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낯설고 신기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며 한국의 대표 시인으로 자리매김한 김기택 시인의 동시집이 출간되었다.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세상을 만나면서 낯설고 신기한 감정을 느끼는 어린이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그려 냈다. 어린이의 가슴 깊숙한 곳에 숨겨진 속마음까지 들여다보는 눈길이 인상적이다. 서른 해 가까운 시력(詩歷)과 어린이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새롭고 개성 넘치는 시 세계가 큰 기대를 품게 한다.
선입견과 편견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맑은 눈!
『빗방울 거미줄』에는 어린이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이 담겨 있다. 김기택 시인은 어린이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무엇을 가르치는 대신,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세상을 그려 내는 데 최선을 다한다. 선입견이나 편견을 멀리한 채, 자연을 바라보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모습을 차분하게 동시로 옮긴다. 그래서 바람이 부는 들판에서 운동하는 나무의 모습을 발견하고(「나무야 운동하자」), 쓰레기장에서 이질적인 물건들이 서로 어울려 있는 모습을 찾아낸다(「우리 동네 쓰레기장에는」). 그동안 우리가 무심히 바라보았던 세상의 모습들이 『빗방울 거미줄』 속에서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자전거가 침대에 누워 있어요. / 고양이가 옷장에서 나와요. / 구두가 냄비 안에 들어가 있어요. / 화분이 냉장고에 들어가 있어요. // 텔레비전이 소파 위에 앉아서 / 지나가는 사람들을 시청해요. / 느티나무에 걸려 있는 원피스가 / 훌라후프를 해요. // 강아지가 깨진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 거울 속에서 둘로 갈라져요. —「우리 동네 쓰레기장에는」 전문
김기택 시인은 관찰한 세계를 옮겨 적는 데 그치지 않고, 감각적인 표현을 통해 익숙한 풍경을 전혀 낯선 것으로 만들어 낸다. 전동차 안에서 사방을 헤집고 다니는 어린이들의 웃음소리를 장난꾸러기 유령처럼 그리고(「왁자지껄」), 합창단 지휘자의 손짓을 마치 국수 면발을 뽑는 것처럼 그려 내기도 한다(「합창」). 때로는 매미 울음소리에 날개를 달고, 개 짖는 소리에 이빨을 달고, 아이 우는 소리에 콧물을 매달기도 한다.
바람 들어오라고 창문을 열어 놨는데 // 매미 우는 소리가 들어온다. / 개 짖는 소리가 들어온다. / 아이 우는 소리가 들어온다. // 매미 우는 소리에는 날개가 달렸다. / 개 짖는 소리에는 이빨이 달렸다. / 아이 우는 소리에는 콧물이 달렸다. // 바람이 데리고 들어온 것들이다. / 바람 타고 날아다니는 것들이다. —「여름밤」 전문
『빗방울 거미줄』에 담긴 낯설고 신기한 풍경은 새로움을 찾아내려는 노력에서 비롯한 것이며, 「시인의 말」에서 밝힌 대로 어린이의 마음으로 쓴 덕분이기도 하다. 어린이에게는 하루에 일어나는 많은 사건이 처음 겪는 일이고 만나는 수많은 사람이 처음 보는 사람이고 마주치는 수많은 사물이 처음 대하는 사물이다. 그러한 어린이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 덕분에 새로운 세계와 마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선입견과 편견 없이 그린 세계와 마주한 어린이 독자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신기하고 특별한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의 마음속 불안과 두려움까지 들여다보는 눈!
김기택 시인은 이번 동시집에서 줄곧 ‘보여 주기’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보여 주기’를 통해서 더 강력하게 말한다. 시인은 어린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에 대해서 말하고, 어린이들이 생활하는 공간에 대해서도 말한다. 시인은 도로에서 차에 치여 죽은 고양이를 통해 세계의 비정함을 드러내고(「경축! 새 도로 개통」), 서로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러운 거리의 모습을 그리기도 한다(「왜 안 들리나 했더니」). 보관대 쇠기둥에 묶인 자전거에서 갑갑한 일상에 붙들린 어린이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전거들이 꼼짝도 못 하고 / 자전거 보관대 쇠기둥에 매여 있습니다. (…) 며칠 전에 자전거 한 대가 도망갔다고 합니다. / 주인이 돌아와 보니 / 튼튼한 쇠줄이 끊어져 있고 / 자전거는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는 거예요. (…) 틈틈이 닦아 주고 조여 주고 기름 쳐 주는데 / 눈이 오거나 비가 오면 / 따뜻한 집 안으로 데려와 재워 주는데 / 뭐가 맘에 안 들어 자전거가 도망가는 걸까요? —「자전거가 도망간다고?」 부분
시인은 어린이들의 처지뿐만 아니라 속마음까지도 드러낸다. 어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그러나 많은 어린이의 가슴속 깊은 곳에 도사린 불안과 공포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시인은 사람들의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머리를 헝클어뜨리면서 걷잡을 수 없이 마구잡이로 부는 바람의 모습을 통해 어린이들의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의 변화를 보여 주기도 하고(「누구를 닮았을까 저 바람은」), 친구들 앞에서는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겨우 변기에 앉아야 마음 편하게 털어놓는 어린이의 마음도 보여 준다(『나는 변기가 좋아』).
