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후반 콩고의 비극적 현실을 고발하며
현대 아프리카 문학의 고전 반열에 오른
소니 라부 탄시의 대표작 국내 초역
“『죽음 뒤의 삶』은 오늘의 눈으로 내일을 보는 우화가 될 것이다”
_소니 라부 탄시
콩고공화국의 작가 소니 라부 탄시가 프랑스어로 집필한 장편소설 『죽음 뒤의 삶』이 창비세계문학 83번으로 출간됐다. 『죽음 뒤의 삶』(1979)으로 한국에 처음 작품이 소개되는 소니 라부 탄시는 “아프리카 문학의 위대한 목소리”라는 평과 함께 중앙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서구에서 유입된 근대소설의 형식에 아프리카의 언어와 주제를 부여하려 시도했으며, 첨예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형상화한 작품성으로 인정받았다. 특히 그의 대표작 『죽음 뒤의 삶』은 19세기 말부터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1960년에 독립한 콩고공화국의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탄압을 예리하게 그려내며 “새로운 아프리카적 글쓰기”라는 찬사와 함께 오늘날 현대 아프리카 문학의 고전 반열에 오른 문제작이다. 가상의 공화국 카타말라나지의 ‘영도자’라 불리는 독재자와 반란군 지도자 마르샬의 수대에 걸친 ‘전쟁’을 통해 체제의 터무니없는 폭력성을 고발한 작품으로, 소수 군벌을 중심으로 한 독재 권력의 억압과 수탈, 반복되는 꾸데따 속에서 마비되는 식민지 해방 이후 국가의 모습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한국인에게는 아직 낯선 ‘콩고공화국’의 이야기지만, 식민 지배, 해방 이후 독재 정권의 군림, 연이은 꾸데따, 청산되지 않은 식민시대의 그림자라는 한국과 닮아 있는 20세기 역사를 그려냈기에 깊은 공감을 하며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줄거리
소설 『죽음 뒤의 삶』은 가상의 공화국 카타말라나지의 대통령궁에서 ‘영도자’라는 독재 권력자가 마르샬이라는 반란군 지도자의 가족을 고문하고 살해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나는 이런 죽음을 죽고 싶지 않다”라고 읊조리며 죽임을 당한 마르샬은 유령이자 예언자가 되어 결정적인 순간마다 피 흘리는 상체의 모습으로 혹은 검은 얼룩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시작된 영도자들과 마르샬의 사람들 간의 전쟁은 수대에 걸쳐 끝없는 반복·변주를 통해 이어진다. 마르샬의 영혼은 샤이다나의 몸을 범하려는 영도자들의 시도를 좌절시키고, ‘마르샬처럼 삶이 아니라 죽음을 유일하게 의미 있는 삶의 양식으로 선택한 젊은이들’의 저항과 반란의 형태로 투영돼 계속 싸움을 이어간다. 마르샬의 딸 샤이다나와 그녀의 딸인 또다른 샤이다나는 대를 이어 ‘샴페인 섹스’를 통해 권력자들을 차례차례 제거하며 전쟁을 수행한다. 샤이다나 모녀의 보호자 역할을 하다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한 어부 레이쇼는 수감생활 동안 수천 킬로그램의 종이에 타락한 세상에 저항하는 글을 자신의 피로 새긴다. 수대에 걸친 전쟁이 끝나고 마침내 새로 들어선 정부에서 ‘마르샬의 사람들’은 거리와 건물의 이름으로 남게 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유래와 역사의 기억을 묻는 것은 법으로 금지된다.
“독립이 만능은 아니었다”
소니 라부 탄시의 조국 콩고공화국은 19세기 말부터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1960년에 독립한 국가다. 그러나 작품 속의 반란군 마르샬도 말했듯 “독립이 만능은 아니었다”. 독립 이후 콩고공화국은 꾸데따가 또다른 꾸데따를 낳는 정치적 악순환을 반복했으며, 정권을 잡은 독재 권력은 국민에게 억압과 수탈을 자행했다. 그 결과 라부 탄시가 1979년 『죽음 뒤의 삶』을 발표하던 시기의 콩고공화국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회생의 가능성을 찾기 어려운 절망적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작가는 영도자가 대를 이어 마르샬의 사람들을 기괴하게 탄압하는 과정을 통해 폭압적 정치권력의 광기를 야유와 풍자로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시대착오적 과장과 그로테스크한 표현은 당대의 역사 현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이 얼마나 비관적이고 절망적인지를 드러내며 독자가 20세기 후반 콩고공화국의 현실을 통렬히 느끼게 한다.
