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어른이 되었을까. 그 기원을 탐색하며 서울 변두리에 살던 아파트키드 ‘민선’의 유년시절을 침착하게 돌아보는 박윤선 작가의 만화 『수영장의 냄새』가 출간되었다. 고도성장기였던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동네 스포츠센터의 수영반에 다니던 여덟살 민선의 치열하고 비릿한 성장 이야기를 담았다. 만화로 읽는 「응답하라 1988」의 아파트키드판인 셈이다. ‘만화계의 칸 영화제’라 불리는 앙굴렘국제만화축제 공식경쟁부문에 2019년, 2020년에 걸쳐 2년 연속으로 초청된 박윤선 작가는 모두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유년의 한 장면을 보편적인 관점에서 담백하게 그려냈다.
주인공 민선은 교육열이 높고 돈에 관해서라면 억척스러운 엄마가 하라는 대로 수영센터에 다닌다. 뭐든 잘하는 언니를 따라 수영센터 상급반에 들어가라는 잔소리를 듣지만, 별다른 의지 없이 하급반에서 수영을 한다. 민선은 그래도 괜찮은 아이다. 관심 밖의 아이이기 때문이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약육강식 피라미드의 최하위에 놓여 있는 민선의 하루하루는 수영장의 소독약 냄새처럼 비릿하다. 힘센 친구에게 엉덩이를 까 보이고, 엄마가 하라는 대로 수영장과 학원을 오가며 부모가 맞벌이를 한다고 비웃는 있는 집 친구들의 조소를 견뎌야 한다. 작가는 보기만 해도 비릿한 파란색의 연출로 어른들의 세계 못지않게 비정한 여덟살들의 세계를 가감 없이 그리는 한편 살아남기 위해 지독하게 성장해야 했던 우리의 유년기를 보듬는다.
십여년간 프랑스에 거주하며 다양한 작품 활동을 통해 한국 만화를 세계에 알리고 있는 박윤선 작가의 작품 『수영장의 냄새』가 국내에 출간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2009년 잡지 『새만화책』에 연재를 시작했지만 다음 호를 출간하기도 전에 잡지가 폐간되었고, 완성된 작품을 Sous l’Eau, l’Obscurité 라는 제목으로 프랑스에서 출간했으나 한국 독자들이 접근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2019년 3월부터 10월까지 어린이교양지 『고래가그랬어』에 「물 아래서」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어 국내에 소개된 후 창비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이제 중견 작가로 입지를 굳힌 만화가 박윤선의 초기 작품 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지만, 최근 에코 세대, 밀레니얼 세대 등으로 호명되며 세대 담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아파트키드의 유년기를 스스로 돌아본다는 점에서도 지금 한국사회에 시의적절하게 당도한 작품이다.
네모난 집과 반듯한 교차로를 오가는
아파트키드 민선의 하루하루
서울 변두리의 아파트에 살면서 ‘국민학교’를 다니고 아파트촌에 자리한 ‘어린이 스포츠센터’에서 수영을 배우는 주인공 민선은 오로지 아파트에서만 살아온 ‘아파트키드’다. 아빠는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가정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가사를 도맡으면서도 부동산과 주식 투자로 재산을 모아 값이 오를 만한 아파트를 산 엄마는 다른 학부모들과 경쟁하며, 공부도 운동도 빠짐없이 잘하는 언니 민진에게 온 신경을 쏟는다. 무심한 가족들 사이에서 민선은 엄마가 하라는 대로 셔틀버스를 타고 학원과 수영장을 전전한다. 그러다 배가 고프면 아파트 상가에서 혼자 김밥을 사먹으며 허기를 달래는 나날의 연속이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로서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하는 듯하지만 네모반듯한 아파트와 교차로 사이를 오갈 뿐 고민을 털어놓을 어른도, 대화할 친구도 없는 민선의 하루하루는 한없이 무미건조하다. 작가는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 무렵의 서울 대치동 아파트 단지의 풍경을 참고하여 외롭고 쓸쓸한 민선의 일상을 서늘하게 연출했다. 무심한 듯 단순하게 당시의 분위기를 담아낸 그림은 ‘밀레니얼 세대’ ‘에코 세대’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여 지극히 일방적인 진단과 평가를 받는 이삼십대 독자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수난과 섬세한 감정의 결을 생생하게 되살려 당사자의 눈으로 돌아보게 한다는 점도 이 작품의 힘이다.
