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양심, 끓는점에 다다른 세계를 말하다
촘스키가 진단하는 민주주의의 위기와 희망
20세기 독보적 업적을 남긴 언어학자이자 사회운동가, 미국을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 반대세력으로부터 “20세기 미국에 닥친 두가지 재앙 중 하나”라 불리는 인물(나머지 하나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다), 쉼 없이 체제와 구조의 혁명적 변화를 구상하며 연대와 조직화만이 희망이라고 역설하는 세계적 지성 놈 촘스키. 올해 말로 만 91세를 맞는 그가 30여년간 그를 인터뷰해온 독립언론인 데이비드 바사미언과 2013년 6월부터 2017년 6월까지 진행한 12번의 인터뷰를 엮은 대담집이다.
12편의 인터뷰는 세계 도처의 현안들을 전방위적으로 다룬다. 점증하는 환경위기와 핵전쟁의 위협, 중동 지역을 넘어 아프리카·동남아까지 달구고 있는 이슬람 무장세력, 시민적 자유를 위협하는 국가의 감시와 통제, 민주주의의 후퇴와 복지국가 해체, 인공지능 군비경쟁에 이르기까지 전지구적인 이슈들을 진단한다. 이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분석하는 촘스키의 언어는 쉽고 정확하며, 시야는 크고 넓다. 일관된 세계관을 통한 그의 통찰은 명쾌하며, 모든 사안에 한결같이 비타협적으로 접근하는 자세는 글의 설득력을 높인다.『세계는 들끓는다: 전지구적으로 위협받는 민주주의를 위하여』는 세계적 석학의 식견을 통해 복잡한 국제적 이슈들을 비판적으로 독해하고 더 나은 세계를 위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하는 독자들을 위한 필독서이다.
한편 촘스키와 긴 시간 호흡을 맞춰온 바사미언은 뜨거운 현안들을 군더더기 없이 짚는 것에 곁들여 ‘인간 촘스키’의 단면을 이끌어내는 질문들을 적절하게 배치했다. 모든 권위적인 것에 도전하는 타고난 반골기질, 청소년기부터 시작된 아나키즘에의 경도, 이어지는 청년기의 활동과 지적 여정, 활동가와 지식인으로서 갖고 있는 책무의식 등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신자유주의의 시대 들끓는 모순을 폭로하다
후퇴하는 민주주의, 해체되는 복지국가
‘오늘날 미국에는 하나의 정당밖에 없다. 그것은 기업당이다. 그 당의 한 정파가 민주당이라 불리는 온건 공화당이다. 현재의 공화당은 실은 정상적인 의회주의 정당 흉내도 못 내는 일개 정치조직일 뿐이다.’(21~22면) 촘스키의 이 신랄한 논평을 현실로서 입증한 것이 오바마에 이은 트럼프의 집권이다. “옴짝달싹 못하고 자본과 권력에 복무”하는 ‘정치조직’ 공화당이 대중의 표를 얻기 위해 동원한 것은 가장 극단적이고 비이성적일 것 같은 이들, 기독교 복음주의자와 순혈주의자 들이었다.(22면)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면서 대중을 위하는 것처럼 포장하는 폭스TV 같은 거대 미디어기업의 선전활동과 텔레비전 광고가 이들 대중을 기만하는 데 앞장섰다.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방치되어온 백인 남성 노동자계급의 분노는 트럼프의 당선으로 귀결되었다. 실제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소득수준 상위 0.1%의 사람들은 이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은 철저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책을 설계하고 집행한다. 이 집중된 사적 자본의 심사를 거치지 않으면 정계에 들어갈 수조차 없고, 수억 달러 기금을 모으지 못하면 퇴출된다. 촘스키는 이런 구조를 사실상의 ‘금권정치’라고 부르며 민주주의의 ‘결핍’이라는 표현으로도 모자라다고 강조한다.(28면) 이들 기득권층은 일상적인 통화감찰과 정보수집으로 감시를 체계화하고, 테러 위협을 과장해 대중이 국가의 통제를 수용하게 만들며, 에너지회사의 이권을 위해 기후변화를 부정하고, 학자금 지원과 의료보장을 폐지하고 식량배급표와 실업수당을 삭감한다.
