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간절한 것에 끝은 없을 것입니다”
살게 하는 말과 쓰게 하는 말에 대한 끝없는 질문
맑고 단단해서 더욱 아름다운 천양희의 시세계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후 고독한 삶의 처절한 고통을 진솔한 언어로 승화시켜온 천양희 시인의 아홉번째 시집 『지독히 다행한』이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삶에 대한 끝없는 질문과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이 깃든 관조와 달관의 세계를 펼치며 서정시의 정수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오랜 세월 “지독한 소외와 뼈아픈 고독”(시인의 산문)을 겪어온 시인이 삶의 뒤편을 꿰뚫어보는 섬세한 시선으로 빚어낸 시편들이 뭉클한 감동을 자아낸다. 오롯이 시인으로 살기 위해, 시를 찾아 “머리에서 가슴까지/참 먼 길”(시인의 말)을 걸어온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동안 겸허한 마음으로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된다.
고통과 절망으로 얼룩진 삶의 절실한 체험에서 길어올린 천양희의 시에는 고독과 고립의 적막함과 외로움이 서려 있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시란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고독에 바치는 것”(시인의 산문)이라는 말에 공감하게 된다. 그러나 시인은 삶의 비애 속에서도 나약함을 보이거나 헛된 감상에 빠지지 않는다. “실패의 경험이라는 보석”(「몇번의 겨울」)을 간직하고 있기에 고통과 상실의 시간을 “견디는 자만이 살 수 있다”(「견디다」)는 비장함을 가다듬으며 “별똥별처럼 떨어지는 슬픔”(「공부하다가 죽어버려라」)을 어루만진다. “고독을 밥처럼 먹고, 고(苦)와 독(毒)을 옷처럼 입어본” 시인은 “고독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어 고고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고독은 누구의 접근도 사절하는 것”(「고독을 공부하는 고독」)이기에 “남의 고통 앞에 ‘우리’라는 말은 쓰지 않”(「의외의 대답」)는다.
아주 평범한 언어로 마음을 울리는 시인의 독백
고독과 슬픔을 안고 빛나는 간절함으로 삶을 일으키는 시쓰기
천양희 시인은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매력적이다. 섣부른 기교를 부리지 않으면서도 “아주 평범한 말로/마음을 움직”(「몇번의 겨울」)이는 독특한 어법을 구사한다. 기교나 수사가 없는 대신 “말의 선택, 말의 표현, 말의 운용”(시인의 산문)에 섬세한 공력을 들인다. 특히 나직하게 내면을 울리는 독백의 말투 외에 동일한 어구의 반복, 동음이의어와 유사어의 변용 같은 표현법이 두드러진다. 이를테면 “우울만큼 깊은 우물”(「제각기 자기 색깔」), “손아귀로 아귀를 뜯으면서”(「비 오는 날」), “일흔은 무엇인가 잃은 나이”(「일흔살의 메모」), “따지는 삶 말고 다지는 삶”(「수락 시편 2」), “고개와 고비의 높음”(「달맞이고개에서의 한 철」) 등의 문장에서 언어의 폭을 넓혀 새로운 의미를 끌어내는 심오한 뜻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시인은 일상 속에서도 일상 너머를 봐야 하고 그 속에서도 상식적 감각을 버려야 한다”(시인의 산문)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반세기가 넘는 시적 연륜이 느껴지는 ‘시인의 산문’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론을 차분하게 펼친다. ‘시란 무엇인가,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시인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탐색이 담겨 있다. “시와 소통할 때 가장 덜 외롭다”는 시인은 “빛나게 살기 위해, 잘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잘 산다는 것’은 물질적 풍요로움이 아니라 “시로써 나를 살린다는 뜻”이다. 시인은 “죽기 살기로 세상을 그리워”(「마침내」)하는 간절함으로 시를 쓴다. 그렇기에 “세상에서 제일 몹쓸 것은/오늘을 함부로 낭비한 사람/낭비하고도 내일을 가질 것 같은 사람”(「아무 날도 아닌 날」)이라는 말이 절실하게 와닿는다.
