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든한 날개가 되어 줄 일곱 가지 이야기
2017년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 동화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신인 작가 김우주의 첫 동화집이 출간되었다. 교실, 택시, 공항, 슈퍼 등을 무대로 오늘을 살아가는 어린이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일곱 편의 동화를 묶었다. 어려운 환경에 놓인 어린이들이 소외당하는 문제점을 꼬집으며 현실을 낯설게 뒤집는 방식으로 독자에게 재미와 감동을 선사하는 작가의 역량이 믿음직스럽다.
그늘진 현실을 낯설게 뒤집는 동화
한 번도 교실 창문을 연 적이 없는 학생들, 아빠가 모는 택시를 타고 학원에 가는 아이, 배를 채우기 위해 슈퍼에서 먹을 것을 훔치는 아이, 돌아가신 아빠와 꼭 닮은 남자를 만난 아이……. 『지금은 여행 중』에 담긴 단편에는 그늘져 있지만 저마다의 독특함을 간직한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첫 동화집을 펴내는 신인 작가 김우주는 세상 어디에나 있지만 소외당하는 약한 어린이들에게 주목하여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작가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아이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외면하는 현대 사회를 비판하면서 잔잔하고도 예기치 못한 발상으로 이들을 위로한다.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을 든든하게 채워 줄 일곱 편의 동화를 만나 보자.
섣부른 위로 대신 함께 있어 주는 법
「지금은 여행 중」을 비롯해 동화집 속 주인공들은 암울한 현실 속에서 존재감 없이 힘겹게 살아간다. 「누구」에는 학업에만 몰두한 채 이름이 아닌 숫자로 불리는 아이들이 등장하고, 「직진 말고 유턴」 「슈퍼맨을 믿어」 「엄마를 만나는 방법」 「어느 날 누군가가」에는 부모의 부재에 사춘기까지 겹치면서 방황하는 아이들이 나온다. 결핍과 외로움을 겪고 있는 이 아이들은 슬픈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타인에게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속으로는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간절히 바란다.
작가는 이런 아이들에게 함부로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고, 곁에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비어 있는 옆자리에 앉기(「지금은 여행 중」), 함께 먹을 아이스크림을 건네주기(「슈퍼맨을 믿어」),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 주기(「연우와 나」), 잠깐 시간을 내어 공원에서 함께 놀기(「어느 날 누군가가」) 등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위해 조심스럽게 건네는 위로는 그리 대단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다. 독자들은 아주 작은 이해와 공감으로도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이야기
『지금은 여행 중』에는 주인공의 이름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름 없이 ‘나’로 쓰이는 경우가 많고, 「누구」에서는 모든 등장인물을 이름 대신 숫자로 부른다. 「슈퍼맨을 믿어」에서는 주인공인 규연이의 이름이 나오지만, 정작 규연이는 슈퍼를 지키는 남자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늘 ‘슈퍼맨’이라고 부른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객관화하여 상징하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덕분에, 독자들은 여러 등장인물의 입장에 자신을 대입하여 읽게 된다. 특히 「지금은 여행 중」에서 ‘너’라고 불리는 주인공은 마치 독자 자기 자신인 것처럼 느껴져, 독자들이 주인공의 처지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누구라도 약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섬세한 자세를 일깨운다.
화가 신은정은 각 단편의 분위기와 잘 어우러지게 세밀한 펜 선과 따뜻한 색감 표현으로 무게감 있게 그림을 그렸고, 등장인물이 느끼는 찰나의 감정을 포착해 작품의 긴장감을 한껏 끌어올렸다. 쓸쓸하고 슬프다가도 작은 위로에 미소 짓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일곱 편의 이야기를 모두 읽고, 작가의 다음 책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
작품 줄거리
「누구」 쉬는 시간까지 일어나지 않고 모두가 조용히 공부하고 있는 가운데, 개구리 한 마리가 나타나면서 교실이 발칵 뒤집힌다. 개구리는 대체 어디서 나타났을까?
