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현대문학』에 평론을 발표하며 비평활동을 시작한 이래 여러 문학의 현장에서 누구보다 활발하게 활동해온 평론가 양경언이 첫번째 평론집 『안녕을 묻는 방식』을 묶어냈다. 양경언은 ‘현장에서 문학이 할 일’을 제시하듯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2014년 9월 20일 광화문광장에서 시작하여 2019년 12월까지 65회째 자리를 이어가고 있는 ‘304낭독회’에서 일꾼으로 활동했고 2016년 SNS에서 공론화된 ‘#문단_내_성폭력’ 운동 때에도 적극적으로 연대했다.
이번 평론집의 제목 ‘안녕을 묻는 방식’은 2010년대 초반 대학가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던 ‘안녕 대자보’ 현상과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드러나는 언어의 특징을 연결해서 살핀 「작은 것들의 정치성」에서 쓴 표현으로, 삶에서든 문학에서든 누군가의 곁으로 다가가 안부를 묻는 일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누군가의 ‘안녕’을 묻는 일이란 안부를 살피려는 상대가 스스로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행위이자, 그 어떤 엄혹한 상황일지라도 인사를 주고받는 서로가 ‘함께 있음’을 실감하는 행위이다. 혁명으로 이어지는 시작점일 수 있다는 얘기다.
―‘책머리에’ 중에서
한편 이 책에 실린 「비평이 왜 중요한가」는 “촛불 이후 한국문학의 현장에서 비평이 해야 할 역할을 뚝심 있게 강조했다”라는 평을 들으며 2019년 제37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제1부 ‘이제 되었다니. 그럴 리가’는 2010년대 한국 시의 문제작들을 소개하면서 이 시들이 이전의 시들과 어떤 점에서 다르며 어떤 도착지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다룬다. 양경언에게 문학이란 ‘수행성’(performativity)의 공간, 다시 말해 수많은 이질적 행위로 구성된 실천의 영역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언어와 소리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내놓는지가 아니라, 어떤 과정을 거쳐가며 실천적 효과를 산출하는지다. 양경언의 비평들은 시라는 문학 행위를 규정하는 어떤 개념과 틀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들의 끊임없는 시 짓기를 통해 수행적으로 문학이 구성된다는 점을 역설해준다.
특히, 2010년대 한국 시의 독창성을 다룬 「작은 것들의 정치성」은 기존의 ‘독백적 말하기’와의 차이를 주목한다. 기존의 시들에서 ‘나’를 말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써온 개념들이 2010년대에 들어 새롭게 정의되는데, 이 글에서는 2010년대 초반 한국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진 ‘안녕하십니까 대자보’ 현상이 그 저변의 지각변동 중 하나였음을 지적한다. ‘안녕 대자보’ 현상이 선사한 잠재적 대화 관계를 통해 독자들은 그저 듣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벗어던지고 자신 또한 행위자로서 작품 속의 여러 틈새로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같은 개입이 일방적이지 않고 양방향의 소통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이 작은 움직임들이 종국에는 함께 살아가는 일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이동하리라”(30면)는 예감은 설득력을 얻는다.
제2부 ‘싸움과 희망’은 2010년대 한국사회를 뒤흔든 여러 사건들 속에서 문학이 해왔던 역할을 되짚어보는 평론들을 모았다. 세월호참사와 100만 광화문 촛불에서 작가와 비평가 들은 종래의 이념과 깃발을 구분 짓는 일에서 벗어나, 현장의 열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언어화하는 일을 맡았다. 「눈먼 자들의 귀 열기」는 세월호참사를 겪어낸 우리 시대의 작가들이 어떻게 그때의 일을 기억하는지를 ‘304낭독회’를 예로 들어 이야기한다. 기억 또한 하나의 수행적 행위이기에 끊임없이 변화해간다. 그 과정 속에서 사회가 겪는 다양한 통증과 고통을 ‘쓰기-살기’로서 기록·체현하고자 하는 문학인들의 마음을 담아냈다. 「폭탄보다 시끄러운」은 문학 출판계에서 시도되는 다양한 층위의 여러 실험들을 다룬다. 그중에서 ‘304femi’의 결성 과정은 시대의 변화에 낯설어하던 이들이 이제는 상대의 말을 지나치지 않고 경청하는 힘을 보여준다. 김금희의 소설과 하재연의 시는 이 같은 실험들이 정초해 있는 페미니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선보인다. 「싸움과 희망」은 누구나 ‘문학의 종언’을 말하는 와중에 그럼에도 왜 우리가 문학을 계속 쓰고 읽는지를 김행숙, 강성은의 시를 경유하며 논의한다.
