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시의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운 대표 시인들의 주옥같은 명편을 한데 모은 『밤 한 톨이 땍때굴』(첫 읽기책 10)이 출간되었다. 유려한 운율과 생동하는 말맛, 어린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서정 등 유년의 눈높이에 알맞은 미적 양식을 지녔던 근대 동시 중 탁월한 성취를 보인 시편을 가려 뽑았다. 어린이의 심리를 실감 있게 묘사하고, 유년 독자가 친근감을 느낄 법한 시상(詩想)으로 재미를 선사하며, 잊혀 가는 고운 우리말 표현을 배울 수 있는 동시들을 실었다. 섬세하면서도 풍성한 우리말의 감각과 자연의 이치, 삶을 살아가는 지혜 또한 깨달을 수 있다. 어린이 독자에게는 처음 시 읽는 즐거움을 안겨 주고, 어른에게는 훌륭한 동시의 모범이 되어 줄 만한 책으로 자신 있게 내어놓는다.
동시에는 이야기에서는 쉽게 맛볼 수 없는 말의 재미가 담겨 있습니다. 짧고 단순한 말들로 되어 있지만, 반복해서 읽다 보면 마치 노래를 부를 때처럼 생생한 가락과 말맛이 느껴집니다. 여러분은 여기 실린 동시들을 눈으로 읽고 말 것이 아니라 부모님과 혹은 친구들과 소리 내어 함께 읽어 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동시가 담고 있는 참맛이 더욱 새록새록 다가올 것입니다. _아동문학평론가 김제곤 「엮은이의 말」에서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기를 거쳐 한국 전쟁에 이르기까지 척박했던 시절, 당시 어린이들은 동시를 읽으며 우리 말과 글을 익히고, 즐거운 상상을 하며, 참된 마음을 가꾸어 나갔다. 여기 실린 동시들은 요즘 어린이들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태어나기도 전에 지어졌지만 어제오늘 갓 나온 동시보다 더 어리고 순박한 세계를 품고 있다. 이 시들은 어린이 혼자, 속으로 빨리 읽기보다 친구나 어른과 함께 천천히 소리 내어 읽으면 그 참맛이 느껴진다. 깨끗한 우리말로 정성껏 지어낸 이 유년동시들이 오늘의 어린이들에게 시원한 웃음과 따스한 눈물을 안겨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엮은 선집이다.
언니의 언니_윤석중
난 밤낮 울 언니 입고 난/헌털뱅이 찌꺼기 옷만 입는답니다.//아, 이, 조끼두 그렇죠,/아, 이, 바지두 그렇죠./그리구, 이 책두 언니 다 배구 난 책이죠,/이 모자두 언니가, 작아 못 쓰게 된 모자죠.//어떻게 언니의 언니가 될 순 없나요?
『밤 한 톨이 땍때굴』에는 윤석중, 이원수, 권태응 등 11명의 시인이 발표한 동시들 중 각별히 빼어난 65편을 선해 실었다. 동화와 어린이 문화 운동으로 널리 알려진 방정환은 아름다운 동시를 쓴 시인이기도 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 정지용이 남긴 동시 또한 만날 수 있다. 표제작이기도 한 윤석중의 「밤 한 톨이 땍때굴」은 낮잠 주무시는 할아버지 몰래 밤을 구워 먹으려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히 그려지며, 아기자기한 운율과 말맛 또한 일품이다. 같은 시인의 「언니의 언니」 역시 입말을 살린 절묘한 언어 감각으로 독자에게 읽는 재미를 준다. 옷도, 책도 언니에게 물려받기만 하는 것이 속상한 동생의 마음을 알아주는 대목에선 시인만의 남다른 눈썰미가 빛난다.
호주머니_윤동주
넣을 것 없어/걱정이던/호주머니는,//겨울만 되면/주먹 두 개 갑북갑북.
이처럼 여기 실린 동시들은 운율과 말맛을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을 뿐 아니라, 어린이들의 속마음을 달래 준다는 점에서 긴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윤동주의 짤막한 시 「호주머니」는 단순하다 할 만큼 담백한 언어로 주머니처럼 텅 빈 마음을 충만하게 채워 준다. 고양이와 강아지가 무서워 혼자 길을 못 나서는 아기가 등장하는 윤복진의 「까까집 가는 길」은 어린이의 두려움에 우선 공감하면서도 함께 길을 나서는 세 식구의 화목한 모습으로 시를 맺어 독자에게 포근한 웃음과 안도감을 안긴다. 그런가 하면 이원수의 「해님」에는 “꽁꽁 언 땅에/꽁꽁 언 물에/호오 호오 입김을/불어 주”는 해님에게 자신을 투영하며 “내 동생 언 손은/호오 호오 호오/내가 불어 주지요.”라고 읊는 의젓한 어린이가 있다. 때로는 그저 귀엽고 사랑스럽다가도 때로는 돌연 깊은 속내를 드러내는 유년의 특징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쉰다. 이 시들이 간직한 소박하고도 진실한 말에서 우러나오는 시적 울림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값지다. 볼거리가 넘치지만 정작 유년들이 마음껏 읽고 즐길 만한 시와 노래를 찾기 어려운 지금, 유년에 대한 오롯한 이해를 바탕으로 쓰인 동시가 새삼 귀하다.
