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452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정현우  시집
출간일: 2021.01.15.
정가: 9,000원
분야: 문학,
전자책: 있음

“나는 흐릅니까. 누워 있는 것들로 흘러야 합니까”

 

 

말해질 수 없는 슬픔을 노래하는 정현우의 첫 시집

 

 

생과 생의 여분을 고해하는 낯선 목소리의 탄생

 

 

 

2021년 ‘창비시선’의 문을 여는 첫번째 시집으로 정현우 시인의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가 출간되었다.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인의 첫 시집이다. 등단 이전 가수로 데뷔했던 시인은 작년 ‘시인의 악기 상점’이라는 독특한 이름으로 앨범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을 내고 뮤지션으로 문학과 음악 양쪽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기도 하다. 2019년 제4회 동주문학상(윤동주서시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미래의 시단을 이끌어갈 젊은 시인으로 주목받았다.

 

등단 6년 만에 펴내는 첫 시집에서 시인은 선명하고 참신한 이미지와 세련되고 감성적인 언어가 돋보이는 매력적인 시 세계를 펼쳐 보인다.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 성찰과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되묻는 시적 사유의 깊이와 활달하고 개성적인 문장이 돌올한 시편들이 세상의 모든 슬픔을 끌어안는 서정적 정감의 깊은 울림 속에서 애잔하면서 뭉클한 감정을 자아낸다. 동주문학상 수상작 「슬픔을 들키면 슬픔이 아니듯이」를 비롯하여 68편의 시를 갈무리하여 4부로 나누어 실었다.

 

 

 

 

잘못을 들키면 잘못이 되고,

 

슬픔을 들키면 슬픔이 아니듯이

 

 

 

정현우의 시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지울 수 없는 슬픔”(「오,라는 말은」)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뚜렷하게 드러나진 않지만 “잘못을 들키면 잘못이 되고 슬픔을 들키면 슬픔이 아니듯이”(「슬픔을 들키면 슬픔이 아니듯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드러나는 순간 사라지거나 부정되고 마는 슬픔의 존재만 느껴질 뿐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세상의 절반은/전염병에 눈이 없어진 불구로 가득했다”(「세례」)고 말하는 시인은 심지어 “본 적 없는 장면을 슬퍼”(「세례」)하기도 한다. 그렇듯 “슬픔을 가진다는 것”이 “인간이 되기 위한/경우의 수”(「유리 주사위」)라면 “모든 슬픔을 한꺼번에 울 수는 없나”(「꿈과 난로」)라고 되묻는 시인은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말할 수밖에 없는 슬픔”(김언, 해설)으로 가슴에 새기며 삶의 고통과 슬픔을 참고 견디어낸다. 그리하여 “각자의 슬픔으로 고여 있는 웅덩이와 그림자일 뿐”(「슬픔을 들키면 슬픔이 아니듯이」)인 삶의 그늘진 풍경 속에도 “불탄 혀로 슬픔을 핥”는 “사랑과 기쁨”(「겨울의 젠가」)의 온기가 스며들기도 한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슬픔을 깨뜨려야/사람이 인간이 될까”(「유리 주사위」). 시인은 기존의 언어로는 설명할 길 없는 내면의 슬픔 속에서 “잘못 태어난 것들을 떠올”(「빙점」)리며 자신의 기원을 찾아 어두컴컴한 미로의 세계를 탐색해 들어간다. “잠은 둘이 자는데/왜 두가지 성을 가질 수 없을까”(「침례 1」), “사람이 죽으면 여자일까 남자일까”(「여자가 되는 방」)라는 의문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시인의 번민은 종내 그치지 않는다. 시인은 기존의 체계와 언어의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색” 중에서 ‘나’로서 “살아 있으려는 색”(「컬러풀」)을 품고자 한다. 그것은 시인의 당면한 현실이자 가장 절실한 실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시인은 “빛을 오리는 검은 가위질”로 “여자와 남자를 구분하는 시간”(「인면어」)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문득문득 “사려 깊은 여성이 되어”(「항문이 없는 것들을 위하여」)보기도 한다.

 

 

 

정현우의 첫 시집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는 “멍든 것들로 가득 차 있”(「멍」)는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영혼들의 상처를 위로하는 비가(悲歌)이자 인간 존재의 본질과 정체성에 대한 고해록이다. 시인은 이 시집으로 “믿지도 않는 신”에게 드리는 “죄 없는 기도”(「용서」)로써 고해의식을 마친 셈이다. 그러나 이대로 돌아서거나 여기서 멈춰서지는 않을 것이다. 현실은 “잘한 것보다 잘못한 것이 많아지는 밤”(「여자가 되는 방」)처럼 암울하고, 고통의 연속인 삶은 “빛이 들지 않는 미래”(「세례」)라 할지라도 “위태로운 것은 아름답”(「항문이 없는 것들을 위하여」)기에 시인은 “덫에 걸린 나의 안쪽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덫」)면서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을 향하여 거룩한 천사의 음성으로 슬픔을 노래할 것이다. “이름을 받지 못해 엉킨 채로 서글프게 떠도는 허공의 회로들과 한 몸이 되어 쓰고, 서로를 태우고 살아갈 것이다.”(이병률, 추천사)

