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462

수평으로 함께 잠겨보려고

강지이  시집
출간일: 2021.08.17.
정가: 9,000원
분야: 문학,
전자책: 있음

물처럼 투명히 빛나는 날들이 지속되지 않아도

 

 

그곳이 어디든 이렇게 서 있을 수 있다

 

 

궤도 안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는 빛나는 생활의 감각

 

 

충만한 미래를 향한 젊은 시인의 다채로운 시선

 

 

 

2017년 중앙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강지이 시인의 첫 시집 『수평으로 함께 잠겨보려고』가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등단 4년 만에 펴내는 첫 시집에서 시인은 “설치 작가의 설계도를 방불케 할 정도의 참신한 공간”(장석남, 추천사) 안에서 자유롭게 뻗어나가는 시적 상상력과 감성적 언어로써 삶의 흔적들을 다양한 이미지로 변주하면서 ‘지금-여기’와는 다른 시간과 공간의 문을 열어젖히는 이채로운 시편들을 선보인다. 독특한 화법과 개성적인 목소리뿐만 아니라 형식 면에서도 행과 행 사이를 과감하게 건너뛰는 여백의 공간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삶의 풍경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감각과 시선은 색다르다. 시인은 “나는수평으로함께잠겨보려고합니다”(「VOID」)라고 말하면서 ‘지금-여기’의 현실 안에서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이루어내고자 한다. “상한 우유 냄새”와 “따뜻한 밀가루 냄새”(「여름」)가 공존하던 어느 한 순간의 추억을 단지 재현하는 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이면에서 숨 쉬는 존재들을 다시금 불러내어 세계를 탐색해나간다. 시인은 “물처럼 투명히 빛나는 날들이/지속되지 않아도” “발이 들어맞을 수만 있다면//그곳이 어디든 이렇게/서 있을 수 있다”(「설국(雪國)」)는 긍정의 마음으로 내일을 향해 시선을 옮겨간다. “빛나는 물”(「궤도 연습 3」) 위를 “고요하게 헤엄치는 나뭇잎과 나뭇가지”(「수영법」)처럼 뻗어나가는 자유로운 생각들을 펼치며 삶의 변화를 꿈꾸는 새로운 이야기를 써나간다.

 

삶의 일정한 틀에 갇힌 채 살아가는 시인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이상한 일들이 매번/일어나는”(「명랑」) 현실 상황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수압」)라고 말한다. 때로는 “부당하다 느껴도 아무 항의를 할 수 없고 해도 소용이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렸”(「초록의 뼈」)다는 비애감에 젖기도 한다. 그렇다고 절망에 빠져드는 것은 아니다. “성능 상태 60% 미만”인 무력한 상태에서도 시인은 “남아버린 그 거대한/시간들을 나는//지내야 한다//꺼지지 않아야 한다”(「Plastic Home ground」)는 의지를 다진다. 그와 함께 삶을 옭죄는 틀에 틈을 내면서 “오늘은 내가 매번 살아 있고/그것이 이상하다는//생각을 시작/시작//시작한다”(「수압」). ‘시작’이라는 말이 행을 달리하여 세번이나 쓰인 이 독특한 어법을 문학평론가 김태선은 “생각을 시작(始作)하고 시작(試作)하고 시작(詩作)한다”로 해석한다.

 

시인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물속에서/잃어버린 것을/나무 속에서 찾는 사람”(「설국(雪國)」)이라 했으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려는 것은 아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더이상/얽매여 슬퍼하지/않”(「바다비누」)기로 하면서 현재 속에서 “열심히 무엇을 쓰려고”(「비가 지나가면 알림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시집 마지막에 이르러 여백으로 표현된 ‘큰 공간’과 만나게 된다. ‘VOID’는 빈 공간을 뜻하는 건축 용어이다. 그러나 시인이 구성해낸 이 공간은 단순히 텅 비어 있는 곳이 아니다. 다양한 형태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삶의 본질과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는 잠재성의 공간이다. 미래를 향해 열린 이 ‘시작’의 공간에서 시인은 “어떻게든,/아무쪼록/잘 살자”(「VOID」)는 간절한 소망과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고, 또 있었더라도/우린 앞으로 잘 달릴 수 있다”(시인의 말)는 믿음을 간직한 채 새로운 마음으로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진실한 삶을 꾸려나갈 것이다.

목차

제1부

 

 

여름

새의 밤

한눈팔기

VOID

산책

서랍

수영법

궤도 연습 1

그림자 극장

베개

그리고 너는 생각했다

명랑

Plastic Home ground

통로

야간비행

궤도 연습 2

수술

남겨진 사람들

망원경과 없는 사람

구구의 약력

궤도 연습 3

이곳에서 보는 첫번째

 

 

 

제2부

 

초록의 뼈

Mobiles

수압

자장가

VOID

Turquoise

돌고래

밤나무 뒤 동물의 형형한

비가 지나가면 알림을

바다비누

LEGO

사찰 가는 길

설국(雪國)

궤도 연습 4

캠핑 일기

여름 샐러드

겨울

VOID

 

 

 

해설|김태선

 

시인의 말

일찍이 강지이의 등단작 「수술」을 읽은 적이 있다. 그 ‘폐허’가 과연 그의 것인가 할 정도로 놀랐고 그 조숙한 ‘아이’의 정체가 내내 궁금했었다. 첫 시집을 일람해보니 알 듯했다. 그는 유년기에 ‘동네 횟집 수족관의 물고기’를 친구로 사귄 이래 멈출 수 없는 폐허론자였으리라 추측해본다. 그러나 그가 “보석 안쪽으로 서둘러 사라지는/물고기의 꼬리를 본다”(「Turquoise」)고 독백할 때 그 폐허의 매혹은 우리가 해설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강지이의 시는 설치 작가의 설계도를 방불케 할 정도의 참신한 공간을 무심한 듯, 심드렁하게 구성한다. 관객인 우리는 그가 해석하여 넌지시 제시하는 공간을 따라가면서 그가 설치해둔 ‘벽’과 ‘창’을 통해 처음 보는 ‘여름들’을 만끽한다. 여름이란 무섭게 자라나는 ‘폐허’가 아니던가. 그의 시는 우리 생애의 여름이 우리가 아는 그 성장이 아니라 ‘무성해지는 폐허’는 아닌지 자문하게 한다. “너무 밝은 것은 함께 갈 수 없다”(「궤도 연습 3」)는 선언이 아름답다. -장석남 시인

저자의 말

여름 샐러드를 먹으면서 흰 눈이 쌓인 운동장을 함께 달리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고, 또 있었더라도 우린 앞으로 잘 달릴 수 있다. 그런 믿음은 이상하게도 잘 사라지지 않는다.  

2021년 여름 강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