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쏘가리가 머물던 자리는 하도 아늑해 내가 들어가 눕고 싶더군”
오염된 세계에 던지는 통쾌하고 힘찬 목소리
*창비는 올해부터 첫 시집의 시인들에 한해 초판 한정으로 어나더커버를 제작, 공급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본 보도자료에는 시인과의 간단한 서면 인터뷰 내용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201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정훈 시인의 첫 시집 『쏘가리, 호랑이』가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등단 당시 “언어의 구체성과 밀도를 획득”하면서 “요즘 우리 시단에서 보기 힘든 신화적 상상력의 눈부신 질주를 보여준다”는 심사평과 함께 그해 신춘문예 당선작 중에서 가장 주목받았으며, ‘20년차 화물 트레일러 운전기사’라는 특이한 이력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등단 7년 만에 펴내는 첫 시집에서 시인은 신인답지 않은 시적 경륜과 탄탄한 내공이 오롯이 엿보이는 묵직한 시 세계를 선보인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삶을 통찰하는 독특한 서정과 “다채로운 음률의 광채로 눈부신” 언어가 “통쾌하고 전율적”(고형렬, 추천사)인 시편들이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강물 속의 범’을 찾는 예리한 시선과 저릿한 상상력
얼룩 같은 삶에 새 숨결을 불어넣는 시인의 등장
이정훈의 시는 힘차다. “저 물 밖 인간의 나라를 파묻어버”(「쏘가리, 호랑이」)리는 대자연의 생명력이 넘쳐흐른다. 고향의 산과 강을 넘고 건너 “시인의 영혼에 아로새겨진 지난 시간의 무늬들”(황규관, 해설)은 애잔한 감성을 자아내기도 한다. 과거의 경험과 기억을 더듬어가는 시인에게 시는 귀향과도 같다. 그러나 단지 회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위에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49」)을 돌이키며 현재의 자신을 과거의 시간으로 이끌어간다. 끊일 듯 끊일 듯 이어지는 흐릿한 풍경 속에서 시인은 “세상의 얼룩 한점”(「푸른 달 아래」) 같은 자신의 삶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으며 비로소 “좌향(坐向) 한번 틀지 않고 수십대를 버티는 일가붙이들”(「쏘가리, 호랑이」)의 가족사를 깨닫는다. (시인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가족사를 “좌절과 패배의 끈질긴 족보”라 말한 바 있다.)
이정훈 시인은 화물 트레일러 운전기사, 노동자다. 4부에 실린 시들은 “깜깜한 시간 속을 주어도 목적어도 없이”(「양배추에 대한 몽상」) 떠도는 노동 현장에서 길어올린 것이다. 그렇다고 노동 현실을 격정적으로 비판하거나 목소리를 드높이는 노동시의 모습은 아니다. 황규관은 해설에서 “아직 사회적 노동 현실과 내밀하게 연결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지만, 시인은 오히려 섣부른 노동시를 경계하는 듯하다. 시인은 다만 생업인 운전 경험에서 우러나온 시들에서 “비눗방울 부푸는 것도 꿈이라 여기던 시절”(「빵꾸를 때운다」)을 되새기며 노동하는 삶의 단면과 노동자들의 일상을 섬세한 관찰력과 핍진한 묘사와 비유로써 선명하게 보여준다. 시인은 노동자들이 삶에 지칠수록 희망을 잃지 않고 “바닥이 바닥을 밀어 빛과 어둠이 교대하는 곳”(「아이슬란드」)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이정훈의 시에는 자기 목소리가 뚜렷하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등단하여 이제 첫 시집을 펴내는 신인이지만 신인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삼백만 킬로미터를 지나”(「일죽 휴게소」)온 삶의 연륜에서 배어나오는 원숙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시상을 전개해나가는 힘이 넘치며, 단어 하나를 선택하는 데에도 공력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요즘의 젊은 시와는 결이 확실히 다르다. “좋은 것을 찾아 더 멀리 헤매는 사람의 운명”(「마지막에 대하여」)인 듯 시인이 된 화물차 운전사, 그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저녁이 되면 온몸 가득 불을 밝힌”(「용치는 남자」) 한마리 ‘용’을 끌고 달리는 국도 위에서 또 어떤 시가 탄생할지 자못 기대된다.
제1부
마지막에 대하여
사슴이 달린다
잔월(殘月)
하루
우화
저녁의 푸른 유리
모시는 글
바위나리
돌나리
푸른 달 아래
이취(泥醉)
제2부
봄
없는 이야기
해와 물고기
쏘가리, 호랑이
청어
족두리 도적
무릉(武陵)에서
콧등바위, 쏘가리와 나와
맹랑천렵도(孟浪川獵圖)
제3부
겨울밤
밤나무집 가계(家系)
근황
그때가 옛날
강원리발관
별들의 고향
복숭아나무 아래
삽삭코
수미산 엘레지
소설(小雪)
풀
산업전사위령탑
아이고
제4부
오버런
아이슬란드
3축 내린다
대전으로 간다
안진터널 지나가다
수리와 닭
일죽휴게소
심장을 데리고
빵꾸를 때운다
용치는 남자
어떤 법
제5부
목련 한 대가리
묵계
양배추에 대한 몽상
잊거나 잊히거나
49
무엇으로 사는가
석유가 나온다
햇까이
해설|황규관
시인의 말
안개 짙은 날, 병창 앞을 걸어 물속으로 들어갔다. 들어본 적도 없고 믿기지도 않는 광경. 먹이 주는 인부를 따라다니는, 양식장 송어떼를 내려다보는 줄 알았다. 모두 쏘가리였다. 그들은 낮에 나오는 법이 없다. 떼 지어 몰려다니지도 않는다. 사냥꾼은 희미한 태양 빛에 의지해 바위굴 속, 반짝이는 눈동자를 포착하려 애쓸 뿐. 그날은 쏘가리를 찾느라 숨이 차는 게 아니라 어느 놈부터 찔러야 할까, 고르다 숨이 닳았다. (…)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말을 걸지도, 손을 잡아당기지도 않지만 처음과 끝을 응시하는 투명하고 차가운 눈. 주변은 온통 희끄무레한 진이었다. 비늘에서 묻어나와 물속으로 번져가는 맑고 미끈미끈한 진액. 그건 한숨이나 눈물 같은 게 아니었다. 해독하지 못하는 물의 기록, 그리고 물고기족(族)의 말. 나는 마을을 불 질러 한 부족을 도륙한 심정이 되었다. 오래 숨을 참으면 가슴이 터져나갈 지경이 된다. 세포마다 입이 생겨 숨 쉬어라, 공기를 들이마셔라, 아우성친다. 물고기는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땐 물 한번 꿀꺽 삼킨다. 한모금 더 들이마시면 몸 어딘가에 구멍이 뚫릴 것 같다. 돌아나오지 못할 게 분명한 깊고 캄캄하고 세찬 구멍. 원고를 들여다보는 눈은 지금도 내 몸에 속해 있지 않다. 오래전의 물결 속을 흐느적대며 하류로 흘러가는 유령, 유령들. 그들이 속삭인다. ―황금물고기를 삼켰으니, 이제 가시를 뱉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