목차

제1부 모든 슬픔을 한꺼번에 울 수는 없나

 

세례

 

 

소라 일기

 

여자가 되는 방

 

귀와 뿔

 

 

여백

 

오르골

 

유리 주사위

 

슬픔을 들키면 슬픔이 아니듯이

 

눈 깜빡거릴 섬(䁡)

 

이팝나무 아래서 재채기를 하면 처음이 될까요

 

꿈갈피

 

컬러풀

 

겨울의 젠가

 

꿈과 난로

 

 

 

제2부 시간과 그늘 사이 턱을 괴고

 

달팽이 사육장 1

 

점(占)

 

해감

 

진화

 

침례 1

 

도화(桃花)

 

달팽이 사육장 2

 

파랑의 질서

 

주말의 명화

 

도깨비바늘

 

신이 우리를 죽이러 올 때

 

각도의 비밀

 

묘묘

 

The Sounds of Silence

 

로즈 빌

 

오르톨랑

 

배꼽의 기능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제3부 소년과 물보라

 

인면어

 

밥알을 넘기다 수저를 삼키면

 

강신무

 

용서

 

항문이 없는 것들을 위하여

 

사람은 물고기처럼 물속에서 숨 쉴 수 없나요

 

기원

 

서랍의 배치

 

소금 달

 

침례 2

 

유리의 서

 

손금

 

인어가 우는 숲

 

스노우볼

 

문조(文鳥)

 

사랑의 뒷면

 

수묵

 

오,라는 말은

 

 

 

 

제4부 여름의 캐럴

 

적화(摘花)

 

겨울 귀

 

툰드라의 유령 1

 

툰드라의 유령 2

 

묻다

 

거인

 

소멸하는 밤

 

늦잠

 

뱀주인자리

 

옷의 나라

 

종언

 

빙점

 

목화가 피어 살고 싶다고

 

소년의 태도

 

여름의 캐럴

 

후쿠시마

 

 

 

해설|김언

 

시인의 말

이 시집은 고해록이다. 생의 여분을 거역할 수 없기에 청년 이전의 시간들에 대해 고해하고, 태어났으되 갇혀버린 몸과 명점(命點)에 대해 고해한다. 시인은 조준선 끝에, 그리고 감각의 연장선 위에 신(神)의 선택을 받거나 받지 못한 자신의 운명을 배치한다. 그와 그와는 다른 낯선 자신, 그 둘은 공모하여 그에게 사람의 일이 아닌, 시를 쓰라고 책상에 앉혔다. 시 속에 ‘엄마’가 수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자신을 빚어놓은 대상에게 붙들려 살지도, 대상을 폐기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일 것이고, “신을 받지 않는 내가”(「인면어」) “작두날을 얼굴에 대고 연풍을 돈다”(「강신무」)는 진술은 시인이 첫 시집으로 지은 세계가 발광하는 빛으로 지붕을 올린 날것의 사원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다. “위태로운 것은 아름답”(「항문이 없는 것들을 위하여」)기에 “나의 안쪽을 오래도록 들여다”(「덫」)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며 따뜻하고 부드럽게, 억세고 질기게 자신의 혈맥에 호소한다. 그 호소력은 자기다움의 소실점을 따르고 있다. 정현우 시인은 이 시집 한권으로 고해의식을 마치고도 경로를 지속하여 더 낮은 것들을 노래할 것이다. 이름을 받지 못해 엉킨 채로 서글프게 떠도는 허공의 회로들과 한 몸이 되어 쓰고, 서로를 태우고 살아갈 것이다. 이병률 시인

저자의 말

죽지 마 떨어지지도 마 아무것도 없는데 한여름에 먹는 수박 맛도 느낄 수 없잖아 우리는 죽기 직전까지 어떤 마음을 선택해야 하고 밤이 되면 슬픈 눈을 갖게 되는 것도 천국이 있다는 아름다운 말을 믿는 것도 너는 아니, 인간에게 울음은 왜 있는 걸까, 네 슬픔에 기대도 될까 버스를 타고 오는 창문에 입김을 불었어 네 눈동자를 그려봤어 자꾸 지워지는데 그런 슬픔은 잔인하지   (…)   시간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공간은 어디에서 끝날까 어둠과 빛 사이에 무릎을 꿇게 만드는 것들 찬란한 애수, 검은 기쁨들…… 내가 듣고 말하는 것이 모두 썩어 없어진다면 그냥, 서글픈 이파리, 눈이 부시다가 바람결에 날아가도 좋아 그냥, 이런 하찮은 마음 같은 거, 그러니까 이건 나의 마지막 편지 더이상 네게 묻지 않을게 네 슬픔을 기도하는 것도 안도하는 것도 나는 아직 사람이 되지 않았는데 너는 그래서 사람이 되었어? 네가 있는 곳에도 눈이 올까? 나는 미친 듯이 궁금해 너는 아니, 어떤 질문이든 뭐가 필요해 됐어, 견뎌내느라 애썼어, 너의 눈동자 같은 기쁨으로

2021년 1월 정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