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의 동시 부문(2009년)과 평론 부문(2012년)을 잇달아 거머쥐며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주목받아 온 신예 김유진 시인의 첫 동시집이 출간되었다.
『뽀뽀의 힘』은 웃다 보면 어느새 뭉클하고, 새침하다가도 돌연 사랑스러운 다채로운 서정을 섬세하게 그린 동시집이다. 사물에 대한 고정된 인식을 깨뜨리는 새로운 발상과 시집 전반에 흐르는 재치와 익살이 웃음을 자아내며, 감추거나 꾸미지 않는 솔직함이 동시의 본질에 닿아 있다. 생명과 자연, 삶과 가난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엄숙함을 벗어던진 젊은 시인의 유쾌한 재잘거림이 시집을 한 편의 발랄한 노래로 느껴지게 한다.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 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하듯, 어른 시인이 쓴 동시가 어린이 독자와 교감하는 ‘줄탁동시’(啐啄同時)의 시 세계를 꿈꾸는 시인의 바람이 오롯이 전해진다.
기존 동시에서 다소 느슨해졌던 유희적인 부분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은 김유진 동시의 특징 중 하나이다. 시인은 놀이나 유희에 몰입하는 어린이의 심리에 맞닿은 색다른 발상을 기반으로 시 안에서 동화적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읽는 재미를 안겨 준다.
아빠 조끼가 되어/추운 데서 일하는/아빠 가슴을/빨갛게 덥혔다가//도로로로 실을 풀고/라라라라 뜨개질로//할머니 목도리가 되어/낡은 외투 한 벌로/겨울나는 할머니를/동네 멋쟁이로 만들었다가//도로로로 도로로로/라라라라 라라라라//아이 망토가 되어/하얀 눈이 내리는 날/빨간 토끼를/깡충깡충 뛰게 했다가//도로로로 라라라라//갓난아기 모자가 되어/먼 나라의 높고 추운 밤/아기의 생명을 지키는/촛불 하나가 되었다가
—「빨간 털실 한 뭉치가」 전문
「빨간 털실 한 뭉치가」는 바로 이러한 상상력이 잘 드러난 시이다. 반복되는 구조가 그림책 서사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털실 한 뭉치”가 아빠 조끼, 할머니 목도리, 아이 망토, 갓난아기 모자로 변주되어 지루하지 않고 시적인 긴장을 잃지 않는다. 또 털실이 풀리고 다시 뜨개질되는 모양을 “도로로로 라라라라”라고 후렴구처럼 반복함으로써 의미뿐 아니라 외연에 있어서도 마치 노래처럼 운율감이 살아 있는 조화로운 시를 탄생시키는 묘수를 두었다.
한집에 세 들어 사는/인도 아이 영미가 불러/영미 가족과/짜파티를 빚었다//밀가루 반죽을/동글납작하게 빚어/프라이팬에 구우면//풍선처럼 후욱/부풀어 오르다가/풀썩, 납작해지는/인도 빵 짜파티//엄마 일 나간 토요일/저녁도 라면으로/때울 뻔하다가/짜파티를 먹었다//영미와 나/같은 지붕 아래 뜬/보름달/인도 빵 짜파티
—「짜파티를 빚는 저녁」 전문
한편, 시인은 동시를 밝고 유쾌한 감정에만 가두어 두지 않는다. 「분꽃 마중」 등의 시편에서 김유진은 이 사회에서 어린이로서 감당해야 할 외로움의 몫을 정직하게 내보인다. 그는 어린이가 감내해야 할 외로움의 순간들을 직시하면서도 그 외로움을 감싸 안을 수 있는 ‘공동체’에 가닿을 때까지 동시를 밀고 간다. 「여름 방학」에서 느껴지는 아이의 소외감은 바로 이어지는 「짜파티를 빚는 저녁」에서 가난과 국적을 뛰어넘는 우정으로 채워진다. “한집에 세 들어 사는/인도 아이”와 함께 빚은 “인도 빵 짜파티”가 어린 화자의 육체적인 허기와 주말에도 일 때문에 집을 비운 엄마로 인한 심리적인 허기까지 두루 해소하며, 이 넘치는 동심과 인간애는 시 밖의 독자에게까지 “보름달” 같은 포만감을 준다.
