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서는 존재와 진리에 대한 비형이상학적 탐구 및 그에 기반한 리얼리즘론, 제3세계문학론, 근대 적응 및 극복의 이중과제론, 주체적 외국문학연구 등 저자가 반세기도 넘는 동안 수행해온 학문적·비평적·사회적 실천의 중심에 자리한 담론들 대부분을 혹은 맹아적 형태로, 혹은 거의 완성된 모습으로 품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한다. 한국문학계의 현실에 밀착된 문제의식을 집중적인 학문적 탐구와 연마를 통해 확대, 심화함으로써 탄탄한 비평적 입론으로 가다듬어낸 성과인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장차 한국평단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게 될 주요한 비평담론들의 모태이기도 하다. 동시 출간된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와 함께 읽으면 이 책이 제기하는 원형(原形)의 주제들이 어떻게 움트고 성숙해 결실하는지 목격하는 진귀한 경험이 될 것이다.
로런스 사유의 독창적 면모들과 ‘사유의 모험’으로서의 소설
로런스 연구서로 국한해 보더라도 본서는 여러모로 독보적이다. 학위논문이 제출된 1972년은 로런스 사후 40여년이 지난 때였으나 당시 이 소설가에 대한 평가가 확립된 형국은 아니었다. 평자들이 ‘반지성주의자’나 ‘예언자’ 같은 다소 조롱섞인 호명으로 그를 규정하고자 했다면, 그를 ‘성(性)문학의 대가’로 여기는 대중적 인식도 여전했다. 케임브리지대학출판부에서 40권에 이르는 전집으로 간행되고 수많은 연구결과가 축적된 오늘날에도 로런스의 핵심적인 예술적·사상적 성취가 어떤 것인지 방향을 잡기 어렵다는 호소를 드물지 않게 듣게 된다. 동시대 로런스 연구의 현실을 염두에 두면서 로런스의 예술적·사상적 성취의 핵심을 새로 규명해내는 과제에 집중하는 본서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F. R. 리비스의 로런스 읽기와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비판이다. 리비스는 초창기 로런스 비평의 오독과 혼란의 와중에 이 작가를 영국 소설전통의 계승자로 자리매겼으며, 로런스 소설이 추상적·이론적 사유와는 다른 차원의 창조적 사유를 작가의 예지로써 담아낸다고 역설한 바 있다. 저자는 이런 리비스의 시각에 동의하는 한편 로런스를 하이데거와 대면하게 함으로써 로런스의 근대비판 및 새로운 사유의 모색이 갖는 문명적·예술적 함의를 더욱 깊이 궁구해나간다.
로런스는 일생 ‘존재’와 진리에 대한 관심을 추구하며 소설로 구현했고, 소설이라는 형식에 굳건한 믿음을 갖고 있던 작가다. 그는 소설은 사유의 모험이며 인간은 사유의 모험가라는 생각에서 출발해 육신으로 살아 있는 존재, ‘진정한 실체’에 대한 사유로, 또한 서양 철학전통의 존재론과 형이상학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제기로 나아간다. 모든 소설의 배경에는 일정한 형이상학이 깔려 있으며 예술조차도 형이상학에 전적으로 좌우된다, 그리고 오늘날 형이상학은 닳아서 애처로울 정도로 얇아지고 예술은 온통 헐어가고 있다는 것이 당대 예술에 대한 로런스의 진단이다. 저자는 여기서 로런스와 하이데거 사유의 상통성을 발견하는데, 기성 철학이 존재의 의미를 추상의 영역으로 밀쳐내고 진정한 존재로부터 떨어져나옴으로써 인간과 지상의 민족들의 쇠퇴를 가져왔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문제의식인 것이다. 플라톤 이래의 형이상학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니체와 맑스에서 결정적 전기를 맞지만 양자는 근대주의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며, 저자가 보기에 로런스의 사유는 근대문명의 역사를 인정하는 가운데 존재의 진리를 추구하면서 기성 철학을 능동적으로 극복한, 세계사적으로 의미를 갖는 성취이다.