차 안이 갑자기 컴컴해진다 /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 열심히 눈을 깜박거려도 / 눈을 뜬 것 같지 않다 // 콧구멍에도 어둠 / 입구멍에도 어둠 / 귓구멍에도 어둠 / 숨을 들이쉰 허파에도 어둠 // 갑자기 몸이 다 없어지고 / 뜨나 마나 한 / 눈알만 멀뚱멀뚱 // 밝은 빛을 / 콧구멍으로 실컷 마셔 봤으면 / 아무리 못생겨도 / 내 얼굴을 환하게 봤으면 —「긴 터널을 지날 때」 전문
시인은 어린이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응원이나 격려를 보내지도 않는다. 다만 어린이가 느낄 만한 감정의 모습을 한 폭의 풍경으로 보여 준다. 어린이들이 자기 마음과 같다고 느낄 만한 모습을 보여 줄 뿐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어린이 독자들이 『빗방울 거미줄』을 읽는다면, 자기의 감정을 닮은 풍경을 통해 진정 깊은 위로와 위안을 받을 것이다.
머리말 | 어른이 잃어버린 어린이
제1부 세상에서 가장 시원한 오줌
뜨거운 호두과자
진공청소기
세상에서 가장 시원한 오줌
자전거가 도망간다고?
말없는 친구
말다툼
나는 변기가 좋아
왜 안 들리나 했더니
트램펄린
긴 터널을 지날 때
가을에 은행나무 길을 걸으면
왁자지껄
물 타기 말 타기
합창
제2부 나무야 운동하자
풀벌레
여름밤
빗방울 거미줄
누구를 닮았을까 저 바람은
꽃씨
태풍 오는 날
소나기
매미 소리
나무야 운동하자
바람을 어떻게 그릴까
소나기구름
나뭇잎 편지
창문 그리기
향기로운 똥 냄새
제3부 그늘이 도망갔어요
혼자 노는 개
푸드 트럭
경축! 새 도로 개통
목발
풀
철조망
그늘이 도망갔어요
비누 없이 샴푸 없이
나무는 우리 집이에요
발이 하나뿐이지만
가로수
옛날에 학교 가는 길은
제4부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
우리 동네 쓰레기장에는
뱀이 꼬리를 흔들면
부지런한 게으름
가파른 언덕길
콧구멍
꼬부랑 할머니
꽃밭은 안 돼요
수수께끼
이빨 새싹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
아빠가 술 마시고 온 날
하필이면
쥐구멍, 쥐구멍이 어디야
해설 | 바람과 눈물방울로 그린 아이의 자화상_김정숙
어른이 잃어버린 어린이 어렸을 때 덩치가 크고 힘도 센 형이 썰매 탄다고 억지로 내 장갑을 빌려 간 적이 있었습니다. 빌려줄 때는 새 장갑이었는데 돌려받을 때는 해지고 더러워져 있었습니다. 장갑을 낀 채 장작불을 쬐느라 탄 곳도 있었습니다. 분하고 억울했지만 그 형을 이길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병아리가 장갑을 쪼아 먹었다.”라고 투덜거렸습니다. 그 형 이름에 ‘병’ 자가 들어가서 ‘병아리’라는 별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기억이 별로 없는 나에게 이일이 뚜렷하게 기억나는 걸 보면 그때 얼마나 억울했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병아리가 장갑을 쪼아 먹었다.’가 은유인지 어린 내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문장을 재미있게 만들겠다는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었고 그 형을 조금이라도 더 약올려 줄 말을 찾는 데만 골몰했을 겁니다. 상상으로만 온갖 심술보를 끌어와 그 못된 병아리를 어떻게 골려 줄까 궁리했겠지요. 그 말은 그 형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내 마음을 달래기 위한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내 안에 그런 어린이가 있는 걸 느낄 때가 있습니다. 갑자기 심술보가 터져서 어른인 나에게 짓궂은 장난을 하고 싶어지지요. 심술보를 터뜨려 줄 말을 찾고 싶어지지요. 그때 내 안에 어떤 즐거운 힘이 생기는 것을 느낍니다. 이 동시집에 실린 동시들은 그럴 때 나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어린이를 위한 시를 쓴 나는 어린이가 아닙니다. 옛날에 잃어버린 어린이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어린이는 재미없는 것들, 평범한 것들을 신기하고 재미있게 보는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아는 것, 경험한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들 대부분이 신기합니다. 경험 많은 어른의 눈에는 당연하고 재미없는 것들이 어린이의 눈에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무한한 신비로 보이게 됩니다. 어린이는 세상에서 처음 보는 게 많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는 평범한 사물도 신기하게 생동감 있게 재미있게 보는 특출한 능력이 있습니다. 이런 능력은 어른이 되면 거의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 동시집에 실린 시들은 그런 어린이를 되찾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 모릅니다. 어린이다운 생각과 호기심은 오직 한때에만 있는 소중한 것입니다. 나는 이런 소중한 시절을 지나 다시는 어린이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내 안에 어른이 되지 않은 어린이가 오는 드문 순간을 특별하게 생각합니다. 그 어린이는 기분이 좋을 때나 걱정거리가 없을 때에만 찾아옵니다. 그때 나는 호기심이 왕성해지거나 괜히 장난치고 싶어져서 어른들의 생각을 골탕 먹여 보곤 합니다. 그런 상상은 꽤 즐겁습니다. 그래서 내가 쓴 동시가 어른이 어린이를 흉내 낸 시가 아니라 어른이 어린이가 되기를 바라는 시, 어른의 마음에서 잃어버린 어린이가 되살아나는 시, 어른의 마음에 우연히 찾아온 어린이가 쓴 시이기를 바랍니다. 이 동시집은 초등학교 중학년・고학년 눈높이에 맞추어 쓰려고 했지만 중학생이 읽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한 어른도 즐길 수 있습니다. 어린이를 잃은 것을 아쉬워하는 어른, 가끔은 어린이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어른, 어린 심술보가 터질 때 이상한 즐거움을 느끼는 어른이라면 이 동시집을 즐겁게 읽을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2016년 11월 김기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