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나갈 수 없다

손홍규  소설집
출간일: 2020.10.26.
정가: 14,800원
분야: 문학, 소설
전자책: 있음

한국문학의 든든한 한 축을 지켜온 손홍규 신작 소설집

 

 

사람과 사회, 그 모순과 균열에 대한 탄탄한 서사들

 

 

 

이상문학상백신애문학상오영수문학상 등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하고한국문단에서 독보적인 색채와 위상을 지키며 듬직한 작품세계를 보여온 소설가 손홍규가 신작 소설집 당신은 지나갈 수 없다로 돌아왔다문단의 유망주로 주목받던 시절 작가를 수식했던 풍자와 위트혹은 해학의 서사가 이제 한층 성숙하고 농익은 삶의 비애를 담아내면서 한국문학의 한 축을 단단하게 지탱하는 중견작가의 반열에 손색없는 경지를 보여준다시대가 바뀌었음에도, 20년 가까이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의 눈에 비친 우리네 일상과 주변은 여전히 균열과 모순투성이이며은근한 차별과 폭력이 일상화된 도가니 같은 곳이다거대한 역사적 사건이 서사의 재료가 되었던 초기의 작품들과 달리 이제 일상에 교묘하게 파고든 차별과 폭력의 세계를 들춰내고 비트는날카롭고 섬세한그러나 인간적인 온기를 잃지 않은 작가의 시선은 소설이라는 장르의 역할과 미학에 대한 고민을 한층 성숙시킨 결과로 읽힌다동시대 작가들 사이에서도 오롯하게 돋보이는 소재와 시선을 유지해온 작가의 새로운 궤적은 충분히 눈여겨볼 만하다

 

 

 

 

 

은근한 폭력과 차별의 세계

 

 

 

환멸의 주인공인 사촌형은 건설노동자로 중국인 아내와 갈등 끝에 접근금지 처분까지 받았고 결국 아내는 아들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간 뒤에 가족을 그리워한다술 때문에 숱한 사건 사고를 일으킨 형은 부푼 마음을 안고 기대에 차 아들의 생일 선물을 사들고 중국으로 향했지만 고질적인 술병으로 기내난동범으로 몰려 결국 공항에서 바로 입국 거부당하는 신세가 되어 돌아온다그뒤로 형은 베트남인이든 몽골인이든 이주 노동자들을 경멸하게 되지만 건설현장에 일하러 온 중국인 유학생을 곤경에서 구하기도 한다

 

노 파사란에서는 엄마의 죽음이 할머니 때문이라고 오해하는 아내 대신 할머니를 살피는 주인공이할머니의 재봉틀에 새겨진 노 파사란이라는 단어를 통해 할머니의 굴곡진 지난 삶을 이해하게 된다. ‘누구도 지나갈 수 없다는 뜻의 노 파사란은 혁명의 구호였으나 허락 없이 그녀의 삶을 밟고 지나간 역사는 가족들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현재를 낳았다눈동자 노동자에서는 건설노동자로 함께 일하던 윤호의 사고사를 목격하고 윤호가 남긴 사진에 담긴 자신의 모습을 보며 윤호의 죽음 앞에 무기력한 스스로를 자책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윤호의 남겨진 동생 윤혜를 변변히 위로하지도 못하고 딸의 상견례에도 나서지 못한 채 윤호의 죽음에 괴로워한다옛사랑에서는 아버지의 죽음 후에 어머니의 과거를 따라가는 주인공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쓸쓸한 삶을 맞닥뜨리고 자신에게도 이미 옛사랑이 되어버린 헤어진 아내를 보며 회한에 젖는다저녁의 선동가에서는 필리핀인 엄마를 둔 다문화가정의 딸을 여자친구로 둔 아들이 자신이 일하던 물류 창고의 화재로 세상을 떠난 후그 부모가 만나는 세상을 다룬다

 

2018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는 손홍규 소설 중에서 비교적 결이 다른 소설로 시간을 역순으로 거슬러 주인공 부부인 남녀가 사랑을 시작하는 과거로 돌아가는 구조이다수상 당시에 손홍규 작가가 즐겨 다뤘던 리얼리티의 문제에 접근하는 섬세한 방법이 이 작품에서는 새롭게 시도됐다며 현재에서 과거로 이어지는 서사적 진행 과정에서 과거는 기억 속의 회상이 되지만 일종의 환상처럼 처리되고 있는데 이는 작가 자신의 새로운 실험이다라는 평을 받았던바손홍규 특유의 리얼리즘이 깊어진 작가적 시선과 만나 새로운 세계를 직조해낸 작품이다사업에 실패하고 건설노동자로 일하는 남편과 병원 식당의 조리실에서 일하는 아내가 처음 만났던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두 사람의 인간성과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파괴되어가고 아들을 향한 폭력과 딸의 가출 등으로 가족마저 붕괴되어가는 과정을 그려 보여준다삶이란 비애롭고도 쓸쓸하다는 주장을 증명하듯이 말이다피해자와 가해자가 극명하게 갈릴 것 같으나 현실세계에서는 그렇지만도 않다손홍규 소설의 인물들은 일방적인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도를 넘어서 모순덩어리 세상에서 인간적인 가치를 조금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군상들이다

 

 

 

 

 

묵묵한 글쓰기과 치열한 작가의식의 힘

 

 

 