로런스에게 진정한 예술은 항상 진리의 일어남이며, 진정한 예술가는 본질적으로 리얼리스트로, 미래에 대해 말하면서 그 미래의 새로운 토대를 마련하는 사람(예언자)이다. 그리고 그런 특별한 명예를 부여받은 존재가 바로 소설가이다. 소설 작업에는 총체성과 균형, 구체적 세부의 풍부함이 요구되며, 소설가는 그 사소한 세부들의 풍부함을 통해 ‘그 배후에 자리한 이름 붙일 수 없는 불꽃’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소설이 존재의 본질적 의미를 탐구하는 사유의 모험의 특수한 형태인 한, 그의 소설세계를 정당하게 판단하려면 먼저 로런스가 내세운 최고의 사유의 모험의 차원에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이 저자의 인식이다.
존재의 진리의 역사와 기술문명의 본질을 탐구하다
로런스는 『무지개』(1915)를 통해 영국적 전통사회의 해체와 산업사회의 등장을 배경으로 공동체와의 유대를 상실하고 근대 기계문명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서려는 개인들의 모험을 성공적으로 그려낸다. 이 여정은 아직 ‘피와 피의 친밀한 교감’이 살아 있는 공동체에 뿌리박고 있으면서 자식들만은 지상 최고의 삶을 누리기를 열망하는 식으로 근대화의 욕망을 발견하는 1세대, 붕괴해가는 공동체의 세계 속에서 지식과 교육을 통해 근대사회의 독립적 개인이 되어가는 가운데 양자 사이의 균형을 가까스로 유지하는 2세대, 전통적 유대를 거의 상실하고 근대문명을 마주하는 과정에서 다른 길을 찾아 자신의 ‘존재’를 세우는 3세대에 걸친 자아의 모험의 여정이다. 로런스는 이를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방법론적으로 재래식 사실주의뿐 아니라 종래의 리얼리즘과도 결별한다. 역사적 현실을 체현한 자아의 모험을 한 차원 높은 진리를 구현하는 과정으로 그려내며, 이는 『무지개』를 진정한 리얼리즘의 결과물로 만들어준다. 작중인물들은 근대 산업문명을 역사로 인정하는 한편 그것이 가져오는 소외를 극복할 대안을 찾아 분투하는데, 3세대 어슐라는 여성운동을 비롯한 당대 가장 진보적인 사상들을 접하고 경탄하지만 그것들이 근대사회에서 갖는 한계 또한 분명하게 인식한다. 근대적 휴머니즘과 산업주의의 깊은 연관을 감지하고 반감을 느끼는 어슐라는 이 ‘기계의 세계’를 떠나기로 한다. 한때 동경했던 왕성하게 활동하는 남자들의 세계 안에서 살고 일하기를 배울 뿐 아니라 자신이 그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의 본모습을, 그리하여 그 세계를 떠날 필요성을 진정으로 깨닫는 것은 어슐라의 창조적 모험의 결실이다. 재래식 안정을 버린 어슐라의 삶은 늘 위태롭게 흔들릴 것이지만 개별 존재로서 진정한 성취를 이룬 것이며 새 미래의 기초를 세운 것이다.