이 시집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엄마의 눈으로 아기를 바라보고, 아기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점 전환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개나리 똥 아기 똥」「똥 냄새 젖 냄새」 등의 시편에는 아기 똥을 배설물이 아닌 소화와 성장의 상징으로 보는 엄마의 기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꽃’을 ‘똥’에 비유하고, ‘똥’에서 자연의 이치와 순환의 신비를 깨닫는 시인의 통찰이 인상 깊다.
김유진의 시는 서술에 의존하지 않고 마치 아기처럼 직관적인 언어로 과감하게 본질에 성큼성큼 다가서는 힘을 지니고 있어 동시 본연의 매력을 잘 살린다.
옷장에서 잠옷과 청바지가 춤을 추며 나와요/신발장에서 샌들, 양털 부츠, 고무신이 걸어 나오고/부엌에서 동그란 접시들이 굴러 나오면/책장에서 세상 모든 이야기가 쏟아져 나와요//아기가 스친 곳마다/온갖 물건이 살아 나와요
—「마법에 걸린 집」 전문
위 시에서 시인은 가지런히 정돈된 집, 즉 ‘세계’를 어지럽히는 아기를 생명력을 불어넣는 마법사로 인식한다. 김유진 시인은 자신이 쓴 동시 속 아기처럼 솜씨 좋은 마법사가 되어 생동하는 동시의 세계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제1부 우리는 김씨 가족
블록 쌓기
나는 공주다
뽀뽀의 힘
김
변신 모녀
달걀 프라이
전기 나간 밤
삼겹살 먹는 날
부부 싸움 다음날
할머니 짝젖
꼬르륵
빨간 털실 한 뭉치가
콩 한 쪽
제2부 인도 빵 짜파티
일요일 밤 여덟 시 오십 분
계단 출석부
그네 스푼
공개 수업 하는 날
훔쳐보기
여름 방학
짜파티를 빚는 저녁
꿈
아주아주 작은 것들
김치 노래
보라색 머리핀 하나 사고 싶었는데
아프리카 동물병원
벼락 맞은 놀이공원
제3부 가을을 조금만 덜어 왔어요
봄 감기
개나리 똥 아기 똥
꽃밥
부처님이 미소 짓는 이유
분꽃 마중
꽃을 꺾지 마세요
비야 비야
도깨비풀, 길을 나서다
물안개
오솔길에서
겨울 반달
아침 밥상
고드름
제4부 아기는 별게 다 신기해
동생에 대해 모르는 것 딱 한 가지
나비잠
밤사이
똥 냄새 젖 냄새
짬뽕이 불러 주는 짜장 노래
입
세상에서 가장 힘 센 자매
우리 집 강아지
마법에 걸린 집
짜장면이 신기해
아에이오우
놀이터의 하느님
줄탁동시
해설| 아기처럼 낳아서 기른 첫 동시집_김은영
시인의 말
나의 목소리가 찾아낸 옷이 동시라서 기쁘다. 단순하면서도 깊고, 아름다우면서도 생기 넘치는 목소리여야 어린이에게 가닿을 것이다. 어린이를 바라보며 그 목소리를 가다듬을 수 있다. 나의 이야기가 찾아낸 옷이 동시라서 기쁘다. ‘착한 마음’이지 못한 걸 부끄러워할 수 있다. 내게 ‘착한 마음’이란 가장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을 향한 마음이다. 완고한 세계를 뒤엎는 힘이다. 이 시들은 혼자 쓴 게 아니다. ‘또박또박’ 한 글자씩 함께 적어 나간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가장 가까이에서 나를 견뎌 준 이들에게는 이 책을 빌려 두고두고 미안함을 갚아 나가고 싶다. 2014년 4월 ―김유진