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일은 시나브로 우리 곁에 다가옵니다”
삶과 시가 일치하는 생명의 순간을 꿈꾸며 오롯이 걸어온 시의 길 40년
시적 연륜에 더욱 깊어지는 따뜻한 서정과 냉철한 현실인식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전통적 서정을 바탕으로 한 감성적 언어로 인간 본래의 사랑과 그리움을 노래해온 곽재구 시인의 신작 시집 『꽃으로 엮은 방패』가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푸른 용과 강과 착한 물고기들의 노래』(문학동네 2019) 이후 2년 만에 선보이는 아홉번째 시집으로, 등단 40년을 맞이하는 해에 펴내는 시집이라 더욱 뜻깊다. 한국 서정 시단을 대표하는 중견 시인으로서 2020년에는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26년 만에 ‘오월시’ 동인 신작 시집을 펴내어 문단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사랑하고/아파하고/이별하는/그리운 생의 시간들”과 “바람 불고/눈 오고/꽃 피는/지상의 시간들”(「목도장 2」)을 아름답고 투명한 언어로 불러내어 예와 다름없이 맑고 고운 서정의 세계를 한껏 펼친다. 세월이 지나도 마음을 흔드는 온기가 깃든 시편들이 묵직한 감동을 일으키며 가슴을 따듯하게 적셔준다. 71편의 시를 4부로 나누어 실었으며, 해설 대신 시인의 산문을 덧붙였다. ‘시를 시작하는 청춘들에게’라는 부제에서 짐작하듯, 40년의 시적 연륜과 시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긴 글로 색다른 읽을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번 시집에는 유난히 ‘용오름마을, 소뎅이마을, 파람바구마을, 선학, 초적, 쇠리, 섬달천’ 등 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지명이 많이 등장한다. 삶의 안식처이자 마음의 고향인 이곳에서 시인은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그리운 이들에게 “살아서 퍼렇던 그리움의 날들”과 “세월이 흘러 썩어 문드러질지 모를 외로움의 날들”(「화진포」)을 달래는 손편지를 띄운다. “궁핍과 광란의 시간들 다 놓아 보낸 생의 저물녘”(「섬달천」)에 이르러서는 그 옛날 “펌프 샘 가에 앉아 울던/엄마의 눈물 냄새”(「호두 바람」)와 이제는 “지상에 없는 그리운 혈족들”(「중강진 3」)에 대한 추억에 젖기도 한다. 착한 이웃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마을과 마을 사이를 거닐며 시인은 시적 영감을 얻기도 하면서 “미친 듯 허겁지겁” 살아온 세월을 돌이켜보며 “사람은 좀 느리게 살아야”(「기차는 좀더 느리게 달려야 한다」) 한다는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뿌리는 것이/별의 숙명이라는 것”을 알기에 시인은 이제 “어떤 외로움 속에서도/홀로 외로워질 수 있다고/고요히 다짐”(「또 하나의 별」)한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덮으리라”
세월이 지나도 마음을 흔드는 온기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길은 따뜻하고 선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순하고 여린 마음의 부드러운 서정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냉철한 역사의식과 치열한 현실인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일제와 손잡고/짝짜꿍놀이 한 개인간들”과 “온갖 부패의 모래 계단”에 올라 세상을 조롱하는 “쓰레기들을 운명처럼 바라만 보았”(「無底坑圖」)던 비루한 현실을 씁쓸히 바라보는 시선에는 분노가 서려 있다. 여행길에서 만난 고려인들의 한 맺힌 삶 앞에서는 왜 그들이 “중앙아시아의 허허벌판에 버려졌는지/단 한번 묻지 않은 조국”(「우슈토베의 민들레」)의 무정함에 부끄러워하며 “우리는 언제부터 형제가 아니었던가/생각하고 생각”(「형제」)하면서 동포애를 느끼기도 하고, “너무 오래/너무 길게” 미워하고 외면하며 살아왔던 분단 현실을 아파하면서 “엎어지고 깨지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얘기”(「칡꽃」)에 귀를 기울여본다. 나아가 “개또라이 아베와 트럼프와 시진핑이 함께 마귀춤 추며/팔천만 한반도 들들 볶는”(「저녁의 꽃 냄새」) 자본주의 열강의 폭력에 맞서서는 “순교하는 조선의 마음이 되자”(「두부 먹는 밤」)고 외침을 다지기도 한다.
삶과 시가 일치하는 생명의 순간을 꿈꾸며 오롯이 시의 길을 걸어온 지 40년, “천지사방 꽃향기 가득”(「세월」)한 봄 언덕에 엎드려 시를 쓰던 소년은 어느덧 노년에 이르러 겨울 동천의 징검다리 디딤돌에 앉아 여전히 순박하고 무구한 시심(詩心)을 가다듬으며 “오래전/당신이 쫓다 놓친 신비한 무지개를/꿈인 듯 다시 쫓는”(「좋은 일」)다. “저녁의 항구에서 모여드는 세상의 모든 시를 읽을 것”(「세상의 모든 시」)이라 다짐하며 “무지개 뜬 초원의 간이역/이슬밭에 엎드려”(「세월」) 시를 쓰는 시인의 모습이 한없이 평화롭다. 그 너머로 아늑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지상의 가난한 마을로 오는 푸른 기차”의 기적 소리와 “아름다움이 세상을 덮으리라”(시인의 산문)는 희망의 목소리가 오래도록 은은하게 가슴을 울린다.