「직진 말고 유턴」 택시 기사인 아빠 차를 타고 학원을 가던 중, 불쑥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와 버린다. 목적지도 없이 직진만 외치는 이 손님에게 무슨 사연이 있을까?
「지금은 여행 중」 가족이나 친구도 없이 혼자 지내는 주인공 집에 전학생이 찾아온다. 전학생은 마치 주인공과 아는 사이인 것처럼 행동하며 이상한 말을 내뱉기 시작하는데…….
「슈퍼맨을 믿어」 규연이는 동네 슈퍼를 지키며 빈둥대는 동네 오빠 ‘슈퍼맨’을 조금 한심하게 여긴다. 그런데 슈퍼에 간 어느 날, 슈퍼맨은 보이지 않고 어디선가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데…….
「엄마를 만나는 방법」 해외 출장을 간 엄마가 2년 만에 돌아오는 날, 공항에서 엄마를 기다리면서 아빠와 ‘나’는 서로 숨기고 있던 비밀을 하나씩 털어놓는다.
「연우와 나」 무더운 여름 방학에 연우를 처음 만난 ‘나’는 의도와 다르게 학교에서 연우에게 쌀쌀맞게 군다. 하지만 연우가 떠난다니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어느 날 누군가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빠를 잃은 아이. 아빠와 캐치볼을 하면 어떤 기분일까? 그런데 아이의 눈앞에 사진 속 아빠와 똑 닮은 남자가 나타난다.
누구
직진 말고 유턴
지금은 여행 중
슈퍼맨을 믿어
엄마를 만나는 방법
연우와 나
어느 날 누군가가
작가의 말
어렸을 때 부모님은 우리를 데리고 캠핑하러 자주 가셨다. 여름에는 2주 동안 전국을 돌고 올 정도였다. 어린 나이라 제대로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하면 아버지는 괜한 일을 했다며 장난기 섞인 푸념을 하시곤 한다. 그렇지만 강원도 어느 강가에서 물난리를 겪은 일은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늦은 저녁때부터 어디선가 물이 흘러 내려왔다. 어린 마음에 재미 삼아 돌로 댐을 만들던 것도 잠시, 삽시간에 물이 불어서 텐트촌은 난리가 났다. 살림살이들이 떠내려가고, 자던 중에 봉변을 당한 사람들의 아우성이 가득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저 멀리 빛이 보이는 언덕까지 뛰어가라고 다급하게 소리치셨다. 언니와 나, 남동생은 부모님을 두고 가는 게 무서웠지만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가로등 켜진 언덕에서 내려다보니 검은 물이 우리가 조금 전까지 놀던 곳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두려움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아마 언니와 남동생도 그랬을 것이다. 우리 셋은 간만에 손을 꼭 맞잡고 부모님이 무사히 나오시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한참 뒤 부모님은 무사히 빠져나오셨다. 우리는 금세 이 일을 잊은 듯 또 다투고 부모님 속을 썩였지만, 그날의 두려운 감정이 가슴에서 영영 지워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그날은 모든 걸 삼킬 듯한 검은 물이 아니라 어머니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던 노란 불빛과 그 아래에서 맞잡은 작은 손들의 끈적함으로 기억되었다. 혼자였다면 몸서리칠 만한 경험이, 나만큼 약한 이들이 그저 곁에서 함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언제든 돌이켜 볼 만한 추억이 되다니.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을 한 편 한 편 읽어 보다 그 일이 문득 떠올랐다. ‘아, 나는 이러한 이야기를 좋아하는구나. 고만고만한 존재들이, 그들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검은 물을 앞에 두고 서로 손 맞잡고 있는 장면에서 감동을 느끼는구나. 그래서 이 글들을 썼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아동문학을 공부하고 이 책이 나오기까지 도움을 준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그분들에게는 따로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 한다. 지금 여기서는 단 한 사람, 배 속에서부터 함께 이 책을 준비해 준 선우에게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