텔레비전 크기로 가난을 평가하던 시절
은밀하게 배워나가는 어른들의 세계
아이들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놀이와 친교 관계는 어른들의 정치와 사교만큼이나 비정한 구석이 있다. 『수영장의 냄새』는 유년을 미화하지 않는다. 친구 사이에 권력 관계가 생기면 과감히 서로의 호칭을 “주인님”과 “쫑”으로 바꾸어 부르는 민선의 모습과 친구 집 거실에 놓인 텔레비전 크기로 빈부를 저울질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씁쓸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정면으로 다룬다. 이 작품에 그려진 여덟살들의 세계는 대답을 못하는 아이를 “찌질이”라고 욕하고, 조금 다른 행동을 하는 아이에게는 “지랄하네”라고 일갈하는 선생님, 자식을 명문대에 보내겠다는 일념으로 서로를 견제하고 이기는 데 집중하는 부모들의 사회와 닮아 있다.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조리한 사회의 규칙을 은밀하게 배워나가야 했던 유년시절을 그린 이 작품에서는 앞으로의 경쟁을 위해 관리되고 소독된 수영장의 냄새가 난다.
무리에서 떨어지면 그야말로 지옥,
그때 우리는 치열하게 자랐다
이 작품에서 어른들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우연히 저지른 도둑질로 느낀 최초의 죄책감과, 비행을 들킬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에서 우러난 공포를 민선은 혼자 감당한다. 이 부정적인 감정들 속에서 민선은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행동을 한다. 친구를 도둑질에 끌어들이며 자신을 ‘주인님’이라고 부르게 하고, 권력을 확인하고 자존심을 채우기 위해 함께 병원놀이를 하는 친구에게 “너는 이제부터 왼발을 다친 거야. 왼발 절어”라고 서슴없이 명령하기도 한다. 또래 무리에서 배제되면 그야말로 지옥이므로, 어떻게든 좀더 안쪽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이 소심하고 무기력했던 민선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아이로 만든다. 작가는 불합리하고 모순적인 민선의 행동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어른 못지않게 복잡한 한 아이의 내면을 거짓 없이 그렸다. 덕분에 독자들은 민선이 이 모든 부조리와 편견을 마주하고 마침내 어른이 되기를 희망하게 된다. 오래된 성장의 지층을 돌아보고,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깨닫는다. 독자들은 잊힌 유년을 복원한 『수영장의 냄새』를 통해 한때 아이에 불과했던 자신과 만나 그 아이에게 따뜻한 포옹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지독한 현실 속에서도 열심히 자라주어서, 조금 부족할지언정 드디어 지나온 과거를 돌아볼 줄 아는 어른이 되어주어서 고맙다고.
1화
2화
3화
작가의 말
"이야기 토막들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내 어린 시절, 나와 비밀을 공유했던 친구, 내 가족들... 몇년간 이것들을 이야기로 풀어보려다 잘되지 않기에 접으려 했는데 한국을 잠시 떠나 있으려니 갑자기 이야기가 정리될 줄이야. 그날로 나는 내가 살던 동네를 찾아가 앨범 두권 분량의 자료 사진을 찍고, 비행기를 탔다." 위의 글은 제가 2009년, 잡지 『새만화책』 제6호에 이 만화의 첫화를 실으면서 썼던 작가의 말입니다. 그때 "잠시"라고 생각했던 외국 생활은 10년을 넘겨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출국 직전 찍었다는 앨범 두권 치의 자료 사진은 사실 작업 중에 쳐다보지도 않았고, 계속 연재하게 될 줄 알았던 잡지는 다음 호를 펴내지 못하고 사라졌으며, 이 만화의 단행본은 2011년 이곳, 프랑스에서만 나오고 한국어 출간은 되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그게 참 마음에 걸렸는데, 시간이 흘러 제 그림체도, 생각도, 모든 것이 변해버린 2019년에 한국어로 나오게 되네요. 세상 일은 이렇게 제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굴러갑니다. 앞으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어딘가에 한두마디 써놓고, 이렇게 10년 뒤에 펼쳐 보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프랑스, 앙굴렘에서 박윤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