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커』의 배미주가 6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고대 비단길을 배경으로 하는 매력적인 소설 『바람의 사자들』이 출간되었다. 게임과 자연이 결합된 미래 세계를 그려 “우리의 SF가 마침내 ‘유년기의 끝’에 도달했음을 알린 책.”(김도훈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이라고 평가받았던 『싱커』의 작가 배미주의 신작이다. 기록에 희미하게 남은 수백수천 년 전 일이 세 편의 소설로 재구성되었다. 왕이 애지중지한 유리구슬을 만든 장인, 사막 너머 사마르칸트까지 흘러든 당나라 병사, 황제의 명으로 서역을 찾아 떠난 한나라 원정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인물들은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한 작가의 손끝에서 운명에 맞서는 개성적인 주인공들로 되살아났다. 중앙아시아 서쪽 끝에서 한반도까지 시공간을 넘나드는 이야기들은 절묘하게 연결되며 한눈팔 새 없이 빠르게 전개된다. 작가는 당시의 분위기와 풍경을 생생하게 그려 내어 독자들을 고대의 초원과 사막과 바다로 데려간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 속에 꿈, 자유, 우정, 사랑 등 가장 보편적이며 인간적인 가치에 대한 깊은 메시지가 담겨 있어 오래도록 여운을 남길 것이다.
『바람의 사자들』은 고대 문헌 속 작은 소재를 씨앗 삼아 광활한 실크로드를 배경으로 역사적 상상력을 펼치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당대의 분위기와 인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작품의 요소들이 하나같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고, 드넓은 무대를 관통하며 이야기가 호방하게 전개되는 점도 신선하다. 손에 잡힐 듯한 묘사와 인간의 운명에 대한 통찰 등이 돋보이며, 무엇보다 이색적인 시공간으로 몰입하게 하는 작가의 솜씨가 빼어나다._원종찬(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구슬, 종이, 목초, 작은 것에 깃든 장대한 이야기
아주 사소한 기록이나 유물일지라도 이면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 작가 배미주는 짧은 역사적 기록에 시선을 돌려 파란만장한 뒷이야기를 상상해 냈다.
첫 번째 수록작인 「이자야의 구슬」은 신라 왕의 무덤에서 발굴된 유리구슬을 소재로 삼았다. 사람 얼굴과 새, 꽃 등이 그려진 구슬의 제작 방식은 이집트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발견된 것들과 동일하다고 한다. 작가는 이 작은 단서를 토대로 인도네시아 출신 유리 장인 이자야를 창조해 신비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편 서역 원정에 나섰던 당나라군의 병사가 이슬람 세계에 제지 기술을 전했을 것이라는 학자들의 추측은 「사마르칸트의 제지장」에 모티브를 주었다. 이름 모를 당나라 병사는 절대 좌절하지 않는 강인한 인물 모루로 되살아났다. 마지막으로 「감보와 알지」의 주인공은 한 무제의 명령을 받아 장건과 함께 서역을 개척하러 떠났다는 감보다. 십여 년간 흉노에 억류되었던 감보의 일생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지만, 작가의 상상력 덕에 한 편의 대하극으로 빈자리가 채워졌다.
사마르칸트에서 서라벌까지,
색다른 배경에서 펼쳐지는 환상적인 이야기
중국에서 시작하여 중앙아시아, 서아시아를 지나 지중해까지 이어졌다고 하는 비단길. 『바람의 사자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비단길을 종횡무진 누비며 운명을 건 모험을 겪는다. 「이자야의 구슬」에는 인도네시아의 작은 섬에서 태어난 유리 장인 이자야가 등장한다. 남다른 관찰력과 손재주로 실력을 키우던 이자야는 우연히 신라 출신 승려 혜명과 알게 된다. 혜명이 불의의 병으로 숨을 거두자, 이자야는 그를 대신하여 무작정 신라를 향한 바닷길에 나선다. 「사마르칸트의 제지장」도 맨몸으로 사막 한가운데 도시에 흘러든 소년 모루의 이야기를 그린다. 고구려 출신으로 당나라를 거쳐 사마르칸트에 정착한 모루는 제지 기술을 둘러싼 암투에 휘말리며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감보와 알지」는 비단길이 조금씩 형성되기 시작하던 기원전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감보는 친구 장건과 함께 서역 길을 찾는 원정대를 이끌던 중 흉노에 사로잡혀 버린다. 감보는 십 년 넘게 흉노에 끌려다니며 광활한 초원을 떠돌지만, 포기하지 않고 자유와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매혹적인 풍경에서 벌어지는 주인공들의 모험은 반전을 거듭하며 빠르게 전개되어서 독자들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당긴다.
