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는 것은 없다고 믿는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김준성문학상 수상 시인 유병록 두번째 시집
외면할 수 없는 고통을 품고 최선으로 마련하는 따뜻한 슬픔의 자리
올해로 등단 10년을 맞은 유병록 시인의 두번째 시집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가 창비시선 450번으로 출간되었다. 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인은 삶과 죽음 사이의 균열에 숨결을 불어넣는 대지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개성적인 시 세계를 보여준 첫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창비 2014)로 김준성문학상을 받았으며, 내일의 한국작가상을 수상하는 등 한국 서정 시단의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 시인으로 주목받아왔다.
6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슬픔과 함께 살아온 지난 시간의 흔적들을 들려주는 쓸쓸하면서도 담백한 목소리가 눅진한 감동적인 시편들을 선보인다. 특히 어린 아들을 잃은 아비의 비통한 마음이 묻어나는 시편들이 뭉클하다. 가슴을 저미는 상실의 시간 속에서 “아픈 몸으로 써 내려간 고통의 시집”이자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안간힘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믿음의 시집”(박소란, 발문)이다.
시집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가슴 안쪽에서 끓어오르는 슬픔의 언어가 “고통을 연주하는 음악”(「악공이 떠나고」)처럼 사무쳐 흐른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 속에서 시인은 불현듯 “내가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그랬을 것이다」)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러나 숨 쉬는 것조차 버겁고 모든 게 얼어버리는 차가운 어둠 속에서도 온기가 스며드는 순간이 있다. 생활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일상의 무게가 있다. 그렇기에 시인은 “슬픔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의 언저리에 삶의 온기를 불어넣으며 “나를 살아가게 하는 그저 그런 것들”과 더불어 “보잘것없는 욕망의 힘”(「다행이다 비극이다」)으로나마 묵묵히 살아간다. 고단한 삶의 깊은 수렁을 건너가는 “불안한 숨소리”와 “고단한 발소리”(「염소 계단」)에 귀를 기울이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보잘것없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건/그저 애쓰는 일”(「안다 그리고 모른다」)뿐인 삶의 비의를 되새겨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어린 아들을 먼저 세상 저편으로 떠나보낸 심정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시인은 최근에 펴낸 산문집 『안간힘』(미디어창비 2019)에서 참척의 아픔과 살아 있음의 치욕스러움을 절절히 토로했다. 그는 오늘도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너무 멀고 먼” 그곳, “근처까지만 갔다가 돌아오는” 그곳, “널 두고 온/거기”(「너무 멀다」)를 서성거린다. 사람들은 고통의 “바닥을 딛고 일어서라”(「딛고」) 위로하지만 상처가 너무도 크기에 차마 이겨낼 수가 없다. 그러나 애끊는 슬픔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고 “시간이 지나면/고통은 잦아들”기 마련, 상상조차 하기 싫은 “나의 불행이/세상에 처음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시인은 “잊고/다시 살아가리라”(「눈물도 대꾸도 없이」) 다짐한다. “들키고 싶지 않”(「슬픔은」)은 슬픔을 까맣게 타버린 “몸속 깊숙한 곳으로 밀어두”고 “아무렇지 않은 척” “회사에서는 손인 척 일하”고, “술자리에서는 입인 척 웃고 떠들”고, “거리에서는 평범한 발인 척 걷”(「슬픔은 이제」)는 시인의 뒷모습이 눈물겹기도 하다.
삶이 지속되는 한 고통과 슬픔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슬픔을 외면할 수 없다면 그 고통의 자리에서 안간힘으로 살아갈 도리밖에 없다. 문득 “나는 살아 있구나 깨닫다가//참을 수 없이 수치스러워지”(「불의 노동」)는 비애감 속에서 시인은 “슬픔이/인간을/집어삼킬/수”(「수척 1」)도 있지만 “인간이/슬픔을/집어삼키며/견딜/수/있다는/사실”(「수척 2」)을 깨닫는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현실”에서 오로지 “사라지지 않는 것은 믿음뿐”(「사과」)이기에 시인은 “온기라고는 없는 서러운 바닥”(「이불」)에서도 가슴을 쥐어뜯는 고통의 삶을 일으켜세우는 생명 같은 시를 쓴다. “붙잡을 게 없을 때/오른손으로 왼손을 쥐고 왼손으로 오른손을 쥐고/기도”(「위안」) 하고, “흐느낄 만한 곳에서 흐느”끼고 “웃을 만한 곳에서 웃”(「산다」)으며 산다. 그리고 우리는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그의 시 쓰기가 굳건하게 지속되리라는 것을 믿는다. 그의 시가 누군가의 슬픔을 다독이고 울음의 자리를 내어주기도 할 것을 안다. 그렇기에 단 두 문장의 ‘시인의 말’이 더욱 절실하게 마음을 두드린다. “쓰겠습니다. 살아가겠습니다.”
제1부
검은 돌 흰 돌
염소 계단
염소를 기르는 밤 1
염소를 기르는 밤 2
슬픔은
슬픔은 이제
사유지
개를 기르는 사람
사과
이사
망설이다가
미덕
그랬을 것이다
제2부
문을 두드리면
측량사
질문들
불의 노동
수척 1
수척 2
기분 전환
회사에 가야지
다행이다 비극이다
말하지 않은 너의 이야기가 너무 소란스러워
스위치
안다 그리고 모른다
딛고
모두 헛것이지만
장담은 허망하더라
제3부
너무 멀다
사과
산다
너무나 인간적인 고통
눈물도 대꾸도 없이
사기
악공이 떠나고
위안
간다
둔감
파도가 간다
발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제4부
퇴근을 하다가
우리, 모여서 만두 빚을까요?
52수6934
지구 따윈 없어져도 그만이지만
미지의 세계
역사(驛舍)의 격언
만날 수 없는 사람
마흔이 내린다
눈 오는 날의 결심
모자
이불
우산
발문|박소란
시인의 말
쓰겠습니다. 살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