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집회 현장에 대한 버틀러의 철학적 분석
젠더·인종·계급·세대적 소수자에 대한 윤리적 응답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이자 젠더 및 퀴어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의 신간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가 출간되었다. 기존 저작을 통해 여성주의, 퀴어 연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버틀러는 최근에는 정치철학과 윤리학을 넘나들며 인간으로서의 삶의 가능성과 공동체의 윤리적 관계성을 모색하고 있다. 이 책 역시 그러한 학문적·실천적 수행의 일환으로,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 운동과 같은 동시대 집회 현장에 대해 대담하고도 성찰적인 분석을 보여주며, 특히 미등록 이주민에 대한 차별과 성소수자 및 이슬람교도에 대한 혐오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논의한다.
버틀러는 이 책에서 자신의 담론 전체를 대표하는 개념이 된 수행성 개념에 대해 다시 한번 천착하면서, 불안정 상태에 처한 사람들의 집회가 가진 수행적 힘과 그 전망에 대해 독보적인 분석을 보여준다. 철학적 사유와 현실참여가 합일된 버틀러의 저항적 글쓰기가 빛을 발하는 이 책은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등에 대한 유무형적 폭력과 혐오발언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여전히 논란 중인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데도 명료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살아 있다는 사실은 다른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주디스 버틀러가 2010년 브린 모어 대학교에서 진행한 시리즈 강연문 세개를 포함, 여러 장소에서 낭독한 글들을 수정·보완해 묶은 것이다. 버틀러는 이 책을 통해 동시대 시위들이 우리로 하여금 정치, 민주주의, 인민, 행위성에 대해 새로운 사유를 하도록 이끌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기존 정치와 민주주의의 인식론적 틀을 구성했던 사유 방식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집단들, 장소들에 대해 깊은 사유를 전개하고 있다. 기존 인식론에서 배제되어왔던 타자들의 행위성을 조명하는 이와 같은 논지는 버틀러가 자신의 저작들에서 이미 중요하게 다뤄왔던 ‘관계성’과 ‘상호의존성’에 기인한다. 버틀러는 기본적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나와 너 사이의 관계에 의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우리의 관계성과 상호의존성은 자연스럽게 윤리의 문제로 이어진다. 버틀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고 선택할 수도 없는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이 지상에서 공거(cohabitation)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라면, 우리의 생명은 이미 타자들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타자들의 생명과 다양성, 그리고 복수성을 보존하는 것은 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가진 윤리적 책무인 것이다.
‘혐오스러운 타자’들로부터 발생하는 의무
젠더, 인종, 계급, 세대 등 각자가 놓인 위치 및 상황에 따라 더 불안정하고 더 취약한 집단에 속한 이들은 집단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자신의 개인적 무능이나 무책임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누군가를 딛고 올라가서 뒤처진 자들을 혐오하거나, 혹은 뒤처진 자신을 혐오하도록 이 구조가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버틀러에 따르면 “삶의 불안정성을 차별화해 배치하고 삶 자체를 차별적으로 가치 매기기 위해 일련의 척도를 설정하는 권력”(279면)에 대한 저항은 그렇기에 자신의 문제를 전체 사회구조의 문제로 확장하는 문제와 다름없다. 버틀러는 그런 저항을 2010년대 전세계에서 일어난 집회와 시위에서 읽어내고 있다. ‘이집트 타흐리르 광장 시위’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 운동’ ‘점령하라 운동들’ ‘터키 게지 공원의 집회’ 등을 비롯해 트랜스젠더 성노동자들, 미등록 이주 노동자들, 거주지를 요구하는 난민들 등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서 출현하는 시위를 포괄하면서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침묵을 포착한다. 버틀러에게 이들이 처한 취약성, 상호의존성, 불안정성은 극복하고 거부해야 하는 부정적인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잠재적 평등과 살 만한(livable) 삶의 조건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는 우리 서로 간 의무의 한 토대”(307면)인 것이다.
거리에 나선 신체들의 전복성과 수행성에 대해
삶이 불안정하고 취약하다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맥락에서는 수치와 고통의 근원이다. “헤게모니적 담론 안에서 ‘주체’로서 출현하지 않고, 출현할 수도 없는 이들”(57면)인 취약한 이들이 무리를 이루어 거리로 나서는 일은 검열을 거치지 않는 미디어의 도움이 없다면 제대로 재현되지도 못한다. 그러나 “권리를 가질 권리”를 요청하는 이들의 출현은 계속 있을 것이고, 지금 세계 곳곳의 시위와 집회들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거리에서 그저 함께 모여 있거나, 침묵을 지키고 있거나, 자신이 지금 있는 자리를 떠나지 않는 방식으로 거리에 나타난다. 버틀러는 이러한 방식으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이들을 ‘수행적’ 신체로 바라본다. 기존의 헤게모니적 프레임이 일시적으로 붕괴되거나 해제되는 순간을, 그럼으로써 출현하는 수행적 전복을 철학적 사유를 통해 명료화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집회, 혹은 연대는 언제나 비폭력의 원칙을 따라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버틀러는 비폭력이란 “대립이 일어나는 어떤 공간에서 자기 스스로 그리고 다른 이들과 함께 견디고 절제하며 처신하는 방식”(270면)이자 “살아 있는 존재의 불안정한 특성을 헤아리는 일상적 실천”(270면)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비폭력이 일종의 실천이자 행동이라는 버틀러의 주장은 비폭력의 수행성에 대한 논의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차별에 반대한다
페미니스트인 버틀러는 또한 “여성”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인정 폭력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얼마 전 미디어를 뜨겁게 달궜던 모 여대의 트랜스젠더 학생 입학 관련 논쟁이나 소위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의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 발언과 배제에 대한 이 책의 논지는 매우 단호하다. “젠더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토대 위에서는 차별, 괴롭힘, 폭력에의 노출이 강화될 게 분명한 사람들”(206면)인 트랜스젠더를 여성이 아니라고 배제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여성”을 “차별, 인종주의, 그리고 배제의 기제”로서 오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버틀러는 페미니즘은 ‘제대로 된 여자’라는 관념에 반대하기 위해 존재해왔다고 말하며, 페미니즘이 젠더에 기초한 모든 형태의 차별에 반대하는 것임을 생각해보면,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페미니즘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음을 힘주어 말한다. 정체성 정치와 인정 투쟁에 함몰된 채 자기 집단에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다른 집단에 대한 차별에 눈감는 데 쓰이는 것에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김응산, 양효실 두 옮긴이의 공동작업을 통해 번역되었다. 현대예술과 시각문화, 퀴어이론과 페미니즘을 연구하는 두 옮긴이는 앞서 출간된 역서들의 개념어 번역상 문제점을 바로잡아 버틀러의 이론이 국내에서 보다 정확하게 사유될 수 있도록 힘썼다. 두 옮긴이의 노고에 힘입어 버틀러가 이 책을 통해 보여준 정치윤리학적 논의들, 퀴어 윤리적 사유, 주체 및 젠더 구성에 대한 페미니즘적 관점이 국내에서 더욱 활발하게 토론되리라 기대한다.
들어가며
1장 젠더 정치와 출현할 권리
2장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3장 불안정한 삶과 공거의 윤리
4장 신체의 취약성, 연합의 정치
5장 “우리 인민”— 집회의 자유에 대한 사유들
6장 그릇된 삶에서 올바른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감사의 말
출처
옮긴이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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