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436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

박경희  시집
출간일: 2019.10.04.
정가: 9,000원
분야: 문학,
전자책: 있음

“문득, 돌아선 곳에서 나를 달빛 든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

 

 

내면의 고스란한 슬픔을 끊임없이 달래고 어르는 시인, 박경희

 

 

 

2001년 등단한 시작한 박경희 시인의 신작 시집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이 출간되었다첫 시집 『벚꽃 문신』(실천문학사 2012)으로 새로운 교감적 이야기꾼 시인의 등장이라는 호평을 받았으며그동안 장르를 넘나들며 꾸준한 창작활동을 해왔다애잔한 서정과 떠나간 이들을 향한 그리움이 가득한 일상의 푸근하고 평범한 장면과 그 이면에 미지근하게 남아 있는 죽음의 기척들을 감싸 안고삶을 넉넉하게 받아들이면서 능청과 해학시원시원한 몸짓과 사투리들로 풀어내는 박경희의 이번 시집은 슬픔을 걷어내는 방식이 가히 독보적(안상학추천사)이다

 

 

 

손바닥 깔짝 뒤집으면 이승과 저승이 바뀌는겨암만다 그런겨

 

 

세상과 현실의 고통을 아파하는 ‘이야기 시’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은 박경희 시인이 7년 만에 펴내는 두번째 시집이다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고향 마을을 배경으로 질박한 삶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인간사가 절기 속에 녹아 있는 핍진한 시편들이 구성지던(김해자발문) 첫 시집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공생과 공유의 세계관을 펼쳐 보인다고향의 생생한 입말을 살린 걸쭉한 입담과 정감어린 언어 속에 삶의 애환이 오롯이 서린 시편들이 뭉클한 감동을 자아낸다

 

 

 

남다른 눈썰미와 따듯한 시선으로 농촌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서사적 사건을 섬세하게 포착해내는 박경희의 시는 무엇보다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특히 호미 대신 펜 쥐라(「경칩」)는 말을 남기고 산 넘어 가신 지 팔년(「청명(淸明))째인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저승과 문턱이 같은(「하늘 깃털」) 나이에 든 욕쟁이’ 어머니와 한번씩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아버지를 찾는(「참말로 벨일이여」) 치매 걸린 할머니에 대한 곡진한 사랑으로 천연덕스럽게 풀어놓는 가족 서사에는 유머러스한 화법 속에서도 애잔함이 스며 있다시인에게 가족은 삶의 동력이며서로 부대끼며 기냥저냥’ 살아온 삶의 풍경은 아련한 추억 속에서 고스란히 한편의 시가 된다.

 

 

 

세상의 진실을 말하고 강파른 현실의 고통을 아파하는 사람으로서 시인의 시선은 비단 가족 서사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시인의 마음은 집도 학교도 다리도 붕어 집이” 되고 만 이웃들의 금지된 삶(「물속의 집」)과 짧은 대나무 마디로 살다 간 사내의 빈 곳(「내 마음 기우는 곳」)에 기운다한편 개발인지 게발인지” “굴착기 돌아가는 소리 요란(「엄지손가락」)하게 삶의 터전이 파괴되어가는 농촌의 그늘진 이면을 짚어내고, 4·3 제주항쟁과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4·16 세월호 참사 등 아리고 쓰려서 쓸쓸한(「그대들의 마디 꺾이는 소리」) 고통의 역사를 되돌아보기도 한다.

 

 

 

김해자 시인은 발문에서 박경희는 느린 사람이지만 일견 촌스럽고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만한 시를 쓸 만큼 용기 있고 진실한 시인이라고 평하면서 농경문화의 자식으로서 대지적 감수성이 몸에 밴” 그의 시는 글자 이전에 말이말 이전에 마음이 있었음을 실감케 한다고 적었다서로가 서로에게 좀처럼 쉽게 곁을 줄 수 없는 냉엄한 시대에 재미와 감동이 어우러진 그의 시는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목차

1

 

참말로 벨일이여

산벚나무

그놈이 누구인지

청명(淸明)

그런 봄날

그대들의 마디 꺾이는 소리

초승달 부메랑

생일

고수

팔자(八字)

뚱딴지꽃

참 좋은 날

 

 

2

 

오광

경칩

웃음 달

꼬리 긴 별

봄날

슬픈 이야기

낫질 한방

실종된 봄

먼 산

꽃 걸음

대설주의보

가을밤에 부는 바람

정류장

 

3

 

말복이 처마에 들다

하늘 깃털

엄지손가락

그늘을 당겼다 놓는 집

달빛 한아름

생강꽃처럼 화들짝

칠월 칠석

손바닥

물속의 집

새벽의 눈물

울화통

리어카의 무게

소름

별을 바라보았다

그런 저물녘

 

4

 

드렁허리

윤슬이 출렁이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집

한여름 밤

벚꽃잎 흩날릴 때

노루의 눈빛

무화과

새집

내 마음 기우는 곳

폐염전

바라보다가 문득,

빈집 한채

 

 

발문|김해자

 

시인의 말

박경희 시인의 얼굴을 떠올려보면 대개 눈은 울고 입은 웃는 인상이다. 첫인상이 그렇게 각인된 탓이리라. 시집에도 표정이 있다면 이번 시집 또한 눈은 울고 입은 웃고 있는 인상이다. 눈은 내면의 슬픔이 고스란하고 입은 그 슬픔을 끊임없이 달래고 어르고 있다. 능청과 해학, 시원시원한 몸짓과 사투리들이 어우러져 한판 씻김굿을 치르는 형상이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도 없고, 이승과 저승의 거리도 없다. 눈은 없어진 것들과 덜어진 것들과 사라진 것들을 불러내어 같이 운다. 입은 한술 더 뜬다. 새로 생겨난 것들과 다시 채워진 것들과 나타난 것들에게 원래 있었던 것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 스스럼없이 군다. 그만의 슬픔을 걷어내는 방식이 가히 독보적이다. _안상학 시인

저자의 말

작은 밭을 묵힌 지 7년. 그동안 돌들깨, 도깨비바늘, 왕바랭이, 쇠비름이 자리를 빛냈다. 소소한 것이 인연이 되어 밭을 일구고 있다. 그 밭에 들어가자 나도 돌들깨, 도깨비바늘이 됐다. 소소한 내가 그 안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2019년 보령 명천에서 박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