지난 20세기의 20년 한국소설은 다양한 장르적 미학의 실험과 지난 세대의 역사적 현실감에서 벗어나 세대적인 특성을 서사화하면서 더러는 추동하기도 하고 더러는 추적해왔다그 흐름 안에서 작가 손홍규는 도도하리만치 본인의 소설작법을 고집하며 묵묵하고도 꾸준하게 비정규직이주노동자건설노동자 등 사회의 구석지고 어두운 이웃에 시선을 고정하고 천착하며 작품을 통해 인간성 회복을 꿈꿔온 듯하다더 깊어지고 넓어진 소설에 대한 고민을 담은 작가의 말에서는 그의 치열한 작가 의식을 엿볼 수 있다짐작건대 고단할지언정 부단히 도전을 해온 작가 손홍규의 다음 행보는 역시 참다운 사람 냄새 나는 소설일 것이다.

 

 

 

문학은 인간의 마지막 희망이다문학이 부서지면 세계도 무너진다그러므로 잊지 말아야 한다문학과 비슷해 보이는 것은 문학이 아니다문학만이 문학이다소설과 비슷해 보이는 것은 소설이 아니다소설만이 소설이다소설이 무어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이유는 소설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고 소설을 규정할 수 없는데 소설이 무언지 어찌 아느냐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아무도 소설을 규정할 수는 없지만 소설을 보기만 하면 그게 소설임을 누구나 알아본다이게 바로 소설이구나하며 나지막이 감탄하게 된다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다내가 쓰고 싶은 건 소설과 비슷해 보이는 소설이 아니라 소설과 똑같은 소설임을 말해주고 싶었다—「작가의 말에서

목차

예언자

 

옛사랑

 

노 파사란

 

눈동자 노동자

 

무너지다 만 사람

 

기찻길 아이들

 

저녁의 선동가

 

환멸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저자의 말

「예언자」는 이십여년 전 사랑했던 고모를 안장하던 날 당신의 막내아들인 사촌 형이 들려준 이야기에서 태어났다. 마지막 문장을 쓰기까지 참 오래 간직하고 살았다. 「옛사랑」은 사랑이란 지나가고 난 뒤에야 알아볼 수 있음을 알려준 이들을 떠올리며 썼다. 아버지가 사라지고 없던 어느날 어머니와 함께 당신들의 젊은 시절 한 자락이 서린 마을을 찾아간 적이 있는데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던 어머니가 마침내 무언가를 기억해냈다. 눈가에 비친 한방울 눈물에 한생이 담길 수도 있음을 그때 알았다. 「노 파사란」은 생전에 잠깐 뵈었지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아내의 할머니를 떠올리며 썼다. 지나가도록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기어이 지나가버린 야만의 시간을 견뎌야 했던 그 시대 사람을 기억하고 싶었다. 「눈동자 노동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다리와 허리가 부러지고 있을 일당 노동자와 하수관 매립 공사를 하다 흙더미에 매몰되어 세상을 떠난 옛 친구를 떠올리며 썼다. 나는 그이를 눈빛으로만 기억할 수 있다. 「무너지다 만 사람」은 고향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너지다 만 집에 깃든 사연에서 비롯된 이야기이고 「기찻길 아이들」은 내게 우정을 가르쳐준 고향 친구에게 「저녁의 선동가」는 아무에게도 자신의 슬픔을 말할 수 없는 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환멸」은 어린 시절 살가웠으나 나이를 먹어가며 소원해졌던 사촌 형이 당신 집 대문 앞에서 얼어 죽은 뒤부터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면 동기간 없이 자란 내게 피붙이나 다름없는 이들이 많았던 건 그 시대가 내게 허락한 거의 유일한 행운인 듯하다.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를 쓰는 동안에는 귓가에서 바람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기에 우리가 꾸었던 꿈을 잊고 사는가. 지금 꾸는 이 꿈을 다음 생에 누구한테 들려줄 수 있 을까.   글을 쓰는데 딸이 내 방으로 들어와 놀아달라며 방해할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아빠 글 쓰잖아, 아빠는 뭐 하는 사람이지? 하고 묻는다. 딸은 가르쳐준 대로 소설가라고 답한다. 그리고 어느날, 딸은 내게 물었다. 소설이 뭐야? 소설은 말야 …… 신중하게 낱말을 골라보지만 소설을 설명할 수 있는 적당한 문장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하려던 말은 이런 말이었다. 아빠가 누구에게도 위임하지 않은 마지막 신념은 이렇단다. 문학은 인간의 마지막 희망이다. 문학이 부서지면 세계도 무너진다. 그러므로 잊지 말아야 한다. 문학과 비슷해 보이는 것은 문학이 아니다. 문학만이 문학이다. 소설과 비슷해 보이는 것은 소설이 아니다. 소설만이 소설이다. 소설이 무어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이유는 소설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고 소설을 규정할 수 없는데 소설이 무언지 어찌 아느냐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아무도 소설을 규정할 수는 없지만 소설을 보기만 하면 그게 소설임을 누구나 알아본다. 아, 이게 바로 소설이 구나, 하며 나지막이 감탄하게 된다.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다. 내가 쓰고 싶은 건 소설과 비슷해 보이는 소설이 아니라 소설과 똑같은 소설임을 말해주고 싶었다.   소설집을 정성스레 엮어준 창비에 깊이 감사드린다.  

2020년 가을 손홍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