촘스키가 보기에 이런 민주주의의 후퇴 뒤에는 신자유주의의 득세가 있다. 전후 유럽이 이룩한 최대 성과인 복지국가는 사민주의·중도주의 정당들이 신자유주의의 광풍 앞에서 무리한 요구를 수용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비단 복지혜택의 축소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가능케 한 사회적 합의, 민주주의의 쇠퇴를 가져왔다. 자본의 득세와 우경화, 이는 유럽이나 미국만의 일이 아니며 복지정책이나 민주적 제도 같은 특정 부문에만 걸친 것도 아니다. 신자유주의가 부추기는 우경화, 이는 자본주의를 수용한 세계 어디에서나 목도할 수 있는 현실임을 촘스키는 꼬집는다.
폭력의 굴레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중동지역 분쟁의 뿌리는 미국에 있다
촘스키는 오늘날을 미국의 우익세력이 정치적 이익을 취할 목적으로 자국민을 위협하는 ‘공포마케팅’의 시대라고 진단한다. 공포마케팅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테러에 대한 공포는 직접적으로 중동의 이슬람세력과 연결된다. 이 갈등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누가 씨앗을 뿌렸나? 촘스키는 ISIS를 낳은 것은 미국이며, 지하드의 테러를 아프가니스탄의 좁은 부족 범위에서 서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전세계로 확산시킨 것은 미국의 폭력적인 대외정책이라고 말한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을 앞세운 서구 제국주의 세력은 중동 지역에서 자신들의 유불리에 따라 상대를 골라 지원했다 배신하기를 되풀이했다. 미국은 그 최전방에 있었다. 정교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정책들이 아니었다. “손에 쥔 게 망치밖에 없으면 모든 게 못처럼 보인다.” 미국의 손에 망치가 있었으며, “그걸로 뭔가를 후려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정말 잘하는 일”(179면)이었던 것이다. ‘도저히 정책이라 부르지 못할’ 이런 대외정책의 결과 명분 없는 전쟁, 무차별 폭격과 민간인 대량학살이 이른바 ‘실수로’ 자행되었다.
촘스키는 가장 직접적이고 첨예한 분쟁의 현장인 팔레스타인-이스라엘부터 시리아 지역의 참화, 최근 터키 에르도안 정권의 대대적인 쿠르드족 탄압 등에 이르기까지 중동지역 분쟁의 어제와 오늘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한다. 이 분쟁의 역사는 곧 미국 개입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것은 부시나 오바마, 트럼프 어느 한 정부나 정당의 입장이 아니다. 테러라는 가면 뒤에 숨어 미국을 움직인 것은 오로지 ‘석유’, 그 이권이었음을 촘스키는 분명히 지적한다.
그럼에도 촘스키는 폭력의 악순환을 멈추고 미국의 대외정책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고 전망한다. 테러로부터의 방어를 목 놓아 외치는 그 정부야말로 테러의 위협을 극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보국가에 반대하는 여론을 형성한다면, 미국의 파행적인 대외정책을 멈출 수 있다는 설명이다.
