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453

악의 평범성

이산하  시집
출간일: 2021.02.05.
정가: 9,000원
분야: 문학,
전자책: 있음

나를 찍어라. 그럼 난 네 도끼날에

 

 

향기를 묻혀주마.

 

 

『한라산』의 시인 이산하, 희망 없는 세상에서

 

 

절망하지 않되 응시하고 저항하는 시 정신의 향연

 

 

 

제주 4·3항쟁의 진실을 폭로한 장편서사시 『한라산』으로 옥고를 치르고 긴 시간 절필 끝에 두 번째 시집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1999)를 발표했던 이산하 시인이 그러고도 다시 22년이 흘러 신작 시집 『악의 평범성』을 출간했다. ‘적’의 정체가 분명했던 시절에 격렬히 저항했고 그로 인해 안팎으로 상처를 입으며 벼렸던 시인의 날 선 시선과 감성은 겉으로는 안온한 일상으로 포장된 오늘날의 ‘적’을 만나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켜 어떻게 다시 빛을 발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시편들로 빼곡한 시집이다. 자신을 찍을 도끼날에 향기를 묻혀주겠다는 ‘나무’의 자세로 시를 쓴 시인 이산하, “‘희망’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는 이번 시집은 아직도 열렬하게 살아 있는, 저항하는 시 정신의 향연이다.

 

 

 

 

역사와 인간 앞에서 겸허해지며

 

일상에 숨어든 악을 정면 응시하는 시 정신

 

 

 

이십대의 문학청년이 목격한 ‘제주 4·3항쟁’의 진실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시를 쓰고 발표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으로 옥고를 치러야 했던 엄혹한 시절을 통과하며 시인은 이제 노년을 맞이했다. 자신이 맞닥뜨렸던 불의와 불합리와 부정의 세상은 이제 한결 보드랍고 온화하고 민주적인 표피를 보이지만 양상과 방식을 달리해 여전한 불의와 불합리와 부정 투성이다. 광주항쟁의 피해자를 비아냥하고, 세월호사건 피해 학생을 조롱하는 듯한 SNS의 글에 환호하는 이들이 “모두 한 번쯤 내 옷깃을 스쳤을 우리 이웃”임을 알기에 “가장 보이지 않는 범인은 내 안의 또다른 나”(「악의 평범성1」)라는 사실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악’은 결코 비범하지 않고 지극히 평범하기에 어쩌면 더 악랄해지고 지독해졌으리라. 이런 ‘악’을 양산하는 사회구조는 비정규직을 차별하고 노동을 천시하는 변질된 자본주의의 모순을 기반으로 한다. “자본주의는 위기 때마다 새로운 가면을 쓰며 폭주하고 있다./맑스의 자본론이 오히려 예방주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엥겔스의 여우사냥」)는 시인의 통찰에 눈이 번쩍 뜨이는 이유이다.

 

해설을 쓴 김수이의 말대로 이산하의 이번 시집은 “최근 시단에서 찾기 힘든, 거시 역사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시집이다. 해서 김수이는 이 시집이 세 가지 유형의 바퀴를 그린다고 해석한다. 첫째,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으로서의 수레바퀴로 ‘자본론과 진화론’(「엥겔스의 여우사냥」)으로 대표되는 바퀴이다. 둘째는 역사를 피로 물들여온 악의 평범성, 즉 인간을 살상하는 끊임없는 폭력의 바퀴로 “한국전쟁 때 미군지프에 깔려 죽은/북한 인민군들 머리와 몸의 바퀴자국이 마치 지퍼무늬 같다고 해서”(「지퍼헤드2) 생긴 ‘지퍼헤드’라는 표현으로 상징된다. 셋째, 꿈과 신념이 잿더미가 된 세상에서도 인간이 두 손으로 굴리는 삶의 바퀴이다. “두 바퀴를 두 손으로 직접 굴리는 이 휠체어는/천천히 손에 힘을 주는 만큼만 바퀴자국을 남긴다”(「산수유 씨앗)에서 휠체어 바퀴자국은 앞세대와 뒷세대,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이어져야 하며, 인간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알려준다고 해석한다. 타인과 함께하는 발걸음이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시인의 말」)는 이 시집이 그려낸 세상에서, 희망은 없을지언정 시인은 절망하지도 좌절하지도 않는다. 또한 형형한 눈빛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역사와 현실을 마주하는 시인은 “현대사 앞에서는 우리 모두 문상객이 아니라 상주”(「나를 위해 울지 말거라」)여야 한다고 다시금 다짐한다.

목차

제1부

지옥의 묵시록

어린 여우

먼지의 무게

나는 물방울이었다

욕조

바닥

그는 목발을 짚고 별로 간다

벽오동 심은 뜻은

인생목록

엥겔스의 여우사냥

가장 위험한 동물

항소이유서

가장 먼 길

지퍼헤드 1

지퍼헤드 2

수의

 

 

 

제2부

붉은 립스틱

마지막 연주

아우슈비츠 오케스트라

크리스마스 선물

지난번처럼

나무

멀리 있는 빛

찢어진 고무신

노란 넥타이

햇빛 한 줌

3시간

산수유 씨앗

친구

마당을 쓸며

용서

돌탑

푸른빛

 

 

 

제3부

동백꽃

겨울 폭포

추모

빈틈

백조

복사꽃

새로운 유배지

폭탄

국가기밀

버킷리스트

E=mc2

악의 평범성 1

악의 평범성 2

악의 평범성 3

살아남은 죄

스타 괴물

새와 토끼

토끼훈련

 

 

 

제4부

이 모든 것은

맨발

유언

수행

미자의 모자

영혼의 목걸이

페르시아의 흠

나에게 묻는다

촛불은 갇혀 있다

운동화 한 짝

흙수저

나를 밟고 가라

대나무처럼

빙어

베로니카

길상사

히야신스

지뢰밭 건너기

나를 위해 울지 말거라

 

 

 

해설|김수이

시인의 말

여기 이 시집이 시인의 끝이다. 샤먼이다. 시여, 여기서 다시 시작이다. 이문재 시인

저자의 말

자기를 처형하라는 글이 쓰인 것도 모른 채 봉인된 밀서를 전하러 가는 ‘다윗의 편지’처럼 시를 쓴다는 것도 시의 빈소에 꽃 하나 바치며 조문하는 것과 같은 건지도 모른다. 22여 년 만에 그 조화들을 모아 불태운다. 내 영혼의 잿더미 위에 단테의 「신곡」 중 이런 구절이 새겨진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내 시집에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

2021년 이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