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 우리 동네에 펼쳐진 마법 같은 사건들
평범한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는 이야기
오랜 세월 어린이들을 사로잡아 온 환상의 세계를 ‘지금, 여기’에 불러내는 색다른 상상력
우리 집에 밥풀만 한 작은 아이가 찾아온다면? 어떤 요리든 기가 막히게 맛있게 만들어 주는 프라이팬이 생긴다면? 밤마다 마법 칫솔이 날아와 내 이를 닦아 준다면?
신예 이한준 작가의 동화집 『노란 프라이팬』(신나는 책읽기 43)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화적 상상력이 가득한 다섯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동화집은 그림 형제나 안데르센의 동화를 떠올리게 하는 옛이야기적 마법 세계가 ‘지금, 이곳’에서 펼쳐진다는 점이 신선하다. 엄지 공주 같은 ‘밥풀이’, 마법 프라이팬과 칫솔, 시계 속 세상, 소인국 등 서양 동화의 발상과 한국의 가족 풍경이 만나는 순간이 친근감과 놀라움을 동시에 안겨 준다. 마법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동화 세계를 펼쳐 내는 우리 작가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작가만의 개성을 엿볼 수 있으며, 최근 보기 드문 동화적 상상력이 반갑다. 현대를 배경으로 독특하고 색다른 분위기를 선사하는 동화집으로 어린이 독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살아 있는 프라이팬이 만들어 주는 맛있는 이야기
표제작 「노란 프라이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노란 프라이팬’이다. 아무도 좋아해 주지 않아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노란 프라이팬은 마음씨 착하고 화목한 ‘우하하 가족’의 집에 오면서 비로소 깨어나 행복을 찾는다. 노란 프라이팬이 만들어 낸 평범한 메뉴들에도 우하하 가족은 별것 아닌 사물일 뿐인 프라이팬의 노력에 감사해한다. 노란 프라이팬은 가족들의 칭찬과 사랑에 보답하고자 더욱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들고, 그가 만들면 어떤 요리든 맛있게 된다는 사실이 온 동네에 알려진다. 가족, 이웃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일상의 행복을 누리던 노란 프라이팬은, 그러나 욕심 많은 ‘우당탕 가족’의 꾀로 인해 위기에 빠진다. 생각할 줄 아는 프라이팬의 등장으로 도입부터 눈길을 끄는 이 작품은 평범하지만 행복한 삶과, 미움과 욕심으로 가득 찬 삶의 대비를 통해 긴장을 고조시키고, 노란 프라이팬이 끝내 위기를 벗어나는 결말에서 통쾌함을 안긴다.
노란 프라이팬 위 매운 고추 양념 볶음밥엔 아주 이상한 모양이 만들어져 있었어. 그 모양은 누군가 젓가락으로 그린 것 같은 무섭게 치켜뜬 두 눈과 집어삼킬 듯 벌린 입이었어./“정말 살아 있어! 살아 있어!”/‘정말 살아 있는 줄 이제 알았냐!’/노란 프라이팬은 있는 힘껏 뛰어올랐어. 뛰어오르고 싶다고, 뛰어올라 뭔가 하고 싶다고 바라고 또 바랐더니, 자신도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난 거야.(본문 51면, 「노란 프라이팬」 중)
모두가 꿈꿔 온 환상적인 마법의 세계
이한준 동화 속 세계는 마법 같은 일들로 가득하다. 밥풀을 떼어 먹으며 자란 밥풀만 한 밥풀이는 어느 날 엄마의 귓속을 들락거리는 머리카락 귀신을 만나, 귀신을 쫓기 위해 무당벌레와 힘을 모은다(「밥풀이」). 그런가 하면 밤마다 잠 못 드는 호리는 방에 걸린 시계 속 세상에 눈뜨고, 그 안에서 매일 쫓고 쫓기는 고양이와 쥐 가족의 고단함을 해결해 주기 위해 시계 속으로 뛰어든다(「시계 속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 아나요?」). 「요의 마법 칫솔」은 주인공부터 마법사가 되려는 인물이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요’는 마법에 재주는 없지만, 아이들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칫솔을 날아다니게 하는 마법을 익힌다. 이 모든 이야기는 지금의 어른들이 어린 시절 매료되었던 서양의 환상적인 동화를 떠올리게 한다. 밥풀만 한 몸집에 한없이 여리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지혜를 발휘해 이내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밥풀이가 그렇고, 벽난로 앞에 치즈와 우유가 놓인 호리의 시계 속 세상이 그렇다. 마법사 할머니에게 마법을 배우고 신기한 주문으로 칫솔을 날리는 요는 물론이거니와, 소인국을 연상케 하는 ‘작은 사람’들 역시 빼놓을 수 없다(「아주 마음에 드실 거예요」). 버섯 집으로 둘러싸인 이 작은 사람들의 나라에 초대받은 소녀 ‘우히’는 설레던 마음도 잠시, 그들의 기이한 행동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아찔한 위험에 처한다. 작은 사람들의 치장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지킨 우히의 선택은 획일화된 기준에 따라 외모를 꾸미는 세태를 꼬집기도 한다. 동화적인 발상, 그리고 그 안에서 생동하는 남다른 상상력과 생기 넘치는 사건들은 『노란 프라이팬』만의 개성이라 하기에 손색없다. 이러한 작품 세계는 최근 우리 동화에서 보기 드문 소중한 것이기도 하다.
