어요. 서로에게 기대서 미지의 곳으로 끝까지 걸어가보는 일, 타인이 건네주는 가능성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고립된 자아를 허물어 개방하는 일이요. 혼자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제목을 누군가가 열어준 것처럼, 이 시집도 다른 사람에게 그런 시집이 될 수 있다면 정말 기쁠 것 같습니다.

 

 

 

- 초판 한정 커버에 실린 문구 “불현듯 건너편의 사람은 당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도 시의 일부(「천사가 지나가는 동안」)인데, 이 구절이 탄생하게 된 계기도 궁금합니다.

 

 

 

이 시의 화자는 혼자만의 생각에 깊이 잠겨 있는데. 그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골몰하는 동안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자신을 건너편의 누군가가 바라보고, 발견해주는 장면을 생각하며 썼어요. 이렇게 쓰고 보니 시집 제목의 맥락과 묘하게 겹쳐지는 듯합니다. 나로서는 발견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타인이 발견해주는 그 순간 또다른 세상이 열린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귀한 순간이 있을까 싶고, 이 시집을 펼친 분들에게 가장 먼저 건네고 싶은 말이어서 정하게 되었습니다.

 

 

 

- 시집 맨 앞에 실린 반려동물에게 보내는 헌사가 인상적이었어요. 책에 이 문구를 넣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하게 되었을까요?

 

 

 

사실 가장 먼저 정한 게 이 헌사였습니다. 이 문구를 넣겠다는 결정은 단 한번도 흔들린 적이 없어요. 첫 시집 출간 직전에 반려견 아롱이가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시기를 통과하는 것이 무척 괴로웠어요. 아롱이가 첫 시집을 준비하는 동안 저를 떠나지 않고 지켜준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느낀 것은, 그들이 느끼게 해준 사랑이 어느 누구에게도 받아보지 못한 방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떠나보낸 것은 너무 마음이 아프지만 그들이 안겨주고 간 큰 사랑이 있기에 그 온기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고요. 이 시집을 쓰는 동안 저는 인간의 힘으로만 서 있지 않았습니다. 아롱이가 제게 남겨준 것, 지금 함께 생활하고 있는 반려견 밤이가 제게 보태준 커다한 힘이 있기에 서 있을 수 있었어요.

 

 

 

- 표지화를 직접 그렸다고 들었습니다. 평소에 그림을 좋아하시는지, 그림을 그릴 때와 시를 쓸 때의 정다연 시인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합니다.

 

 

 

아롱이가 떠나고 나서 슬픔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 그림을 배웠습니다. 그 인연이 계속 이어져서 지금은 일년 넘게 화실에 다니고 있어요. 일년간은 아롱이만 그리다가 요즘에 코끼리도 그려보고, 닭도 그려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는 법도 배우고 있어요. 시를 쓸 때는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요.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물어봅니다. 그림을 그릴 때는 물음을 갖기보다는 제가 그리고 있는 대상에 온전히 집중합니다. 내가 한 존재를 이렇게까지 관찰한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 같아요. 그리는 대상의 털은 어떤 결로 흐르는지, 바람과 빛의 방향은 어떠한지, 무늬는 어떠한지요. 그렇게 그리다보면 어느새 그리고 있는 대상에 깊이 애착을 느끼게 됩니다. 시 쓰는 정다연이 온전히 스스로에게 집중한다면 그림을 그리는 정다연은 대상에 집중한다는 점이 다른 것 같습니다. 물론 극과 극이 닿아 있듯 서로 만나게 되기도 하지만요.

 

 

 

- 이번 시집에서 특별히 애착을 느끼는 작품이 있다면 소개와 이유를 부탁드립니다.

 

 

 

무척 어려운 질문인데, 제가 쓴 시에 애착이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정말 그 시를 좋아하는 건지, 남이 좋다고 하니 그 시가 좋아진 건지 잘 구분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그럼에도 하나를 들자면 「에코백」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쓰면서 제 세계가 변화하고 있구나, 확장되고 있구나 몸으로 많이 느끼기도 했고요. 변화하는 제 세계에 대한, 작지만 귀중한 믿음을 실어준 작품이어서 애착이 가요.

 

 

 

- ‘시인의 말’에서 “언제까지고 자랄 수 있을 것 같다/수많은 눈을 뜰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게 그만큼의 눈이 있다는 걸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라는 구절을 읽고 시인의 미래가 궁금해졌습니다. 앞으로의 활동 방향이나 삶의 계획 등이 궁금합니다.