약탈적 자본주의가 부른 재앙, 환경위기
자기파괴를 향해 질주하는 인류를 향한 일갈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진정한 위기는 기후변화에 따른 환경위기다. 촘스키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대로, 해수면 상승과 국토 침수에 따라 발생할 수천만의 방글라데시 기후난민, 공동 상수원인 히말라야 빙산 붕괴로 발발할 인도-파키스탄 분쟁, 그로 인한 핵전쟁과 전세계적 기아의 가능성은 기후변화가 한 나라나 어느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야말로 인류 전체의 생존이 걸린 문제임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에 가장 큰 책임을 진 나라 중 하나인 미국의 행태는 어떤가? 에너지회사와 다국적기업은 온갖 대중매체를 동원해 ‘기후변화란 없다, 있다 해도 사람 탓이 아니라 태양의 흑점 등등 때문이다’라는 궤변으로 사람들을 “완전한 비이성과 자기파괴로” 몰아가고 있다.(61~62면) 미국은 이들 기업의 이익을 앞세우기에 급급하다. 트럼프 정부는 더 많은 화석연료, 더 많은 석탄발전소를 요구하며, 환경 규제를 철폐하고,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개발도상국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려 한다. 그야말로 다함께 “벼랑으로 질주하자”(221면)라고 말하는 중이다.
이에 맞서 최전선에 서 있는 것은 직접적으로 생존을 위협받는 토착집단들이다. 촘스키는 오로지 이윤만을 추구하는 약탈적 자본을 강도 높게 비판하며 자본주의-제국주의에 의해 무자비하게 수탈당한 현장의 참상과 함께 브라질과 베네수엘라의 야노아뫼족, 캐나다의 퍼스트 네이션즈, 콜롬비아의 깜뻬시노, 호주와 인도의 부족공동체 등이 약탈에 맞서 기울이는 노력 등을 소개한다.
오직 연대와 조직화만이 답이다
촘스키가 한국에서 발견한 희망의 빛 한 줄기
마지막 인터뷰가 이루어진 2017년 6월 20일은 촛불혁명으로 문재인 정부가 탄생한 직후이자 북핵위기가 한창 고조되던 시점이다. 미국이 “서울을 비롯한 남한 대부분을 초토화할”(271면) 수 있는 공격가능성을 시사한 가운데, 촘스키는 미국이 북한의 제안을 수용하면 위기를 해소할 수 있다는 “다른 선택지”(271면)를 제시한다. 북한은 자신들을 겨냥한 대규모 군사훈련을 중지하면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을 동결하겠다고 이미 제안했고, 이를 미국이 수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수용은 더 광범위한 협상의 토대가 될 것이고, 이 협상을 통해 북핵 위기를 극적으로 감소시키고 나아가 종결할 가능성도 있다는 전망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모든 종류의 도전에 대해 평화를 위한 외교적 노력보다는 힘을 선택해 제멋대로 행사해온 습관에 따른 것이다. 촘스키는 “2차대전 이래 곪아터질 지경이 된” 한국 문제에 있어 2017년 대선에서 희망의 빛을 발견하는데, 실제로 문재인 정부가 구사한 외교적 방안과 화해 노력이 이 위기를 극적으로 가라앉히고 협상의 물꼬를 텄음은 모두가 잘 아는 대로다.
세계를 해석하는 촘스키의 일관성과 통찰력은 평생 굽힘 없이 고수해온 진보적 세계관에서 비롯한다. 그 세계관을 통해 그는 세계 곳곳에서 지금 벌어지는 문제를 보다 큰 시야에서 꿰뚫어 조망한다. 그에게 진짜 변화는 그것을 만들려는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연대와 상호지원으로부터 시작된다. 책의 곳곳에서 그는 진짜로 변화를 만들어보려는 사람들의 집단적 참여, 연대와 공동체, 조직화의 중요성을 거듭 말한다. 이는 그에게만 진리가 아니며 과거에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앞으로 일굴 진짜 변화는 그것을 만들려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 간의 연대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제1장 국가의 감시와 민주주의
제2장 중동을 둘러보다
제3장 권력체제는 선물을 주지 않는다
제4장 ISIS와 쿠르드족, 그리고 터키
제5장 살아 있는 기억
제6장 공포마케팅
제7장 동맹과 지배
제8장 갈등의 뿌리
제9장 더 나은 사회를 향하여
제10장 선거와 투표
제11장 위기와 조직화
제12장 트럼프의 집권
주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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