제3부 ‘비평이 왜 중요한가’는 문학비평이 무엇과 싸워야 하며 무엇을 ‘적폐’로 삼아야 할지를 다루는 글들의 모음이다. 양경언에 따르면 문학비평에서 적폐란 “‘으레 그럴 것’이라는 단정을 통해 문학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답보 상태를 자처하는 것, 혹은 자기충족적인 해석의 세계를 형성해 그 안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는 것, 요컨대 대화를 차단하는 것”(192면)이다. 2010년대 촛불 시민들이 바란 것이 일상에서 우리가 기득권 세력의 적폐를 물리치는 것이었다면, 3부의 첫 글 「비평이 왜 중요한가」는 근대 비평 현장에서 벌어져온 논쟁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그 바람을 현실의 과제로서 수행하는 글이다. 2016년 광화문 100만 촛불 이후 비평은 기존의 틀을 깨부수는 분투의 장이기도 했다. 조연정, 백지은, 최진석 등 당대의 논쟁적 평론들을 소개하면서 양경언은 비평이 ‘지금 여기’ 싸우고 있으며 사회의 변화를 글로 담아내고 있음을 입증해낸다.
제4부 ‘허물기, 짓기’에서는 201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들이 어떻게 다양한 미학적 전략으로 시를 짓고 있는지를 살핀다. 맨 앞에 실린 「검은 새 한 마리가 적막한 달을 향해 난다」에서는 허수경의 시를 통해 좋은 시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곱씹는다. 이 같은 문답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 존엄이 일으켜 세워질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한마디로 ‘이렇게 망가진 시대에도 인간의 존엄이 회자되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퇴행의 시대에 지어지는 시들을 통해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의미심장하다.
현실은 시시각각 변해가며 그에 따라 문학 또한 제 모습을 바꿔간다. 중요한 것은 비평이 이 같은 현실의 변화에 얼마나 재바르게 개입하느냐다. 그에 따라 문학이 만들어낸 현실 역시 다르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010년대 한국사회에서 비평이란 무엇을 하는 일을 가리키며, 그 비평이라는 것은 과연 왜 중요한가. 양경언이라는 한 사람의 평론가가 지키고자 했던 비평의 덕목은 무엇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문학의 종언’의 시대에 무엇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까. 그의 덤덤하지만 묵직한 말을 나침반 삼아 그 답을 더듬어가며 찾아가보길 당부드린다. “비평 행위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이어지는지에 따라 촛불 이후의 시기를 살고 있는 지금의 문학을 어떻게 기억할지에 대한 판가름이 난다. 비평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비평이 문학을 어떻게 기억할지를 끊임없이 겨루는 논쟁의 장으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192면)
책머리에
제1부 이제 되었다니. 그럴 리가
작은 것들의 정치성: 2010년대 시가 ‘안녕’을 묻는 방식
나는 거기에 있지 않다
이제 되었다니. 그럴 리가
최근 시에 나타난 젠더 ‘하기’(doing)와 ‘허물기’(undoing)에 대하여
Quizás, Quizás, Quizás: 시와 운율, 거기에서 비롯되는 감정에 대한 메모
제2부 싸움과 희망
눈먼 자들의 귀 열기: 세월호 이후, 작가들의 공동 작업에 대한 기록
책에는 없는 이야기들
불가능을 옹호할 권리
폭탄보다 시끄러운(Louder than bombs)
싸움과 희망
제3부 비평이 왜 중요한가
비평이 왜 중요한가: 촛불 이후, 문학비평이 혁명을 의미화하는 방식
참된 치욕의 서사 혹은 거짓된 영광의 시: 김민정론
기쁨은 어떻게 오는가: 배수연의 『조이와의 키스』에 대하여
결정들: 이영주 시에 관한 소고
누구에게 이것을 바칠까? (1)
퍼포먼스 김승일: 김승일의 시를 생각함
그러니까 원더풀, 원더풀한 절망: 서효인의 시를 읽다
누구에게 이것을 바칠까? (2)
쓴(bitter) 시를 쓰다: 다시, 김민정의 시를 꺼내 읽는다
제4부 허물기, 짓기
검은 새 한마리가 적막한 달을 향해 난다: 허수경의 시를 읽다
삶다움의 가능성을 믿는 시: 시가 전망을 그리는 방식에 대하여
36.5도의 노래: 유병록의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에 대하여
현재를 살다: 신용목의 시를 읽다
무엇이 거기에 있는가: 함기석의 시를 읽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영광의 『나무는 간다』에 대하여
ㄹ의 경우(輕雨): 신영배의 『물속의 피아노』에 대하여
큰 소리로, 훗!: 유계영의 『온갖 것들의 낮』에 대하여
빛을 믿어도 되나