허망하고 몰역사적인 전쟁의 기록
전쟁이 끝나고 반군이 새롭게 세운 정부에서 ‘마르샬의 사람들’은 거리와 건물의 이름들로 남게 되지만, 그 유래를 묻는 것은 법으로 금지된다.
“안됩니다, 존경하는 영웅 어르신, 그런 것들은 이제 말하면 안됩니다. 그건 우리가 실제로 겪은 일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꿈을 꾸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현실을 선택한 이후로 그런 것들에 대해 말하는 건 금지되어 있습니다.”(195면)
이런 허망한 종전은 ‘죽음 뒤의 삶’이라는 제목의 기나긴 전쟁의 기록처럼 몰역사적인 것도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수대에 걸친 야만적인 파괴와 살육 끝에 남은 것은 결국 역사의 악무한적인 순환 혹은 ‘역사의 몰역사성’에 대한 뼈저린 확인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전쟁은 전쟁의 근본적 무의미만을 증언하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헛돈다. 메시아는 결코 오지 않으며 죽임의 폭력을 무기로 한 권력의 증식은 계속 이어진다. 소설 『죽음 뒤의 삶』이 그려 보이는 카타말라나지의 역사, 즉 식민 지배 해방 이후 아프리카의 역사는 소진과 여명(餘命)이라는 반복에 이끌려 굴러가고 있을 뿐이다.
갈 길을 잃은 대륙의 새로운 가능성
소니 라부 탄시는 생전에 아프리카를 “유일하게 갈 길을 잃은 대륙”이라 말했다. 그런 그가 『죽음 뒤의 삶』에서 당대의 아프리카인들에게 제기한 질문은 ‘이 독재가 자행하는 죽임을 죽일 수 있는 새로운 아프리카적 인간, 즉 주체의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였다. 라부 탄시는 질문에 대한 열쇠를 마르샬의 사람들을 부르는 ‘넝마’라는 호칭에 심어두었다. 폭력 앞에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상실한 채 넝마처럼 너덜너덜해진 존재들을 가리키는 이들의 삶은 거의 죽음 같은 삶이다. 그러나 야만적 폭력에도 그들의 생명력은 결코 완전히 파괴되지 않는다. 살점의 기억 속에 각인된 인간 존엄성의 흔적, 그 기억 속에 맹아(萌芽)처럼 수대에 걸쳐 인간의 주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 뒤의 삶』은 오늘의 눈으로 내일을 보는 우화가 될 것이다”라는 라부 탄시의 말처럼 아프리카에 대한 그의 시각은 절망뿐 아니라 역사의 시간 저 너머의 미래에 대한 열망과 함께한다. 식민지 독립 이후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흘렀으나 아직까지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한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 그리고 비슷한 아픔을 겪은 우리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작품이다.
* 소니 라부 탄시(Sony Labou Tansi)는 작가의 필명으로 아프리카 및 기타 언어 발음 표기 기준을 따랐다.
머리말
죽음 뒤의 삶
작품해설 / 소진과 여명 사이: 20세기 후반의 콩고와 소니 라부 탄시의 정치적 상상력
작가연보
발간사
『죽음 뒤의 삶』은 극단적으로 환상적인 허구 속에 비합리적·폭력적 에너지로 들끓는 콩고 혹은 아프리카의 시대 현실을 터무니없는 형식으로 표현하며, 독립 직후 콩고인들의 ‘치욕스러운 실추 상태’ 또는 ‘영혼의 증발 상태’를 신랄하게 해부·묘사하는 데 성공한 소설이다. 심재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