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의 9·11을 겪은 세계적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역사적 증언이자 치유와 희망의 기록
칠레 사회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군부독재에 저항한 세계적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망명기를 담은 회고록 『아메리카의 망명자: 칠레와 미국, 두번의 9·11 사이에서』가 발간됐다. 망명과 다문화 체험을 깊이있는 통찰로 녹여낸 작품들을 발표하며 주목받은 도르프만은 이 책에서 1973년 9·11 삐노체뜨의 쿠데타로 망명길에 나선 후 빠리와 암스테르담 등을 거쳐 다시 아메리카로 귀환하는 자신의 여정을 2001년 두번째 9·11을 겪은 다음의 시점에서 돌아본다. 도르프만의 또다른 회고록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창비 2003)가 멈춘 곳에서 이어지는 내용으로, 망명 시절의 회상과 1990년 칠레로 잠시 귀환했을 때의 일기가 교차하는 방식으로 구성돼 있다. 그에게 『아메리카의 망명자』는 칠레를 두고 떠난 것, 쌀바도르 아옌데를 대통령으로 세운 선거혁명으로 유토피아가 올 듯 약속한 것, 그리고 칠레를 끝내 다시 떠나야 했던 경험이 남긴 트라우마를 대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책은 망명기이자 역사적 증언이며, 동시에 치유기이자 희망의 기록이다.
망명자로서의 삶, 그리고 그후
아리엘 도르프만은 유대인으로 아르헨띠나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이념적 성향에 따라 미국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열두살부터는 칠레에서 성장했다. 평화혁명을 이끈 아옌데 대통령 수석참모의 문화언론 보좌관으로 칠레 사회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섰으나, 1973년 9월 11일 삐노체뜨 쿠데타를 맞았다. 기적적인 우연의 연속으로 대학살을 피한 그는 아르헨띠나를 거쳐 빠리와 암스테르담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망명생활은 목숨의 위협 같은 생존문제에서부터 현실적인 삶의 문제까지 그를 괴롭혔다. 도둑맞은 상태에서도 “칠레가 군홧발에 짓밟히고 있는데 당신들은 이걸로 불평하고 있네요”라는 전형적인 도덕적 공갈에 시달리고, 교육학 석사학위를 막 받으려던 부인은 사회적 성취를 잃고, 사랑하는 할머니가 안장된 묘 위치를 알 수가 없으며, 그는 극심한 문학적 고갈을 겪는다.
그의 일기는 칠레 국민이 1988년 국민투표로 독재자 삐노체뜨를 퇴각시킨 뒤, 아리엘 도르프만이 1990년 칠레로 돌아간 날에서 시작한다. 긴 기다림 끝에 돌아온 칠레에서 도르프만은 삐노체뜨의 흔적에 불안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칠레를 꿈꾼다. 그러나 당시 일기에 대한 회고로 2010년의 그는 “이십년이 지난 지금 일이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걸 알기에 이 맹세를 돌아보면 웃게 된다”라고 평한다. 다시 돌아간 칠레에서 도르프만은 군대가 대학에 개입한 후에도 남아 있던 이들이 정치망명자를 평가하고, 반(反)삐노체뜨 인물들이 위협을 당하며, 급기야 아들 로드리고가 다른 이를 도우려다 경찰에 살해당할 위기에 처하는 사건을 경험한다. 그는 “내가 여기서 필요한 사람이라 생각했고, 추방을 겪는 동안 내가 배운 것과 군홧발에 시달리며 칠레 시민들이 배운 것을 화해시킬 방법을 찾게 될 거라 생각했다. 내 삶의 두 절반이 그렇게 쉽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인 양”이라며 마침내 돌아온 칠레 곳곳에서 자신의 이상과 다른 현실을 마주한다.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전하는 ‘그날’의 이야기
그리고 아메리카를 잇는, 뿌리 내린 코즈모폴리턴의 고뇌 」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오보로 서문을 시작하는 이 회고록에는 중요한 갈피마다 죽음이 재차 등장한다. 도르프만의 글쓰기는 9·11 삐노체뜨 쿠데타 이후 칠레에서 숱하게 죽어갔거나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는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한 발화이며, 또 때로는 이미 죽은 유령이 아닐까 느끼는 자신의 생존을 증명하는 안간힘이기 때문이다.
한편, 『아메리카의 망명자』는 스페인어를 본문 중간중간에 사용하는 독특한 방식이 눈길을 끈다. 도르프만에게 망명은 공간적 이동만이 아니라 언어적 이동이기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스페인어와 영어에 아메리카의 남과 북, 그리고 둘 사이의 역사적 관계와 정치문화적 차이가 고스란히 첨부돼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도르프만이 두 언어를 모두 받아들이며 사용하는 것은 곧 “아메리카를 잇는 다리”라는 역할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연유로 “뿌리 내린 코즈모폴리턴”이라는 흥미로운 정체성이 탄생한다.
한국과 칠레의 현대사, 그리고 아리엘 도르프만
민주주의혁명과 뒤이은 쿠데타, 그리고 억압의 세월을 거쳐 다시금 민주화의 역정을 밟는 칠레 현대사는 우리 현대사와의 유사성 때문에 더 알려졌어야 마땅한데 또 바로 그 때문에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아리엘 도르프만의 이름 역시 영화화된 『죽음과 소녀』(창비 2007) 외에는 잘 알려졌다고도, 또 알려지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는 지점에 놓여 있다. 하지만 꾸밈없는 달변에 녹아 있는 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 유머러스하게 자학적이지만 환멸에 굴복하지 않는 강건함, 무엇보다 이 책에도 여지없이 실현된 정치적 주제와 문학적 감수성의 발군의 결합을 생각할 때, 도르프만은 지금보다 더 많은 한국 독자와 만났어야 한다. 독자들은 이 회고록에서 『죽음과 소녀』를 비롯한 그의 작품이 갖는 색다른 맥락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도르프만의 더 많은 작품으로 건너갈 기회 또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시간과 망명에 관한 메모
서문
제1부・도착
제2부・귀환
제3부・출발
에필로그
연보
옮긴이의 말
코즈모폴리턴이라는 마지막 단계를 설득력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여정의 길목마다 숱하게 깔린 물리적이고 정치적이며 또 감정적인 난관들을 통과하며 그가 보여주는 최대한의 정직함일 것이다. 그리고 그 정직함에는 “불의도 불필요한 슬픔도 없는 세계를 상상하고 그 세계를 위해 싸우는 일이 왜 중요한지 절대 잊지 않겠노라”는 그의 소년 시절의 맹세가 고스란히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황정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