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이 영원의 몸이라면 반짝임은 그 영원의 입자들
아직 삶이 있는 나는 반짝임을 바라보며 서 있다”
심층의 감각으로 미지의 세계를 기록하는 시인 최정례
빈빈(彬彬)의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시력 30년의 역작
1990년 『현대시학』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지 올해로 30년, 백석문학상 수상 작가 최정례 시인의 신작 시집 『빛그물』이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오장환문학상 수상작 『개천은 용의 홈타운』(창비 2015)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일곱번째 시집이다. 등단 30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시집이기도 한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공간과 시간의 혼돈 속에서 시적인 물음들을 물으며 자기 갈 길을 가는 시들, 이곳을 말하면서 동시에 저곳을 말하는 알레고리의 시들”(시인의 말)을 선보인다. 정밀한 이야기 구조 속에서 구체적인 언어와 냉철한 직관력으로 일상의 다채로운 풍경들을 담아낸 산문시의 새로운 경지와 묘미를 보여주는 이 시집에서 우리는 “어떠한 위기와 시련에도 손상되지 않는 인간의 신비”(김인환, 추천사)를 읽을 수 있다. 30년간 활달한 상상력과 고유의 어법으로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해왔음에도 끊임없이 시적 모험을 실천하며 갱신의 의지를 다져온 시인의 고투가 역력히 드러나는 시집이다.
원리로 환원할 수 없는 사랑의 빛과 그림자
오래도록 바래지 않을 빛그물로 빚어낸 우연의 순간
최정례의 시는 매혹적이다. 별것 아닌 것에서 시작해 끝내 한편의 아름다운 시가 되는 경이로움이 있다. “이념도 아니고 사상도 아닌/우리의 생활”(「창에 널린 이불」)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삶의 비밀스러운 면모를 포착해내는 데 최정례만큼 능숙한 시인은 없는 듯하다. 나무에 올라간 염소를 보면서 그들이 먹기 위해서거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올라가기 위해 그냥/올라가서는/내려오지 못해/매달려 있는 것”(「삼단어법으로」)이라고 보는 독특한 시선과 “개미 한마리가 한강 다리를 지나가면 다리가 휘겠니, 안 휘겠니?”라고 물으면서 “거의 무에 가까운 무게지만 무게는 무게”(「개미와 한강 다리」)라는 기발한 발상이 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해설에서 “이런 것이 바로 최정례다움의 일면”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시인은 저마다 “각자도생의 길을 가야 하는”(「각자도생의 길」) 고독한 삶에서 ‘시적인 것이란 무엇일까’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한다.
산문과 시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가는 최정례의 시를 읽다보면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시공간의 유연한 흐름 속으로 빨려드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된다. 현실과 비현실, 의식과 무의식의 혼잡한 틈새를 넘나드는 ‘밑도 끝도 없는’ 두가지 이상의 이야기가 홀린 듯 따라가게 만드는 산문시의 구조 속에서 촘촘하게 얽혀 있다. 시인이 보여주는 대로 세계 속에는 많은 것이 얽혀 있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뒤섞이는 “인간과 인간 사이” “가치와 가치 사이”(신형철, 해설)의 무수한 얽힘을 시인은 ‘빛그물’로 엮어 “내가 모르는 나, 나라는 허상이/복제, 복제되고 있”(「우박」)는 초현실 같은 순간들을 시적인 순간으로 끌어올린다. “어둠을 통과해 더 큰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이 세계를 말하는 동시에 “그곳으로 영혼이 조용히 앞질러”(「웁살라의 개」) 가는 딴 세상을 보여주면서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조차 “전혀 모르겠”(「젖은 바퀴 소리」)으나 “뭔가 가슴 찢는 게”(「매미」) 있는 삶과 존재의 이면을 섬세하게 파고든다.
