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계절

김시종  시집  ,  이진경  옮김  ,  카게모또 쓰요시  옮김
원제: 失くした季節 四時詩集
출간일: 2019.08.05.
정가: 13,000원
분야: 문학, 외국문학
전자책: 있음

나는 조용히 네게 맥주를 권하고

 

 

초록의 유품인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았다”

 

 

 

 

 

재일 조선인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 김시종의 계절 시편 

 

 

까칠까칠한 언어, 찢어진 호흡, 낯선 서정을 만나다

 

 

 

현대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고 재일 조선인으로서의 운명에 맞서며 평생 치열한 작품활동을 펼쳐온 김시종 시인의 시집 『잃어버린 계절』이 번역 출간되었다. 철학자 이진경과 한국문학 연구자 카게모또 쓰요시의 공동 번역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완역본이다. 

 

김시종 시인은 제주 4·3항쟁에 휘말려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1949년 일본으로 탈출하여 오오사까의 재일 조선인 거주지 이까이노에 정착한 뒤 줄곧 일본어로 시를 써왔다. 시인에게 일본어는 자신의 감성과 의식 체계의 밑바탕이 되는 모국어나 다름없는 언어였다. 그러나 스스로 ‘일본어에 대한 보복’으로 문필 생활을 하고 있다고 밝혔듯이, 그의 시는 일본식 문체가 아닌 데다가 반일본적 서정이 담겨 있다. 그런 까닭에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일본 문단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기도 했으나, 이후 마이니찌출판문화상(1986), 오구마히데오상 특별상(1992), 타까미준상(2011), 오사라기지로오상(2015) 등을 수상하고 최근 ‘김시종 컬렉션’이라는 제목의 저작집이 출간되는 등 주목받고 있다. 

 

『잃어버린 계절』의 옮긴이들은 ‘일본식 서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낯선 어법을 구사하는 저자의 일본어를 우리말로 제대로 옮기기 위해 각별히 애를 썼으며, 해설에 가까운 ‘옮긴이의 말’을 통해 김시종의 문학적 삶과 독특한 시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자 했다.

 

 

 

김시종을 읽는다는 것은 

 

그것을 읽는 나의 서정과 대면하는 일이다

 

 

 

『잃어버린 계절』은 2010년에 출간된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으로, 계절별로 8편씩 모두 32편의 시가 실려 있다. 제41회 타까미준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시집은 원서에 붙은 ‘사시(四時) 시집’이라는 부제만 보면 사계절을 제재로 하여 자연을 노래하는 서정시로 읽히기 쉽다. 그러나 실제 안에 담긴 것은 자연을 찬미하는 부드럽고 평화로운 서정이 아니다. 시인은 “삶의 밑바닥에 앙금처럼”(「구멍」) 남은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살려내어 자연과 인간을 다른 무엇으로 대면하고자 비극적 삶과 타인의 고통을 성찰하는 서정, 곧 ‘서정에 반하는 서정’(옮긴이의 말)에 가닿는다. 여기서 우리는 평생 서정과 대결해온 시인이 이 시집의 제목을 ‘김시종 서정 시집’이라고 하려다 민망해서 그만두었다는 말을 또렷이 이해해야 한다. 

 

시인은 녹슬어가는 일상의 시간을 바림질하며 빛바랜 영상으로 남아 있는 ‘멈춘 시간’들을 현재 속으로 불러내어 “스스로 시간의 출구”(「녹스는 풍경」)가 되어간다. 돌아갈 곳을 잃었으나 “어디서 살든 죽지 않는 한 사람은 살게 마련이다”(「잃어버린 계절」)라는 시인의 외침은 자못 처연하게 들려온다. 갈 곳 없는 삶에도 계절은 어김없이 피고 질 것이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나라일지라도/도달할 수는 있을 터”(「귀향」), 그리하여 시인은 고요한 마음의 지평, “끝없는 꿈의 대지”(「여름 그후」)를 찾아나서는 것이다. 

