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446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안희연  시집
출간일: 2020.07.24.
정가: 13,000원
분야: 문학,
전자책: 있음

이 언덕엔 마음을 기댈 나무 한그루 없지만 

 

 

그래도 우린 충분히 흔들릴 수 있지

 

 

신동엽문학상 수상 시인 안희연 신작 시집

 

 

살아 있어서 울고 있는 존재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미더운 손길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한 이후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쳐온 안희연 시인의 세번째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이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등단 3년 만에 펴낸 첫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비 2015)로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하고, 2018년 예스24에서 실시한 ‘한국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 투표에서 시 부문 1위를 차지하는 등 요즘 젊은 시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시인이다. 창작 활동뿐만 아니라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부치는 ‘304 낭독회’ 등 사회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대중적으로 친숙한 시인이기도 하다. 

 

소시집으로 묶은 두번째 시집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현대문학 2019)에 이어서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더욱 깊어진 시적 사유와 섬세한 언어 감각이 돋보이는 서정과 감성의 다채로운 시세계를 선보인다. 삶의 바닥을 바라보며 세상의 모든 슬픔을 헤아리는 “깨달음의 우화와도 같은”(이제니, 추천사) 뜨겁고 간절한 시편들이 공감을 자아내며 가슴을 깊이 울린다. ‘2020 오늘의 시’ 수상작 「스페어」를 비롯하여 57편의 시를 3부로 나누어 실었다.

 

 

 

안희연의 시는 “쇠구슬 같은 눈물”(「연루」)이 차오르는 슬픔의 자리에서 태어난다.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이라니. 시인은 세상의 모든 죄를 대속하려는 심정으로 시를 쓴다. 돌이켜보면 모두가 가엾은 존재들의 슬픔을 끌어안으며 대신해서 울어주고, “온몸으로 부딪쳐가며 얻은 이야기들”(「구르는 돌」)을 그들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온 우주가 나의 행복을 망치려”(묵상」) 드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아 있는 자체가 고통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은 견디기 위해 존재하는 것”, 그러니 “그게 무엇이든 무엇도 아니든” “계속 가보는 것 외엔 다른 방도가 없”(「구르는 돌」)다. 그리하여 시인은 “더럽혀진 바닥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열과(裂果)」) 다시 시작하고, 실패와 절망 끝에 남겨진 “나머지의 나머지로서의 나”(「스페어」)를 사랑하며 ‘지금-여기’에서의 삶을 살아가려 한다.

 

시인은 그토록 오랜 세월 “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가라앉는 동안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다”(시인의 말)고 말한다. 그러나 “미로는 헤맬 줄 아는 마음에게만 열리는 시간”(「추리극」)임을 알기에 저 너머 “다른 세계로 향하는 계단”(「스페어」)이 있으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절망과 슬픔 속에 묻히기에는 “너무 커다란 우리의/영혼을 조망하기 위해”서 “뒤로 더 뒤로” “멀리 더 멀리 가보기로”(「자이언트」) 한다. 시인은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것”이라 자탄하지만 조금도 슬퍼하지 않는다. 슬퍼하다니. “물거품처럼 사라질”(「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거야」) 이야기일지라도 절망 뒤에 오는 더 큰 절망을 기꺼이 껴안으며 “최선을 다해 산 척을 하는”(「업힌」) 마음으로 삶을 견디어가는 시인의 노래는 오히려 삶의 “고요한 맹렬”(양경언, 해설)이자 희망일 것이다. 

목차

제1부

 

불이 있었다

 

소동

 

굴뚝의 기분

 

업힌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면벽의 유령

 

오후에

 

망종

 

선잠

 

미동

 

마중

 

연루

 

알라메다

 

사랑의 형태

 

추리극

 

 

제2부

 

자이언트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빛의 산

 

역광의 세계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거짓을 말한 사람은 없었다

 

불씨

 

표적

 

지배인

 

단란

 

폭풍우 치는 밤에

 

가끔의 정원

 

에프트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거야

 

 

영혼 없이

 

풍선 장수의 노래

 

생선 장수의 노래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실감

 

아침은 이곳을 정차하지 않고 지나갔다

 

 

제3부

 

반려조(伴侶鳥)

 

그의 작은 개는 너무 작아서

 

덧칠

 

앵무는 앵무의 말을 하고

 

검침원

 

양 기르기

 

캐치볼

 

태풍의 눈

 

측량

 

묵상

 

스페어

 

 

호두에게

 

알혼에서 만나

 

나의 규모

 

나의 투쟁

 

구르는 돌

 

슈톨렌

 

 

열과(裂果)

 

 

해설|양경언

 

시인의 말

안희연은 어떤 슬픔의 자리를 끝없이 되묻고 되묻는다. 되돌아가 떠올리게 되는 최초의 슬픔 속에서. 다른 이름으로 되풀이하여 찾아드는 이후의 슬픔을 마주하면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한 사람의 죽음, 아니 죽었으나 여전히 살아 있는 그 모든 생명을 되살리면서. 다시 제대로 죽어가는 영원의 순간으로 되짚어내면서. “최선을 다해 산 척을 하는”(「업힌」) 방식으로 삶을 견디고 있는 자신을 제 곁의 사물들이 일제히 쳐다보는 순간을 아프게 자각하면서. 너무나 작다고 믿어왔던, 그러나 실은 “너무 커다란 우리의/영혼을 조망하기 위해”서 “뒤로 더 뒤로 가보기로” “멀리 더 멀리 가보기로”(「자이언트」) 하면서.

이때 이 언어는 그저 겨우 나아갈 뿐인 언어로서. “사실은 흰 접시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데/흰 접시의 테두리만 만지작거”(「시」)리는 무엇으로서. 그렇게 그 무엇도 밝혀낼 수 없는, 오직 지시하는 대상 그 자체만을 간신히 지시할 수밖에 없는 언어를 통해 존재의 결핍을 그대로 껴안음으로써 역설적으로 삶의 충만함을 온전히 드러내 보여준다.
“‘밤이 밤이듯이’ 같은 문장을 사랑하기”(「호두에게」)로 하면서, 살아 있기에 울 수 있는 인간의 바닥을 연민 없이 바라보는 것. “슬픔의 입장”(「폭풍우 치는 밤에」)을 헤아리는 섬세하고도 정확한 문장을 통해, “슬픔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려”(「소동」)는 깨달음의 우화와도 같은 이 낱낱의 시편들을 통해 안희연은 기어이 어떤 연약한 강인함에 가닿는다. 그리하여 “슬픔을 세는 단위를 그루라 부르기로 한다/눈앞에 너무 많은 나무가 있으니 영원에 가까운 헤아림이 가능하겠다”(「열과」)라는 시집의 맨 마지막 문장에 도착했을 때 어느덧 나는 너무 많은 슬픔을 담담히 걸어가는 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제니 시인

저자의 말

아이의 손을 잡고 언덕을 오르는 상상을 한다. 여름 언덕을 오르면 선선한 바람이 불고 머리칼이 흩날린단다. 이 언덕엔 마음을 기댈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없지만 그래도 우린 충분히 흔들릴 수 있지. 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가라앉는 동안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고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도 같다. 울지 않았는데도 언덕을 내려왔을 땐 충분히 운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이 시집이 당신에게도 그런 언덕이 되어주기를.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것이고, 이제 나는 그것이 조금도 슬프지 않다.  

2020년 7월 안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