해설 대신 실린 시인의 산문도 찬찬히 새겨 읽을 만하다. 200자 원고지 200매가 넘는 분량으로, ㄱ에서 ㅎ, ㅏ에서 ㅣ까지 한글 자모의 순서대로 강물 흐르듯 유려하면서 따듯한 문장으로 써내려간 이 글은 문학적 자전이자 시론으로 읽힌다. 한국전쟁 직후 “추석 지나고 첫서리 내린 날 저녁 밥숟가락을 놓은 뒤”에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정신과 삶에 덧없이 가난했던” 어머니가 물려준 “소중한 유산”으로 간직해온 이야기를 비롯하여 시도 쓰고 여행도 하고 학교에서 이십년 동안 시를 가르쳐온 문학적 삶의 이력을 나긋나긋 들려준다. 그중 1980년 5월 광주를 겪은 일은 뭉클하고, 한국 시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편 「사평역에서」가 세상에 나오게 된 이야기는 흥미롭다. 시론으로서는 “시는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이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끝없는 도전”이라는 말과 “어떤 철학도 이데올로기도 혁명도 꿈꾸지 못한 사랑의 향기, 그곳에 시의 본향이 있다”라는 말이 가슴을 묵직하게 울린다. 삶과 문학과 시에 대한 진솔한 성찰은 ‘시를 시작하는 청춘들’에게 올곧은 시 정신을 일깨우는 한편 “청춘의 힘을 불끈 쏟아 세상을 들었다 놓는 새롭고 신비한” 시의 길을 찾아가는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다.
제1부
채송화
세월
또 하나의 별
江上禮雪
오랑캐꽃
두부 먹는 밤
목도장 1
목도장 2
목도장 3
기차는 좀더 느리게 달려야 한다
대못이 박힌 자리
따뜻한 감나무
좋은 일
호두 바람
칡꽃
세상의 모든 시
제2부
흰여뀌꽃밭
柳京萬里
혜산 처녀
파수강 칠십리
하얀 조선의 밤
저녁의 꽃 냄새
형제
파르티잔스크
내두산 편지
우슈토베의 민들레
비 아버지
그리움
산언덕
화진포
꽃눈
북간도
꿈결
중강진 1
중강진 2
중강진 3
중강진 4
제3부
해남
구강포
閑車萬籍
송화강
평양냉면
별똥 떨어진 곳
덕칠 아재
秋夜憶鰍魚
송충이
밥버러지
조선의 가을 하늘
無底坑圖
어느 신인 포탄 제조공의 노래
성탄 전야
두륜중학교
광한루
먹감나무 의자
제4부
수국
꽃 장수
자목련
바람
낡은 컬러사진
용오름마을 雲龍
소뎅이마을 鳳田
파람바구마을 弄珠
선학 仙鶴
초적 草笛
반월 半月
쇠리 花浦
섬달천
망룡 望龍
화지 禾旨
자두꽃 핀 시골길
늙은 시인은 새 시집 읽는 게 두렵지 않다
시인의 산문
지상에 낮이 있고 밤이 있습니다. 해와 달, 무지개와 별이 교대로 파수를 서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시간이지요. 시를 쓰는 데 이보다 더 완벽한 시간 있을 수 없습니다. 햇살 속에 꽃을 피우고 은하수 속으로 떠나는 하얀 배에 영혼을 실을 수 있습니다. 지상의 시인을 꿈꾸는 당신, 낮에는 빛나고 아름다운 낮의 시를, 밤에는 새롭고 신비한 밤의 시를 쓰세요. 언젠가 시의 신이 보낸 푸른 몸의 기차에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저녁 밥상 앞에서 당신의 시를 읽을 것입니다. (…) 아파하면서 그리워하면서 당신의 시를 쓰세요. 밤을 새워 당신이 쓴 순결한 시에 어떤 철학도 이데올로기도 꿈꾸지 못한 인간 내면의 맑은 샘물이 있습니다. 어떤 혁명도 꿈꾸지 못한 사랑의 향기, 그곳에 시의 본향이 있습니다 (…) 살면서 알았지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람 시를 꿈꾸는 사람이에요. 아침에도 시를 꿈꾸고 저녁에도 시를 꿈꾸는 사람이에요. 당신의 시가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어요. 당신이 혼을 다해 쓴 시가 세상의 억압과 궁핍의 창을 막아내는 순결한 방패가 될 수 있어요. 새롭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를 써요. 난해함과 고통의 바다 건너 자신만의 순결한 꿈으로 시의 공화국을 만들어요. 가난한 마을로 오는 푸른 기차, 우리가 만들어요. 당신이 쓴 시가 좋아요. 세상의 슬프고 외로운 이들을 우리가 만든 푸른 기차에 태워요. 세상 끝 행복한 그 나라로 가요. 인간과 세계가 함께 만든 푸른 기차, 오늘 밤 당신이 쓴 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