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435

봄의 정치

고영민  시집
출간일: 2019.07.25.
정가: 10,000원
분야: 문학,
전자책: 있음

“봄이 온다는 것만으로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소멸하는 모든 것들을 따뜻하게 끌어안는 두 손

 

 

 

세상을 바라보는 온유한 시선과 유쾌한 발상이 돋보이는 순박한 시편들로 개성적인 서정의 세계를 펼쳐온 고영민 시인의 신작 시집 『봄의 정치』가 출간되었다. 2002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한 시인은 그동안 서정시의 다채로운 변주를 보여주며 17년간 꾸준히 시작 활동을 해왔다따뜻함과 삶의 비애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그의 시는 다양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데특히 일상적인 소재에 곁들인 유머와 해학은 독보적이라 할 만하다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친근한 언어로 정통 서정시 문법에 가장 충실한 시를 쓴다는 평가를 받는 시인은그간 지리산문학상(2012)과 박재삼문학상(2016)을 수상하면서 시단의 주목을 받았다

 

『봄의 정치』는 박재삼문학상 수상작 『구구』 이후 4년 만에 선보이는 다섯번째 시집이다. “생의 활력이 아니라 죽음의 그림자가 오롯한(안지영해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기존의 섬세한 시어와 결 고운 서정성을 간직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과 사물의 존재론에 대한 깊은 사유를 보여준다표제작 「봄의 정치」를 비롯하여 총 66편의 시를 4부에 나누어 실었다.

 

 

 

낮은 자세로공손한 마음으로

 

 

사소한 일상을 품어안는 시

 

 

 

평범한 일상 속에서 비범한 생명의 새로운 경지를 발견해내는 시인은 어떤 속삭임도/들을 수 있는 귀와 아주 멀리까지 볼 수 있는 눈(「내가 어렸을 적에」)으로 사물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어간다일상의 소재들을 마음껏 부리면서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미와 무의미의 내밀한 관계를 안과 밖으로 변주하면서 안에서/밖을 만드는(「밀밭 속의 개」) 시적 사건들을 포착해낸다더불어 시인은 액자를 떼어내고 나서야 액자가 걸렸었다는 것이 더 뚜렷해지는(「액자」) 이치를 깨달으며부재로 인해 존재가 드러나는 삶의 역설적인 풍경을 깊은 통찰력으로 응시한다.

 

시인은 생명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사소한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소멸되어가는 존재들에게 온기를 불어넣는다마치 입속에 새끼를 넣어 키우는/물고기(「입속의 물고기」)같이낮은 자세로 다가가 사물에 눈을 맞추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끝내 아무것도/움켜쥐지 못한(「조약돌」) 존재들을 오래도록 바라본다공손한 마음으로 사물의 본성을 일깨우며쓸쓸하게 저물어가는 생의 뒷면을 따듯하게 품어안는다

목차

1

철심

적막

나이 든 개

딸기

봄의 정치

시인 앞

편육

밀밭 속의 개

내가 보는 네가 나를 보고 있다면

흰 토끼 일곱마리는

연안

네트

저녁의 눈빛

내가 어렸을 적에

망(望)

만두꽃  

 

2

아지랑이

무화과

폐문

목련

두부

꽃눈

은행나무 사거리

어제보다 나은

사육제

긴 호스

닭의 입구

조약돌

입속의 물고기

슈퍼문

여름비 한단

고독  

 

3

아무도 없는 현관에 불이 켜지는 이유

웃으면서 이별을

매화꽃 둘레

옥상

느시

복숭아와 사귀다

밤의 기억

베고니아

송편

톱밥 꽃게

어항

얼굴에 남은 베개 자국

복자기나무에 물이 들다

소녀

엉겅퀴

 

4

깊이

가난의 증명

지퍼

저녁으로

목단

풀을 벨 때

두엄

붉은 입술

상류

튜브

순한 개

액자

조숙

불 냄새

꽃의 얼굴을 하고

자두

국도변 옥수수밭

물의 목수  

 

해설|안지영

시인의 말

 

 

윤달에 머무는 시인이 떠오른다. 낮달과의 대화도 한뼘이겠다.
고영민의 시공간에서는 일상과 온기가 서로 살고 있다. 서로의 계절이기도 하다. 현실의 상상력이면서 현실의 반대 혹은 기억들인 온기는 일상을 울울하고 헐렁하게 포옹한다. 울울할 때 시인의 말은 겸손해지고, 헐렁하다면 시인은 말을 줄인다. 예컨대 “봄 오는 일이/결국은 꽃 한송이 머리에 이고 와/한 열흘 누군가 앞에/말없이 서 있다 가는 것임을” 자각하는 꽃의 제의/온기는 “왔던 길 되짚어갔을/꽃의 긴 그림자”(「적막」)라는 떨림/일상과 같은 감정이다. 일상과 온기는 서로의 몸에 스며들기 위하여 서슴없이 너를 꽃이라 하는 곡진함을 발명했다. 그럴 때 고영민의 두 손은 드라이플라워의 형상이다. 그것은 바짝 말랐지만 생의 여러 지층에서 돋아나서 지금 도착했다. 이미 눈물을 헌정했기에 시인은 꽃의 의미를 다정하게 나열한다. 고영민의 시가 애틋한 소이연이 저러하다. 오래도록 시인은 날짜들에게 죄다 공손했다.
윤달이 필요할 때마다 고영민의 시집을 뒤적거려야만 했다. _송재학 시인

저자의 말

시집을 묶는 동안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고향에서 사과 농사를 짓던 서른셋 형이 사고로 세상을 떴을 때 어머니는 매일 저녁 아들이 지냈던 방에 불을 밝혀놓았다. 2년 넘게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아버지가 병에 걸려 몸져누웠을 때 어머니는 매끼 새 밥을 지어 올렸다. 채 몇숟가락 뜨지 못해 밥이 그대로 남아 있어도 어머니는 병든 남편을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삼시 세끼 새 밥을 지어 올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죄가 되고 한(恨)이 된다고 했다. 나도 시를 이렇게 써야 한다   2019년 7월 고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