이수명 시인은 앞 시집(『개천은 용의 홈타운』) 추천사에서 최정례의 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멀리 나아갈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번 시집은 그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시인은 “산문으로 된 이야기 속에 시적인 것을 어떻게 밀어넣을 수 있을까의 실험, 아직 끝낼 수는 없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극약 처분의 낭떠러지를/기어올라야 하는”(「1㎎의 진통제」)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새로운 시 쓰기에 대한 시인의 열정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익숙하게 굳어버린 생각을 바꾸고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우리를 눈뜨게 하는 ‘산문시를 향한’ 시인의 탐험은 그렇게 계속될 것이다. “밀려오는 구름의 내일을 내다보며”(「첫눈이라구요」) “울컥 쏟아질 것 같”(「긴 손잡이 달린」)은 심정으로 “병원 무균실에서 교정을 본다”는 시인의 말이 오래도록 가슴을 울린다.
제1부
공중제비
각자도생의 길
빛그물
입자들의 스타카토
웁살라의 개
첫눈이라구요
이불 장수
내일은 결혼식
남의 소 빌려 쓰기
긴 손잡이 달린
앵무는 조류다
토끼도 없는데
애완용 인간
매미
제2부
소라 아니고 달팽이
삼단어법으로
개미와 한강 다리
4분의 3쯤의 능선에서
구멍 들여다보기
다른 사람들의 것
나의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 같은
월면 보행
젖은 바퀴 소리
모래와 뼛가루
국
기다란 그것
제3부
겨자소스의 색깔
과하마라는 말처럼
창에 널린 이불
방 안에 코끼리
어디가 세상의 끝인지
오늘은 오락가락 시작법
물리 시간 밖에서
입김
자리
여름을 지나는 열세가지 새소리
쓰나미
냄비는 왜?
제4부
접시란 무엇입니까
발자국은 리듬, 리듬은 혼
안개와 개
안개의 표현
줄거리를 말해봐
우박
물고기 얼굴
반짝반짝 작은 별
홈런은 사라진다
올드 타운
뒷모습의 시
원격조종
고슴도치에게 시 읽어주기
참깨순
1mg의 진통제
해설|신형철
시인의 말
존재의 배면에서 수줍게 숨어 있는 시가 좋다. 발갛게 숯이 되어 타고 있지만 꼿꼿이 서서 무너지지 않는 시가 좋다. 문 없는 문 안에 있는 시를 쓰고 싶었다. 어떻게 들어갔을까 어디로 나갈 수 있을까, 근원을 질문하는 시, 마음과 육신이 만나는 교량 위에서 김수영의 시에서처럼 늙음과 젊음이 만나고, 미움을 사랑으로 포용하는 시를 쓰고 싶었다. 나라를 팔아먹고 그 팔아먹은 나라를 위해 다시 목숨을 바쳤던 이들, 그들이 바로 우리 자신의 두 얼굴이었음을 확인하고자 했다. 우리의 근원을 물으며 돌아가고자 했다. 더운 골짜기와 얼음 골짜기의 물이 만나 하나의 강물이 되어 흐를 때 어느 물 한방울로 그 원천을 증명할 수 있을까, 모순과 아이러니의 두 얼굴, 이 두 얼굴이 우리 근원 속에 도도히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개천은 용의 홈타운』 이후 발표한 시들 중에 산문시 몇편을 덜어내면서 생각해보았다. 산문으로 된 이야기 속에 시적인 것을 어떻게 밀어넣을 수 있을까의 실험, 아직 끝낼 수는 없었다. 물론 시적인 것이란 무엇일까의 더 근원적인 것을 향한 질문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열심히 써냈지만 장치 가 느슨할 때는 너무 싱거운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시들을 덜어내었다. 이야기의 한 귀퉁이를 누르면 저쪽 세계에서 반짝이며 대답해줄 것 같은 이야기 시, 공간과 시간의 혼돈 속에서 시적인 물음들을 물으며 자기 갈 길을 가는 시들, 이곳을 말하면서 동시에 저곳을 말하는 알레고리의 시들을 이 시집에 포함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