 

구순(九旬)의 나이에 “지금 나는/부도덕할 만큼 살찐 놈”(「어금니」)이라는 깨달음 속에서 시인은 “이제야 알게 된 나의 어리석은 60년”(「여름 그후」)을 곱씹어본다. 그리고 거기에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사소한 존재들에게 촉촉한 시선을 던지면서, 아득하게 멀리 있고 이제는 오지 않게 된 것들과 우리가 매일 잃어버리지만 “결코 미미하다 할 수 없”(「봄에 오지 않게 된 것들」)는 것들에 대해 쓴다. 파편처럼 깊이 박힌 쓰라린 기억들을 되새기며, 조국을 빼앗았던 식민 종주국의 언어로 시를 써온 노시인의 회한과 “누구도 밀쳐낼 수 없는/깊은 우수”(「마을」)가 서린 시들이 오래도록 가슴을 울린다.

목차

여름

 

마을

하늘

어금니

여름

빗속에서

시퍼런 테러리스트

기다릴 것도 없는 8월이라며

잃어버린 계절

 

가을

 

여행

창공의 중심에서

조어(鳥語)의 가을

전설이문(傳說異聞)

희미한 전언

두개의 옥수수

녹스는 풍경

여름 그후

 

겨울

 

이토록 멀어져버리고

나뭇잎 한장

뛰다

겨울의 보금자리

구멍

수국의 싹

사람은 흩어지고, 쌓인다

그림자는 자라고

 

 

이 무명(無明)의 시각을

귀향

바람에 날려 저 멀리

목련

이어지다

언젠가 누군가 또

4월이여, 먼 날이여

봄에 오지 않게 된 것들

 

 

 

시인의 말

옮긴이의 말

이 시집에 붙인 ‘사시(四時)시집’이라는 부제는 사계절을 따라 자연과 인간의 서정을 노래하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 시집에서 읽게 되는 것은 사계절로 상징되는 자연과 인간의 삶을, ‘잃어버린 계절’이라는 제목처럼 시간을 거스르며 ‘잃어버리고’ 이미 잃어버린, 그러나 잊을 수는 없었던 멈춘 시간을 통해 계절의 시간을, 자연 또는 인간을 다른 어떤 것으로 대면하려는 시적 긴장이다. 자연스러운 서정의 내부로 들어가 그 서정을 멈추고 교란하려는 반서정적 서정시이다. (…) 『잃어버린 계절』은 평상시에는 거기에 있는지 누구도 모를 만큼 작은 존재에 시선을 던지면서, 동시에 생활의 장을 그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수직의 시선을 통해 아득하지만 인접한 거리를 바로 ‘내’가 서 있는 그곳에서 보여준다. 매우 가까운 곳에 있는 아득한 것, 혹은 아득히 멀리 있는 가까운 것의 역설적 감각은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 또한 보지 못해도 있음이 분명한 것들을 지각하는 감각을 준다. 그것은 수직적 시간의 경험과 더불어 우리의 삶을 밑바닥에서 흔드는 것이다. 2019년 여름 이진경․카게모또 쓰요시

저자의 말

민망해서 그만두기는 했지만, 생각 같아서는 ‘김시종 서정 시집’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던 시집이다. 일본에서는 특히 그렇지만, 서정시라고 불리는 것의 대부분은 자연에 대한 찬미를 기조로 노래해왔다. 여기에서 ‘자연’은 자신의 심정이 투영된 것이다. ‘서정’이라는 시의 리듬도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정감을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고, 이렇듯 서정과 정감 사이에는 어떠한 간극도 없다. 정감이 곧 서정인 것이다. 이 시집도 춘하추동 사계절을 제재로 하기에 당연히 ‘자연’이 주제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적어도 자연에 심정의 미묘함을 맡기는 것 같은 순정(純情)한 나는 그것으로부터 떠난 지 오래이다. 분명 그랬을 터였다. 식민지 소년인 나를 열렬한 ‘황국(皇國) 소년’으로 만들어낸 예전의 일본어와 그 일본어가 자아내던 음률의 서정은 삶이 있는 한 대면해야 할 나의 의식의 업(業)과 같은 것이다. 일본적 서정에서 나는 제대로 벗어난 것인지 어떤지.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다. (…) 나는 일본 근대 서정시에 엄청난 영향을 받으며 자랐기에 사계절에 대한 관심 또한 누구 못지않게 강렬했다. 그만큼 계절이나 자연은 내 서정의 질을 검증하는 근거가 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이제껏 내가 지녀왔던 과제에 대한 답안을 지금, 두려운 마음으로 독자에게 건네는 것이기도 하다. 2009년 12월 김시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