 

 

 

시인의 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습니다. 사실 이 시는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해요. 제가 누군가에게 이런 편지를 보낼 수 있게 된 것은 그 사람뿐만 아니라 저를 스쳐간 무수한 타인들이 제게 보내준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혼자 서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많은 존재들의 도움을 받고 있어요. 그것을 잊지 않고 세상과 접해있는 내면의 눈을 하나씩 떠가는 것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제게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더 많은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언젠가 지면에서 저는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쓴 적이 있어요. 세상에 대한 상상력, 타인에 대한 상상력을 포함해 자신에 대해서도 더 많은 상상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싶습니다. 달리는 사람에게 땅이 확장되듯이 먼 곳까지 가보는 넓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목차

제1부 깜빡 졸았다 세상의 중심을 향해

홀리데이

에코백

전쟁과 테러

새비징

크럭스

층간소음

이사

표백

동락

국경일

 

제2부 지금은 상영할 수 없습니다

커트 피스

무기력

빌딩

전환

지금은 상영할 수 없습니다

세번 울어라

어항

유기

셰플레라

 

제3부 양 눈에 가득 담긴 구름의 방식으로

あなたが日本人だったらもっとよかったのに

러프 컷

버닝

알전구

여자는 시베리아허스키를 키울 수 없다

성지순례

제라늄

사랑의 모양

네가 둥근 잔에 입술을 댈 때

가정

여진(餘震)

 

제4부 눈물이 무한대로 가득 차서 우리는 부력으로 떠오를 수 있다

유리로 만든 관

큰 새장

흑백필름

어머니가 어렸을 적에

분갈이

얼음

사람들

흙먼지

월화수목금토일

천사가 지나가는 동안

익스트림 클로즈업

호명되지 않는 기쁨

우리 걷기를 포기하진 말자

 

해설|조대한

시인의 말

누군가를 알고 싶다면 그가 ‘비밀을 보여주는 방식’을 주목해야 한다. 정다연 시의 비밀은 제목과 시 사이의 ‘거리 조율’에 있다. 그는 이 거리를 자유로이 조율한다. 이때 시의 음색이 탄생하고, 언어가 지나다닐 징검다리가 놓인다. 중요한 건 보이는 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그가 계속해서 가고 있다는 믿음”(「커트 피스」)이다. 화자들은 미리 기뻐하거나 미리 슬퍼하는 법 없이 ‘적당한 때’를 기다려 방 안에서 홀로 피고 진다. 언어는 섣부름이 없다. 명확하고 단정하며 날카롭다. 읽는 이의 가슴 복판을 지그시 누른다. 정다연은 “시가 눈에 보인다면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데 전부를 쓸” 사람, 그리하여 “시가 눈에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셰플레라」), 보이지 않는 걸 하염없이 바라보아 고단해진 사람처럼 보인다. 그의 시엔 이런 게 들어 있다. 혼자 자라는 어두운 열매, 빛 없는 눈부심, 땅 없는 광야, 고요한 광활함. “빛과 바람을 주세요/나는 내 방을 뒤덮는 이 어둠보다 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어요”(「분갈이」). 맑게 퍼지는 주문. 농담 속 진담. 진담 속 농담. 이 시집을 읽는 일은 “불타는 연필을 지켜보는”(같은 시) 일, “가두어놓을 수 없는 바람”(「호명되지 않는 기쁨」)에 기대어 잠시 날아보는 일, “울 마음이 없어서//웃는 사람”(「지금은 상영할 수 없습니다」)을 생각하는 일이다. 제대로 읽으면, 마지막 장에서 열개, 스무개, 서른개의 발자국이 종이 바깥까지 이어져 펼쳐지는 장관을 볼 수 있다(「우리 걷기를 포기하진 말자」). 그 발자국을 따라, 같이 가고 싶다. 계속. 계속. 걷고 싶어진다. 박연준 시인

저자의 말

잿더미 속에서 한쪽 눈을 뜬다 따뜻하다

나는 처음으로 스스로 태어나라고 나의 잠의 껍질을 지키며 깨부수지 않는 자가 있다는 걸 믿을 수 있다

허공에서 또다른 눈을 뜬다 아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작아서

문을 열고 길을 나서는 당신을 바라보는 금 간 담벼락이 언제나 먼저 당신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 거기에 서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지만

당신은 모르는 당신의 긴 그림자가 가끔은 담벼락에 먼저 닿기도 한다는 걸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눈을 뜬다 당신의 신발 밑에서 당신의 비명이 잠든 화병의 고요함 속에서 잔디처럼

언제까지고 자랄 수 있을 것 같다

수많은 눈을 뜰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게 그만큼의 눈이 있다는 걸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눈을 뜬다 여기서라면 아침보다 먼저

내가 아닌 다른 마음을 향해 편지를 쓰는 손이 있다는 걸 믿을 수 있다

2021년 가을 정다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