‘근대 유년동시 선집’을 펴내며
제1부
방정환 산길
늙은 잠자리
허재비
윤복진 꽃베개 꿈베개
동리 의원
하늘
까까집 가는 길
파아란 세상
노골노골 노고지리
뱅글뱅글 돌아라
윤석중 한 개 두 개 세 개
누나 얼굴
잠 깰 때
키 대보기
언니의 언니
새 신
연잎
밤 한 톨이 땍때굴
이원수 징검다리
해님
봄 시내
어디만큼 오시나
비누 풍선
이 닦는 노래
정지용 할아버지
홍시
넘어가는 해
굴뚝새
삼월 삼질날
바람
제2부
강소천 숨바꼭질
울 엄마 젖
닭
엄마 소
호박
권태응 어린 고기들
고추잠자리
감자꽃
막대기 들고는
북쪽 동무들
오리
오곤자근
닭 모이
더위 먹겠네
우리가 어른 되면
남대우 참새
뜀뛰기
베개 애기
눈송이 펄펄
박목월 이상한 산골
토끼집의 불
다람다람 다람쥐
한 오큼
오리는 일 학년
옛날옛날
통, 딱딱, 통, 짝짝
오장환 바다
수염
해바라기
윤동주 참새
병아리
거짓부리
호주머니
무얼 먹고 사나
만돌이
엮은이의 말
글쓴이
엮은이의 말 마음이 기쁠 때나 슬플 때 우리는 가끔 노래를 부릅니다. 기쁠 때 노래를 부르면 그 기쁜 마음이 더 커지는 것 같고 슬플 때 노래를 부르면 슬픈 마음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지요. 노래는 우리의 마음을 부풀게도 하고 달래 주기도 합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요? 그분들 역시 기쁘거나 슬플 때 입에서 입으로 노래를 이어 불렀습니다. 우리가 나라를 빼앗기고 설움에 겨워 살던 때에도, 가난하고 고달픈 살림살이를 이어 가던 때에도 어김없이 노래를 불렀지요. 그 노래에 나오는 노랫말들은 대부분 어린이를 아끼는 시인들이 지은 동시였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방정환 선생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런데 그분이 지은 동시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방정환 선생님은 어른들 밑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자라나는 어린이들을 위하여 여러 편의 동시를 남겼습니다. 방정환 선생님뿐만이 아닙니다. 윤복진, 윤석중, 이원수, 강소천, 박목월 같은 분은 방정환 선생님의 뒤를 이어 우리 어린이들을 위한 좋은 동시를 많이 썼습니다. 여러분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물론 아버지, 어머니까지 이분들이 쓰신 동시를 노래로 부르며 자랐습니다. 그뿐이 아니지요. 정지용 시인하면 빼어난 어른시를 지은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분인데 그분도 어린이들을 위한 훌륭한 동시를 남겼습니다. 그분의 동시를 읽고 자란 윤동주 시인 역시 뛰어난 동시를 남겼습니다. 또한 오장환, 남대우, 권태응 같은 시인도 어린이를 위한 좋은 동시를 많이 쓴 분들입니다. 이 책은 그런 열한 분 시인의 동시 가운데 여러분이 꼭 읽었으면 하는 작품들만을 골라 엮은 책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나온 작품들이긴 하지만 여기 실린 동시들을 읽다 보면 여러분은 마치 자기가 겪은 일을 마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모릅니다. 허재비(허수아비)를 놀리는 모습이나 뱅글뱅글 맴돌이 놀이를 하는 모습, 새 신을 신고 기뻐하는 모습이나 동무들과 누구 키가 더 큰가 키 재기를 하는 모습은 다름 아닌 여러분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언니의 언니가 되고 싶어 하거나 추운 바람에 나가 노느라 코와 손이 빨개진 채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호기를 부리는 모습도 그러합니다. 시험공부를 열심히 하는 대신 전봇대에 돌멩이를 던져 자신의 점수를 미리 점치는 모습은 또 어떻습니까. 물론 막대기 들고 오볼 달린 대추를 따고, 땍때굴 굴러온 밤 한 톨을 어른 몰래 구워 먹고, 깡충깡충 산토끼도 건너게 돌다리를 놓는 모습은 지금의 여러분과 다른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말을 따라 읽다 보면 그 시들에 나오는 아이들 모습 역시 여러분과 아주 친근한 동무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동시에는 이야기에서는 쉽게 맛볼 수 없는 말의 재미가 담겨 있습니다. 짧고 단순한 말들로 되어 있지만, 이것을 반복해서 읽다 보면 마치 노래를 부를 때처럼 생생한 가락과 말맛이 느껴집니다. 여러분들은 여기 실린 동시들을 눈으로 읽고 말 것이 아니라 부모님과 혹은 친구들과 소리 내어 함께 읽어 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동시가 담고 있는 참맛이 더욱 새록새록 다가올 것입니다. 2017년 1월 아동문학평론가 김제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