오랜 공백기를 지나 등단 18년 만에 첫 시집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평민사 1983)을 펴내며 시작(詩作) 활동을 재개한 시인은 “시를 쓰지 못하던 시절이 가장 불행했다”고 말했다. 시를 쓰는 일이 “고통스럽고도 피 말리는 일”이라 할지라도 시인은 “살아 있어 시를 쓰는 것만으로도 지극한 기쁨이 된다”(시인의 산문)고 여긴다. 올해로 등단 56년, 시인의 나이 어느덧 여든 고개, 생(生)의 후반에 이른 시인은 “오래 살기를 바라면서 늙어가지는 않겠다”(「너무 많은 생각」)고 다짐한다. “긴긴 겨울이/주먹 속에 봄을 움켜쥐고 있”(「아무 날도 아닌 날」)는 희망의 빛을 보며 시를 “세상의 헛것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방책”으로 삼아 “사람의 상처를 꽃으로 피우기 위해”(시인의 산문) 쓰고 쓰고 또 쓸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죄없는 일이 시 쓰는 일”(『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시인의 말)이라고 믿는 시인에게 “시가 없는 세상은 어머니가 없는 세상과 같”(「나를 살게 하는 말들」)을 것이다.
제1부
두 자리
제각기 자기 색깔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
너무 많은 생각
바람길
일상의 기적
나는 어서 말해야 한다
나의 백일몽
아니다
사소한 한마디
나는 독자를 믿는다
몽돌
초미금(焦尾琴)
비 오는 날
저녁을 부려놓고 가다
제2부
푸른 노역(勞役)
여전히 여전한 여자
공부하다가 죽어버려라
그림자
바람아래해변
마침내
고독을 공부하는 고독
생략 없는 구절
시작 노트에서
슬픔을 줄이는 방법
뒤를 돌아보는 저녁
상계인
마들 시편 2
오월에
바위에 대한 견해
마들 시편 3
있다
제3부
견디다
그는 낯선 곳에서 온다
백석별자리
그 말이 나를 삼켰다
눈물 전기
삼월
일흔살의 메모
들여다본다
잡(卡)에서의 하루
하루는 하나의 루머가 아니다
단 한 사람
의외의 대답
집으로의 여행
왜?라는 이유도 없이
몇번의 겨울
제4부
짧은 심사평
슬픈 유머
그늘에 기대다
아무 날도 아닌 날
다시 쓰는 사계(四季)
되풀이
수락 시편 2
여름의 어느날
다시 여름 한때
달맞이고개에서 한 철
귀는 소리로 운다
어느 미혼모의 질문
어떤 충고
나를 살게 하는 말들
시인의 산문
시인의 말
나에게 왜 시를 쓰느냐고 물으면 나는 ‘잘 살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잘 산다는 것은 시로써 나를 살린다는 뜻이다. 어떤 일을 해도 시만큼 나를 살려주는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시와 소통할 때 가장 덜 외롭다. (…) 나는 앞으로도 마음이 쓰고 입이 쓸 때까지, 뭔가 멋진 것을 찾을 때까지 쓰고 쓰고 또 쓸 것이다. 나는 쓰는 시가 있어 살아 있고 또 살아갈 것이다. 살아 있어 시를 쓰는 것만으로도 지극한 기쁨이 된다. 이 지극한 기쁨으로 독자와 사회와 시인이 함께 시 권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기를 열망해본다. (…) 나이가 들었어도 질문하는 내 습관은 살아 있다. 시를 쓸 때 ‘왜? 어떻게?’가 내 물음이기 때문이다. 작고 새로운 것에 놀라고 경이로운 것에 경탄하니 질문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사람의 상처를 꽃으로 피우기 위해 시를 쓸 것이다. 시란 결국 삶에 대해 끝없는 질문을 던지고 존재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