“우리는 바람처럼 모래처럼 별처럼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바람을 닮은 이들이 부르는 인생 찬가
작가 배미주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앞길을 개척해 가는 인생을 보여 준다. 이자야는 부귀영화를 마다한 채 자신이 꿈꾸는 바다 빛깔 구슬을 만들어 내는 데 몰두하며, 모루는 악당에게 납치되어 버러지 취급을 받고 죽음을 눈앞에 두었으면서도 자신이 사람임을 부르짖는다. 삶을 대하는 주인공들의 태도는 감보의 독백에 집약되어 있다.
알지, 내 사랑. 마을이 사람들이 어떻게 사라져 갔냐고 물었지.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고. 하지만 나는 보았어. 메마르고 척박한 땅에서 사람들이 세우고 일군 마을과 성을. 알지, 내 사랑. 이 씨앗이 지금은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땅에 떨어져 햇빛과 바람을 맞으면 푸르게 깨어날 거야. 살아가는 일은 끝나지 않아. —본문(270면) 중에서
작가는 주인공들에 대해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자신의 운명에 힘껏 맞서고 소중한 사람을 지키려 애쓸 뿐이다.”라고 말한다. 독자들은 이름 없는 영웅들의 이야기에서 인간 의지의 위대함과 인생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자야의 구슬
사마르칸트의 제지장
감보와 알지
작가의 말 요즘 눈꽃 빙수에 꽂혔다. 서로 머리를 맞대고 예쁜 접시에 담긴 빙수를 퍼먹으면 행복해진다. 이런 게 어디서 왔을까? 우리를 둘러싼 온갖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오랫동안 우리 곁을 지켜 준 것도 있고 어느새 쓸모를 잃고 사라져 버린 것도 있다. 여기가 아닌 먼 곳에서 온 것도 있다. 우리를 고립시키거나 이어 주는 것들, 있으면 더 즐거운 것도 있다. 우리가 그것들을 만들고 퍼뜨렸듯이 그것들도 우리를 움직이고 변화시켰다. 좋은 것을 만들면 우리도 좋아진다. 나쁜 것을 많이 만들면 우리도 나빠진다. 구슬, 종이, 목숙. 사소한 것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상상했다. 사소한 것들이라도 거기 얽힌 이야기는 파란만장한 모험이라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구슬과 종이와 풀은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 그리고 내 이야기의 주인공들 또한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 거창한 말을 외치지도 않는다.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운명에 힘껏 맞서고 소중한 사람을 지키려 애쓸 뿐이다. 이름 없는 그들이 내게는 영웅이다. 삶에 대한 막막한 두려움과 회의에 사로잡혔을 때 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재미있고 힘을 주는 이야기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었던 게 생각보다 길고 어려운 여정이 되었다. 내가 서 있는 이쪽에서 사막과 설산과 바다 너머 저쪽 끝 사람을 찾아 나서듯 이 느린 모험 이야기를 썼다. 나에게 위로란 서로의 온기에 닿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에게 감사한다. 글을 쓰기 위해 홀로 틀어박혔을 때도 가족의 온기가 나를 감싸 주었다. 창비 출판사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늘 글 쓰는 게 외롭다고 느껴왔는데 함께 무언가를 완성해 가는 보람을 느꼈다. 우리는 솔직하고 열린 태도로 열심히 일했고, 덕분에 이 책이 조금은 나은 작품이 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야기는 삶을 닮았고 삶은 이야기를 닮았다. 세상에 범람하는 많은 이야기들은 진실과 거짓, 사실과 허구, 소망과 환상, 선택과 배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삶을 닮은 이야기든 이야기를 닮은 삶이든 무조건 믿지는 않길 바란다. 여기 담긴 이야기들은 허구이지만 거짓되진 않았다. 글을 쓰는 내내 이야기 속 사람들에게 진실하려 애썼기 때문이다. 작은 구슬을 들여다보았는데 그 안에 크고 둥근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이야기엔 그런 마법의 힘이 있다. 그리고 우리에겐 정말로 그런 마법이 필요하다. 2016년 7월 배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