후속작 『연애하는 여인들』(1920)에서는 어슐라가 새로운 존재를 향한 모험을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며 근대사회와의 온전한 대면으로 이어진다. 근대 산업문명의 진정한 성격은 무엇인가, 인간의 본질적 운명이라는 측면에서 그 함의는 무엇인가가 어슐라와 버킨의 모험을 통해 드러난다. 로런스는 우선 근대문명이 초래한 파괴적 결과에 주목하는데, 그의 비판은 산업주의를 단호하게 하나의 역사적 운명으로 인정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비판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 작품은 1914년 무렵 영국사회를 생생하고 폭넓게 그리는 가운데 특히 ‘산업계의 거물’장에서는 초기 자본주의의 기독교적·인도주의적 잔재를 버리고 더 신성한 ‘거대한 산업기계의 세계’를 수용하는 역사를 집약해 보여준다. 이를 통해 로런스는 부르주아휴머니즘의 이데올로기적 성격과 계급투쟁의 필요성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 사상을 공유하면서도 그들이 통찰하지 못한 산업사회의 핵심을 포착한다. 이 체제가 더 발전하면 기술적 합리성을 수용한 보편적 합의가 이루어지며 노동계급은 혁명의 열정 대신 실용적 이득과 특정한 생활방식에 만족감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는 로런스가 보기에 근본적 소외의 상태로, 진정한 안정성을 결여한 것이다. 산업계 거물로 상징되는 인물 제럴드가 진정한 관계맺음의 제안을 거절하고 결국 홀로 파멸을 맞는 것은 그 개인의 실패이자 산업문명의 본질을 돌아보게 하는 결말이다. 그 대안은 버킨이 감행하는 사유의 모험으로 제시된다. 그는 진정한 사랑은 ‘함께 자유로움’이라며 어슐라에게 ‘세상의 어떤 곳들로부터 우리들 자신의 아무데도 아닌 곳 속으로’ 떠나기를 제안한다. 이는 현실에서 발을 빼는 행위가 아니다. 산업주의·인본주의·이상주의 같은 오늘의 ‘신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우리의 시선을 위험이 자리하는 곳으로 이끌어 거기에서 ‘구원의 싹’의 성장을 목격하게 하는 일이다. 이렇게 『연애하는 여인들』은 기술시대 예술의 과제에 동참하며, 이 대목에서 로런스는 하이데거의 예술관과 다시 만난다.
오늘 우리 앞에 놓인 새로운 도전
에필로그에서 다루는 『날개 돋친 뱀』(1926)은 『연애하는 여인들』에서 최고의 성취를 보여준 창조적 모색의 속편 격으로, 버킨이 감행한 모험의 연장에서 새로운 인간사회의 기반을 비유럽·비산업사회에서 찾아내야 할 필연성을 구현하고 있다. 식민지배를 받던 민족이 새로운 국가정체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총체적인 문화적 혁명에 역점을 두고 전통 다신교신앙을 국교로 선포하기에 이른다는 결말이 갖는 소설적 결함에 대해서는 여러 평자가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한편 이런 지적들은 유럽정신의 지배, 유럽의 정치적·경제적·이념적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제3세계의 절박한 필연성을 외면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20세기 초 활발하게 전개된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등 제3세계의 민족해방운동·혁명운동은 『날개 돋친 뱀』에 보이는 로런스 역사인식의 적실성을 보여주며, 종교와 대중정치운동의 관계 및 탈식민주의 논의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 크다. 그의 작품세계는 이후 더 큰 소설적 성취를 보여주지 못하는데 이는 척박한 기술시대의 현실이 온전히 성취된 장편소설 쓰기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현실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일생 지속되면서 이후 다른 작품들에도 일관된 성격을 부여한다.
이처럼 이 책은 향후 서구의 여러 비평담론들이 내놓게 될 유효한 발상들을 내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런 담론들의 전개과정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된 지금의 시야에서 읽을 때 새삼 두드러지는 많은 통찰들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가령 남녀의 새로운 관계 모색이 문명의 차원에서도 핵심적이라는 로런스의 문제의식을 부각한 것은 페미니즘에서도 주목할 만하며, 『날개 돋친 뱀』의 제3세계적 의의를 처음으로 지적한 대목에는 이후 로런스 비평 안팎에서 전개될 탈식민주의 담론의 요체가 들어 있다. 이 논의의 밀도와 치열함은 로런스가 모색한 ‘다른 길’을 물질적 조건과 정신적 성숙을 동반한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으로 연결하려는 저자의 지적 열망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후 50년에 걸쳐 무르익은 대로 서구 자본주의문명을 넘어선 문명대전환의 큰 구상은 이 책에서 모든 싹을 틔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저자의 말
제1장 서설: 사유의 모험으로서의 소설
제2장 『무지개』와 역사
제3장 『연애하는 여인들』과 기술시대
에필로그: 『날개 돋친 뱀』에 관한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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