발표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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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첫 비평문을 발표한 후 약 팔년여 동안 쓴 글들을 모으고 골라 책으로 묶는다. 여기 모인 글들이 내내 풍경으로 삼는 2010년대 한국사회가 어땠는지 간단히라도 짚는 게 순서일 듯하지만, 차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전하는 글들은 정치권력이 언어를 다루는 이들을 어떻게 길들이려 했는지를 절감했던 2010년대 초반 시기에서부터 세월호사건, 페미니즘 리부트 활동, 광장의 촛불 등 많은 이들의 숨결과 몸짓으로 움직인 현장을 겪으면서 쓰였기 때문이다. ‘알아서 기지 않는’ 문학은 지금 이곳을 향해 제대로 살아 있는지 목청껏 묻는 일을 한다. 나만 해도 어둠이 깊게 내려앉은 시기에 시를 읽다가 별안간 정신이 번쩍 들어 ‘좋다!’를 외치며 밤을 새운 날이 여럿이다. 다시 말해 여기 모인 비평은 대체로 열패감과 좌절감을 시시각각 개개인에게 안기려는 시대에 맞서서 ‘산다는 것’이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살아갈 맛’이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문학에 대해 다른 이들과 조금이라도 더 나눠보고자 쓰였다. 위기에 대한 불안이 부추겨지는 가운데서도 문학은 좀처럼 물러나지 않고 복잡한 세상과 팽팽한 긴장관계를 형성하며 제 목소리를 낸다. 사람들의 안녕을 살피는 일을 문학이 할 때, 비평은 어떤가. 비평 역시 문학과 문학작품을 접한 이들 모두의 안부를 묻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책에 담긴 글들이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첫 평론집의 제목을 ‘안녕을 묻는 방식’이라 짓는다. 이 표현은 2010년대 초반 대학가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던 ‘안녕 대자보’ 현상과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드러나는 언어의 특징을 연결해서 살핀 글에서 처음 쓴 것인데, 삶에서든 문학에서든 누군가의 곁으로 ‘다가가’ 안부를 ‘묻는’ 일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누군가가 ‘안녕’한지를 살피는 일은 일상에서 흔히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자칫 사소하다고 여겨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흔하다고 해서 그 의미조차 가볍진 않을 것이다. 이편에서 상대에게 안부를 묻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에게 관심이 있어야 한다. 상대의 유일한 이름을 기억하고, 거기에 값하는 삶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궁금해해야만 한다. 억지로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한편 물음에 응답해야 하는 상대편은 어떤가. 안녕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무사’해야 한다. 설혹 그렇지 못할지라도 스스로 자신의 현재 상태를 승인하고, 안부를 묻는 쪽을 향해 이를 진솔하게 내보일 수 있어야 한다. 주고받는 모두가 삶다운 모습으로 있어야 가능하다면, ‘안부를 묻는 일’은 고작일 수 없다. 시대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자주 어긋나게 해도 서로의 ‘있음’을 확인하고 ‘안녕’ 하며 인사를 건네는 순간에 새로운 이야기는 얼마든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변화의 씨앗은 이렇게 싹을 틔우기도 한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안녕’을 묻는 일이란 안부를 살피려는 상대가 스스로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행위이자, 그 어떤 엄혹한 상황일지라도 인사를 주고받는 서로가 ‘함께 있음’을 실감하는 행위이다. 혁명으로 이어지는 시작점일 수 있다는 얘기다. ‘다가가다’와 ‘묻다’라는 동사에 강조점을 찍는다. 비평은 세상에 나온 시와 소설, 혹은 아직 시와 소설로 분류되진 않더라도 그에 준하는 역능을 발휘하는 (그렇게 함으로써 시와 소설의 자장을 넓히는) 글에 ‘다가가’ 귀를 내어주고, 표정을 짓고, 또다른 말을 건다. 그 무엇도 혼자 두지 않는다. 비평이 품는 욕심이 작품을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키지 않는 데에 있다면, 그것은 단 한 사람의 독창성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태도에서 생겨난 것이겠다. 좀처럼 풀리지 않는 삶의 불가해성을 문학이 어떻게 상대하는지를 ‘묻는’ 과정 중의 비평은, 모르는 것투성이인 세상을 살아갈지라도 주눅 들 필요 없이 그에 응하는 법을 일러주기도 한다. 여기 모인 글들이 그런 역할을 잘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의 진심이 전해지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