“아함, 아주 마음에 드실 거예요.”/“저는 조금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작은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했어요./“네? 그것 참 이상하군요. 전혀 다른 모습이 됐는데 마음에 들지 않다니.”/“전 그냥 제 모습이 좋아요.”/“그럴 리가요!”/작은 사람이 한쪽 눈을 찡끗해 보였어요./“절대 그럴 리 없죠. 당신 나라엔 자기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여기 왔던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고 날마다 새들도 그런 얘기를 전해 주지요.”/우히 눈썹에 힘이 들어갔어요./“그래도 전 제 진짜 모습이 좋아요.”(본문 117면, 「아주 마음에 드실 거예요」)
가족의 풍경과 맞닿아 더해진 실감
그러나 이 작품들이 비단 우리와 동떨어진 시공간에 대한 막연한 상상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한준의 경이로운 세계가 더욱 빛을 발하는 지점은, 이 환상이 바로 지금 우리의 일상 속에서 벌어진다는 사실이다. 환상과 현실의 절묘한 조화 덕분에 이국적인 이야기들이 마치 우리 집, 혹은 바로 옆집에서 벌어지는 듯한 실감으로 다가온다. 그 현실은 특히 가족과 맞닿아 있어, 작품 속 가족의 관계 양상은 때로 이야기를 추동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가령 노란 프라이팬을 팔아넘기려 한 우당탕 가족과, 그를 아끼고 온정을 베푼 우하하 가족의 대비는 노란 프라이팬의 의지를 이끌어 내는 중요한 요소다. 또한 엄마를 괴롭히는 머리카락 귀신 탓에 엄마에게 사랑받을 수 없었던 밥풀이는 엄마를 위해, 그리고 가족의 행복을 위해 용기를 낸다. 늘 부모의 재촉에 시달리던 호리가 시간에 쫓기는 상황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순간, 요원하던 가족 관계의 회복도 물꼬가 트인다. 흔한 가족의 모습에서 빚어내는 우리 현실의 환기는 그 자체로 생각거리를 남겨 주는 한편, 작가가 펼쳐 보인 환상의 세계를 더욱 생생한 것으로 반짝이게 한다. 시대의 현상을 마법의 힘으로 풀어내는 이 귀한 작가의 행보를 주목해 보자.
밥풀이
노란 프라이팬
시계 속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 아나요?
요의 마법 칫솔
아주 마음에 드실 거예요
작가의 말
작고 신비한 이야기들로 여러분과 만나게 되어 기쁘고 고맙습니다. 읽는 동안 즐겁고 다시 만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맑은 날에도 궂은 날에도 이야기는 우리 친구가 돼 줄 거예요. 오늘도 우리 곁에 수많은 마법과 만날 수 있기를, 웃을 수 있기를, 사랑 가득하기를 빕니다. 처음 글을 재미있게 읽어 준 가족, 한 자 한 자 마음으로 살펴 한 권의 책이 되게 해 주신 창비, 느린 저와 함께 걸어 주신 수정에디션에 고마움과 사랑을 보냅니다. 끝으로 상상 가득한 그림을 그려 주신 유설화 님, 고맙습니다.
2015년 2월 이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